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87화 (487/500)

새 시대를 열다 (3)

「초대해 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야마모토가 와인잔 두 개 중 하나를 민우에게 건넸다. 민우는 웃으며 잔을 받았다. 야마모토 대신은 건배를 제안했고, 민우는 기꺼이 잔을 부딪쳤다.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멋진 곳이네요. 이런 곳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일본에 자주 왔을 텐데요.」

「다른 동료분들도 함께 해주셔서 기쁩니다. 정말 아름다운 밤 아닙니까?」

야마모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홀을 돌아보았다.

타치카와 교수를 비롯해 주예린, 정연주, 자얀, 서강일까지 모두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엔 대한그룹의 비서실장인 유진태의 모습도 보였다. 정연주는 자신의 수행이라며 유진태 실장과 함께했다.

민우가 데려온 동료들은 일본 당국자들과 어울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통역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문부과학성에서는 오늘 행사를 위해 통역을 다섯 명이나 대기시켰다. 그리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당국자 위주로 참석시켰다.

일본의 치밀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기왕 도와드리기로 했으니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려야지요.」

「아무래도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저희 쪽에서는 여러모로 걱정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여쭤봐야겠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금 말씀하신 그 ‘많은 일’ 말이죠.」

불쑥 던져진 질문에 야마모토가 긴장했다.

반면 민우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결례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일본 정부의 입장을 이 기회에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야마모토는 유감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매스컴이 과열되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가짜 뉴스나 오보를 퍼트리게 되면 관련법으로 처벌받지 않습니까? 언론의 파급력을 생각한다면 중죄라고 봅니다만.」

「선생의 말씀이 맞습니다. 안 그래도 관련 부서에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 일본 정부는 ‘박민우상’을 지지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이 괴로우셨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여 사과드립니다.」

정중한 사과였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와인을 한 잔 들이켰다.

그때 직원 하나가 조심히 다가와 야마모토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야마모토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민우에게 조심히 청했다.

「프로페서. 이따 괜찮으시면 따로 좀 뵐 수 있겠습니까?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다른 분이지만.」

「다른 분이요?」

일본 각료가 높임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불현듯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다.

「좋습니다. 이따 준비되면 불러 주세요.」

「고맙습니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야마모토가 물러났다. 민우가 혼자가 되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접근했지만, 민우가 한발 빨랐다.

민우는 한쪽 창가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연주와 유진태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데이트해도 되는 겁니까?”

민우가 두 사람을 보며 놀렸다.

반응이 제각각이다. 정연주는 싱글생글 웃었고, 유진태는 흠칫 놀랐다.

“데이트라뇨?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그쵸? 유 실장님.”

“어…… 그게…….”

정연주가 웃으며 말했다. 민우는 그녀가 좀 더 뻔뻔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투도 좀 달라졌다. 정연주는 유진태에게 편히 반말을 썼다. 하지만 지금은 존대를 쓰고 있다. 생각해 보니 공항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저번에 파리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유 실장님 데리고 왔잖아. 원래 해외 일정엔 따로 수행하는 사람 있지 않았어?”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우연도 반복되면 필연이 되는 법이지.”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유진태가 시선을 피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빨개지고 있었다.

그제야 민우는 확신했다.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실제로도 그랬다.

정연주와 유진태는 진지하게 교제를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성격이 뒤바뀌고 있었다. 부끄럼이 많던 정연주는 좀 더 뻔뻔하게, 매사에 스마트했던 유진태는 부끄러움이 많게끔.

“축하드려요! 오랜 인연이 이렇게 결실을 보다니. 유 실장님 연주 정말 좋아했잖아요.”

“커, 커흠…….”

“아직은 비밀일 테니 축하는 저밖에 못 해주겠네요. 잘됐다. 정연주.”

민우의 말에 정연주가 흥미를 보였다.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척 보면 딱이지.”

“그래도 좀 걱정되긴 해요. 우리의 관계를 밝혔을 때 가족들이 순순히 수긍할지 말이죠.”

재벌가의 여자와 일반인 남자가 맺어지는 경우, 보통은 그 끝이 좋지 않았다. 정연주는 대한그룹의 사람으로 나고 자랐다. 그런 경우는 숱하게 봐왔을 것이다.

“그래도 만나기로 결정을 내렸다면 끝까지 갈 자신은 있는 거겠지?”

“정 안 되면 모든 자리에서 물러날 거예요. 유 실장님하고 같이 지내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죠. 그렇게 되면 제가 하려던 일들을 마무리 짓지 못해서 아쉽겠지만, 이젠 더 소중한 사람이 생겼으니까.”

정연주와 유진태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빛은 똑같았다. 존경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이었다.

“그래도 너무 싱겁게 물러나진 마. 아직 경쟁은 시작하지도 않았잖아?”

“빨리 총장 자리로 올라가세요. 그때 승부를 보죠.”

