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열다 (2)
일본의 문부과학성 대신이 직접 마중을 나온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민우와 타치카와 교수만 입국했더라면 적당한 당국자를 보내 인사치레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이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서강일은 최근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스타가 됐다.
휴머니티의 가치가 무궁무진하게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적인 기업들이 투자하겠다고 나서고 있었고, 유명한 대학과 교육 협약을 체결하며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여전히 아날로그에 기대는 면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 디지털 기반의 교육 생태계를 완벽히 구축한 휴머니티는 일본 교육계의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었다.
거기에 자얀까지 합세했다.
자얀은 이미 세계적인 부호로 널리 알려져 있고, 교육은 물론 과학기술 분야에 큰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니 일본 정부에서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는 이번 기회를 바탕으로 한국과의 무역을 정상화시키고, 학술 교류는 물론 각종 투자까지 한큐에 해결하려는 원대한 꿈을 세웠다.
그래서 문부과학성 대신이 이례적으로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이렇게 쟁쟁한 분들께서 방문해 주시니 정말 기쁘고 즐겁습니다. 체류하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우리 일본 정부에서 책임지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야마모토 대신이 고개를 숙였다.
취재 경쟁을 벌이던 일본 기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위대한 일본의 각료가 한국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날이 오다니.
하지만 민우는 자만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을 뻗어 야마모토 대신의 손을 잡았다.
「저희도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기꺼이 나서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세요. 제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 왔으니 중요한 일이라도 바로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아! 고맙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밖에 셔틀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민우를 선두로 일행이 공항을 빠져나갔다. 밖에는 소형 셔틀이 준비되어 있었다. 민우와 일행을 안전하게 호텔까지 데려다줄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경찰차도 세 대나 배치되어 있었다. 바이크를 탄 경찰도 다섯이나 있었다.
혐한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라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저희 직원이 이따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이따 뵙도록 하지요.」
민우와 일행은 야마모토 대신과 작별하고 셔틀에 올랐다.
타치카와 교수가 민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일본 정부에서도 아주 단단히 준비하고 나온 것 같습니다. 각료가 직접 공항까지 나오는 일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거든요.」
「기자들 반응을 보니 알겠더군요. 일본은 파격을 좋아하지 않는 나라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만큼 이번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미래에 대한 투자이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투자요?」
그때 셔틀이 출발했다. 창밖으로 한국인에 대한 혐오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타치카와 교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일본 정부는 박 선생의 미래를 내다봤을 겁니다. 이번 대선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요. 저는 공개적으로 더 이상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일본인들은 의심이 많습니다. 복심이라고 순화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의심 쪽에 가깝죠. 그들은 박 선생의 출마 가능성을 염두에 둘 겁니다.」
「출마라면…….」
「대선.」
민우가 고개를 돌려 타치카와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치카와 선생님.」
「예.」
「저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한 말에 대한 책임은 져야죠. 서지훈 선생님께서 대선에 출마하는 일은 있어도 제가 나서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방금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네요. 서지훈 선생께서 출마하시면 박 선생께서 가만히 계실 수 있을까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타치카와에게 한 방 맞은 민우가 피식 웃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다시 캠프로 불려가겠죠.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저는 명인대에 남아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타치카와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민우는 어느새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의 눈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 * *
호텔에 도착한 민우와 일행은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일본 정부가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호텔 직원들은 평소보다도 더욱 친절하고 신중히 임했다. 그래서 전혀 불편한 게 없었다.
띠리리링!
짐을 한창 풀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민우가 수화기를 들었다.
「박민우 교수님. 문부과학성입니다.」
「예. 말씀하시죠.」
「대신께서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시간 괜찮으신지 여쭤보려고 연락 드렸습니다.」
「좋습니다. 시간은요?」
「저녁 7시입니다. 호텔로 차를 보내겠습니다.」
「저 혼자 참석하면 되나요?」
「가능하면 일행분들도 오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이미 야마모토 대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하라고 해둔 상태다. 그렇다면 상대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딜을 해올까? 궁금하네.’
그들이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민우의 인맥과 자얀의 오일 머니.
민우는 이따 만찬에 참석하기 전에 동료들과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자얀의 의향은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우연히 타치카와의 한일관계 강연을 들은 자얀은 분개했다.
과거 일본 제국이 한국 사람들에게 자행한 온갖 나쁜 일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선량한 일본인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없는 그들의 태도와 일본 정부의 이기적인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한마디 했다.
독일이 선진국인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똑똑.
그때 노크가 들렸다.
민우는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반가운 얼굴이 둘이나 보였다.
