새 시대를 열다 (4)
「사람 사이의 신뢰라. 과연 인문학에 정통한 학자다운 말씀을 하시는군.」
무라카미 총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치가도 아니고 새파랗게 어린 한국의 학자에게 변명이니 실수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민우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
바로 무라카미 총리가 평범한 일본인들과 좀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는 단순히 민우의 명성만을 듣고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니었다.
「맞소. 인정하겠소. 당시 우리 일본은 오만했소. 살짝 압박을 가하면 한국이 꼬리를 내릴 줄 알았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해 한국 기업도 피해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주요 소재의 국산화에 성공했고, 지금은 완전히 기술 독립을 이뤄냈다.
반면 한국에서 독보적인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던 수많은 일본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철수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누워서 침 뱉은 꼴이 된 것이다.
과정이든 결과든 모든 면에서 일본 정부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 말씀을 이 자리에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방금 하신 말씀을 조금 더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시는 건 어떨지요?」
「그건 쉬운 일이 아니네. 여론이라는 게 있으니 말이지. 예전에는 칼로 사람을 죽였지만 요즘은 펜으로 사람을 죽이는 시대야. 한국도 그랬지만 일본도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네. 이 상황에서는 좀 더 대국적으로 움직여야 하네.」
무라카미 총리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제야 민우는 무라카미 총리가 애써 이 자리에까지 나온 이유를 짐작했다.
한국과의 외교를 정상화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수단일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달성하려고 하는 목표는 바로 선거에서의 승리다. 일본은 전통적인 정치 후진국이다. 그래서 이런 편법을 쓰려는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서로를 잘 아는 소식통이 중재해서 오해를 풀고 친목을 다지곤 했소.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래서 박 선생에게 부탁하려는 것이오.」
「글쎄요.」
그렇다면 민우도 한발 물러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총리께서도 느끼고 계시겠지만 현재 일본은 후퇴하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본 국민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를 봐야 하지? 국민들을 위해 일을 하라고 표를 던져줬는데 왜 본인들 배만 불리고 있지?」
그 일침에 무라카미 총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옆에 있던 야마모토 대신은 안절부절못할 뿐이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닐까요?」
「…….」
「대한민국 국민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보상이 아닙니다. 온갖 수식이 들어간 그럴싸한 사과문도 아니고요. 그저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으로도 충분합니다. 총리께서는 선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만, 사실 이보다 쉬운 일은 없습니다.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때로는 그게 지름길이 될 수도 있는 법이죠.」
민우 앞에 마주 앉은 두 일본인은 말이 없었다. 민우의 훈계는 계속되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어볼까요? 과거 2차대전에서 독일은 많은 나라와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유럽연합에서는 물론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가 어땠죠?」
민우는 그 부분에서만큼은 원칙이 확고했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잘 먹고 잘산다고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인정과 존중을 받아야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일본이 반쪽짜리 선진국인 이유는 바로 그러한 인정과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작년 시미즈 교수가 총리께 교훈을 줬을 겁니다. 당시 파격적인 행동으로 손가락질을 받게 됐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일본 지식인의 대부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론과 현실은 다르오.」
「물론 다르겠죠.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언가 변하지 않으면 새로운 내일이 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남이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 아닐까요?」
「흐하하하하.」
무라카미 총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린 그가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민우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혔다.
「손님 신분으로 너무 주제넘은 말을 한 것 같군요.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니, 괜찮소. 과연, 김강현 당선인이 측근으로 둘만 해. 박 선생 정도 되는 분이라면 내가 왜 이 자리로 모셨는지 짐작하셨겠지만…… 단지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오.」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까?」
「몇 년 전 동경대에서 강연하지 않았었소?」
「맞습니다.」
시미즈 교수의 초청으로 일본 동경대에서 강연했던 것을 말하는 듯했다. 왜 오래전 일을 꺼내는 걸까. 민우는 이어질 총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문부과학성 대신이 바로 나였소. 여기 있는 야마모토 대신의 선배 격이지.」
「아, 그러셨군요.」
「실은 그때 나도 강연장에 있었소. 한국에서 온 젊은이의 수준이 어떤지 궁금해서 잠시 앉아 있다 가려고 했었지. 그래서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소. 하지만 나는 강연이 끝날 때까지 쉬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지.」
뜻밖의 말이었다. 동시에 민우의 머릿속에서 당시의 흐릿한 기억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넓은 무대와 수많은 청중들의 표정까지 생생해졌다.