“오케이!”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떠올라 민우가 정연주에게 물었다.

“근데 누가 먼저 고백했어?”

민우의 한마디는 폭탄과도 같았다. 유진태의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것 같다.

“제가 꼬셨죠. 말 잘 들으면 연봉 올려주겠다고요.”

“하하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네.”

“그래서 앞으로 하는 거 잘 지켜보려고요. 동결일지, 인상일지?”

유진태 실장이 다시금 헛기침을 했다. 귀엽고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는 잔을 슬쩍 들어 보이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문부과학성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조용히 민우의 귀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별실로 모시겠습니다.」

빈 잔을 내려놓은 민우는 그를 따라 홀을 나서 외진 복도를 걸었다.

* * *

안은 매우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은 이 레스토랑의 VIP를 위한 전용 공간이었다.

엔틱한 느낌의 가구와 고급스러운 장식품들이 벽에 둘러서 있다. 유럽에서 건너온 듯한 서양화가 몇 점 걸려 있고, 촛불까지 켜놔 근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그 안엔 두 명의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는 사람이었다. 한쪽은 문부과학성의 야마모토 대신이었고, 다른 한쪽은 무라카미 총리였다.

‘역시 예상대로였어.’

예상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있었다.

야마모토 대신이 경칭을 쓴 사람. 그리고 민우가 대통령 취임을 앞둔 김강현과 가깝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일어나 민우를 맞았다. 민우는 먼저 총리대신과 악수했다.

「처음 인사드리네요. 박민우입니다.」

「무라카미 사토시오.」

「TV에서만 뵙다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네요.」

두 사람이 악수했다. 다소 긴장한 무라카미 총리에 비해 민우는 여유롭게 자리에 앉았다.

민우를 빤히 바라보던 총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었소?」

「아닙니다. 들은 바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시는군.」

「아까 야마모토 대신께서 따로 자리를 청하실 때 대강 짐작했습니다. 몇 가지 단서를 떠올리니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총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우의 능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번 한국의 대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고 들었네. 승리를 축하하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바로 대학으로 돌아간 건가? 김강현 당선자 밑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말이네.」

「대학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총리는 민우의 당돌한 그 한마디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총리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야마모토 대신에게는 대강 이야기를 들었네. 일본행을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박 선생의 용기에 감탄했네.」

「정확히 따지면 시미즈 교수님이 더 큰 용기를 내주셨습니다. 작년 겨울에 발표된 성명서는 제가 큰 영감을 주었죠. 그래서 그 용기에 답례하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그렇군.」

「총리님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성명서 말인가?」

「예.」

무라카미 총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일본의 지도자다. 교육과 관련된 문부과학성 대신이 긍정적인 평가를 해도 그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다. 워낙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좀 섣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네. 학계와 언론이 충분히 합의하고 발표했어야 했네. 지금은 좀 잠잠해졌지만, 그때는 아주 홍역을 치렀지.」

「그렇군요.」

「서운한 대답이었나?」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하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총리님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고맙군.」

깍지를 낀 총리가 몸을 민우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기울였다.

「내일부터 진행될 학술대회에서 지금까지 쌓였던 오해가 풀리길 바라네. 야마모토 대신이 협력해서 좋은 성과를 만들어 줄 걸세. 언론 문제를 비롯해 각종 교육 현안들은 충분히 해결될 거라고 믿네. 그 과정에서 양국이 협력할 방안이 생기겠지.」

열심히 하라는 말이었다. 야마모토가 명을 받들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총리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따로 보자고 한 것은 조금 다른 문젤세. 사실 이 이야기를 자네와 논의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라면 얼마든지 듣겠습니다.」

「나는 지금 한국과 겪고 있는 무역 분쟁을 해결하고 싶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민우의 눈이 좁혀졌다. 무역이나 경제 분과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야마모토 대신은 물론, 무라카미 총리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자리를 청했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 아닐까?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실무자 회의는 물론 외교 채널까지 대부분 막아놓은 상황이야. 우리 일본은 완전히 고립된 셈이지.」

「이런 말씀을 올리긴 죄송하지만 그럴 만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과거 일본 정부가 했던 수출 규제의 내용을 뜯어본다면 말이죠. 일방적인 트집 잡기였고, 그 일이 이렇게 커진 겁니다.」

「으음,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네. 하지만 정치라는 게 그렇게 한 가지 이유로만 분석될 수 있는 건 아니야. 여러 이해관계가 있었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거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말이 민우에겐 변명이자 무책임한 말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하하하. 총리님. 지금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게 있는데요.」

민우의 한마디에 총리의 두 눈이 매섭게 좁혀졌다. 중간에 낀 야마모토 대신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민우는 일본의 총리라고 해서 전혀 주눅 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가르치듯 훈계하고 있었다.

「사람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과와 반성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나라와 나라 사이는 어떨까요? 지금 하셔야 하는 건 변명이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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