「일본에서 다시 선생을 만날 수 있다니. 이거 꿈만 같군요!」
「시미즈 선생님.」
그뿐이 아니었다. 옆에는 옛날에 동경대에서 인연을 맺은 시미즈 교수의 제자, 이시카와 류타로도 함께였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잘 지냈냐?」
「나야 잘 지냈지! 이제는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대스타가 됐던데?」
「대스타는 무슨.」
「아까 뉴스 봤어. 야마모토 대신이 마중을 나갔더라고. 한국말로 ‘대박’이라고 하던가? 난 처음 봐! 각료가 그렇게 공항까지 마중 나가는 장면 말이야.」
한마디로 민우와 일행은 국빈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시카와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런 순진한 모습에 이끌려 친구가 된 것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들어오기나 해. 시미즈 선생님도 어서 들어오시죠.」
「이게 왜 쓸데없는 소리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민우는 두 손님을 안으로 들였다. 미니 바에서 간단히 마실 것을 준비해 테이블에 놓았다.
「보니까 다른 손님들도 많이 오신 것 같더군요.」
시미즈 교수가 물었고, 민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학회에 정말 많은 분들이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새로운 지식에 목이 마른 사람들이 많아서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특히 서강일 선생은 우리 쪽에서도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오고 있지요. 다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더군요.」
「다행입니다.」
온천욕을 즐기기 위해 들어온 주예린을 제외한 다른 동료들은 민우와 타치카와가 참석하는 학회에 관심이 있어서 동행했다. 일본 현대사상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물론 민우의 눈엔 정연주도 다른 계획이 있어 보였다.
이번에도 유진태 실장을 데려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다. 민우의 눈엔 그게 분명히 보였다.
「그런데 내부 분열은 잘 수습되고 있는 겁니까? 밖에서 보기에는 여전히 심각한 것 같아서 말이죠.」
「아무래도 밖에서는 언론이 쏟아내는 거짓 기사들이 많으니까 그렇게 보일 수밖에요. 일본 학계는 점점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기조는 변하지 않았지요.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면서 혐한 시위대를 목격했습니다.」
「그건 정치적인 쇼입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딜 가나 유독 극성스런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일 학회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겠네요.」
「참석자가 300여 명 정도로 예상되지만 아마 더 올 수도 있을 겁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뭔가 변해야겠다고 깨닫는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문을 두드리겠지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오늘 저녁에 일정이 있으십니까?」
시미즈 교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녁 식사를 같이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늘 저녁에 문부과학성 대신께 초대를 받았습니다. 저녁은 거기서 먹을 것 같네요.」
「아쉽군요. 옛날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우리가 같이 갔던 그 초밥집, 여전히 맛있거든요.」
「아, 거기요. 참 좋았죠. 가끔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민우는 처음 동경대에 갔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날 밤 시미즈 교수는 자신의 단골 초밥집에 데려가 식사를 했었다. 신선하고 맛있었다.
「그럼 다음에 대접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요. 쉬셔야 하는데 방해를 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교수님. 내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심심하면 전화해!」
이시카와가 손을 흔들며 시미즈 교수를 따라 호텔방을 나갔다.
민우는 핸드폰을 켜고 일본 뉴스 포털에 접속했다.
헤드라인에 자신의 이름이 도배되다시피 했다.
민우는 기사를 클릭하며 현재 분위기가 어떤지 확인했다.
‘확실히 논조가 예전보단 부드러워졌네. 역시 각료가 나와서 그런가?’
정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기사들도 보이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정부의 정중한 접객 태도를 호평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대놓고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 비난의 화살이 민우에게만 향하는 게 아니라 문부과학성을 위시한 일본 정부로도 향하기 때문이다.
민우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야마모토 대신을 잘 설득한다면 일본 여론의 흐름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 거다.
‘친구들하고 좀 이야기를 해봐야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단톡방에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지금 바로 집합하라고.
* * *
그날 밤, 도쿄 외곽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만찬이 열렸다. 야마모토 대신은 민우와 동료들을 위해 식당 전체를 빌렸다.
얼마나 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호화찬란한 곳이었다.
한쪽에는 편안한 식사를 위해 연주자들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현을 켜며 감미로운 선율을 연주했다.
「야마모토 대신이 정말 칼을 갈고 나온 모양입니다.」
「그래요?」
민우는 타치카와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40년 이상을 일본에서 산 베테랑이었다.
「파격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문부과학성에서 사설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이 말은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뭔가를 얻으려고 한다는 거지요.」
「절실해진 모양이네요.」
「그럴 수밖에요. 박 선생의 국적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니까 말이죠.」
「요즘 농담이 많이 느셨습니다?」
민우와 그 일행은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로페서.」
누군가 민우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야마모토 대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오른손엔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