그때를 회상하듯 천장을 바라보던 무라카미 총리가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일본어가 유창해서만은 아니었소. 번역은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박 선생의 그 한마디가 기억에 오래 남더군.」
「좀 뜻밖이긴 하지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네요.」
「그 이후로 나는 박 선생의 행보에 주목했소. 결국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정말 엄청난 거물로 성장하고 말았지. 다른 자리에서 만났다면 더 좋았을 텐데…….」
「총리님. 실례지만 이야기가 조금 벗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니, 주제에서 벗어난 게 아닐세. 나는 내가 진심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거네. 단지 박 선생이 유명하기 때문에 한번 이용해 먹으려고 만나자고 한 게 아니라는 말이지.」
한숨을 내쉰 무라카미 총리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김강현 당선인이 곧 취임한다고 알고 있네.」
「맞습니다.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의 기회를 줄 수 있겠나?」
민우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명인대 소속 교수일 뿐이다. 그런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잡아달라 부탁하고 있었다.
「그건 제가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충분히 나설 일이네. 박 선생은 김강현 당선인의 최측근일세. 그를 왕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지.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아직 그가 당선인 신분이라는 거야. 그러니 박 선생이 나설 근거는 충분하네.」
그제야 민우는 알 수 있었다.
무라카미 총리가 지금까지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애초에 기자회견 따위가 아니라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단순히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거야?’
민우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총리가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정치력이 출중하다는 것뿐.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선뜻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김강현 당선인에게 전화 한 통 하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서지훈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로 가 있기 때문에 연락 자체는 어렵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이번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느냐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민우는 지금까지 수많은 일을 해오면서 작은 날갯짓이 어떤 폭풍을 불러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일관계는 무엇보다도 민감한 문제다.
중개했다는 것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
그러다 문득 타치카와 교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깐.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타치카와 교수를 명인대로 스카웃하는 것도 모자라 그에게 ‘박민우상’까지 주었다.
만약 한일관계에 따른 파장을 두려워했다면 그런 일도 하면 안 되었던 것이 아닐까?
민우는 자신이 지나치게 걱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좋아. 한번 해보자!’
결정을 내린 민우가 말했다.
「좋습니다. 즉시 총리님의 의견을 김강현 당선인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내일 열릴 학술대회도 잘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볼일을 마친 무라카미 총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즉시 별실을 떠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굳게 악수했다.
「참, 박 선생.」
「예.」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이지만, 내가 아까 선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사과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네. 다만 나는 시미즈 선생과 다른 사람이고, 그와 방법을 달리하고 싶을 뿐이지.」
「방법을 달리하고 싶다면…….」
「자세한 건 조만간 알게 될 걸세.」
그 말을 남긴 무라카미 총리가 먼저 별실을 나섰다.
* * *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민우는 바로 김강현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 오! 이게 누구신가. 박 교수 아니십니까? 어쩐 일입니까? 먼저 전화를 다 하시고.
목소리가 유쾌했다.
한편으로는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할 때면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하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바쁘더라도 연락을 자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잘 지내시나 궁금해서 연락드렸어요. 요새 통 인사 못 드린 것 같아서요.”
― 안 그래도 서지훈 위원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지만 가끔 걸려오는 전화가 정말 뜻밖의 엄청난 선물이 되지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민우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을 말했다.
“지금 일본에 와 있는데요. 실은 무라카미 총리를 만났습니다.”
― 무라카미 총리를?
김강현의 반응이 진지해졌다. 지금은 아니지만 며칠 뒤면 이제 대통령이 될 본인이 신경 써야 할 일이다.
“총리께서 제안하셨습니다. 대통령으로 취임하시면 제일 먼저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고요.”
민우는 그 배경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탄식이 나오기도 하고 웃음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김강현은 민우 앞에서만큼은 가식을 떨지 않았다.
― 그거 아주 반가운 소리군요. 무라카미 총리가 그런 이야기를 할 줄이야. 하긴, 최근 일본 산업계가 많이 침체되긴 했습니다. WTO 사무총장도 우리 사람이 당선되어서 형세가 불리하게 흘러간 것도 있지요. 무라카미 총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경색을 풀어야 하긴 할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별다른 말씀은 못 드렸습니다.”
― 그렇군요. 그런데 그 양반도 배짱이 대단하군요. 초면인데 그런 부탁을 다 하다니.
“정확히는 초면이 아니더라고요. 예전에 동경대에서 제 강연을 들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얽힌 이야기도 해주었다. 무라카미 총리가 자신을 이용해 먹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 하하하하! 역시 박 선생이십니다! 일국의 지도자의 마음도 사로잡는 화려한 언변을 가지고 계시군요. 하긴, 그렇기 때문에 제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던 거기도 합니다만. 뭐, 좋습니다! 괘씸하긴 하지만 박 선생의 부탁이니 당연히 추진해 봐야지요. 내일 바로 측근들과 논의해 보겠습니다.
“긍정적으로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 선생.
“예?”
― 다른 말은 안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지금처럼 말이죠.
그 한마디에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