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85화 (485/500)

새 시대를 열다 (1)

학위논문 심사를 시작으로 민우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보직도 없고 강의도 없는 교수가 이렇게 바쁜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간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렸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힘을 보태주었다. 휴머니티에서도 그를 환영하는 파티가 열렸다. 민우는 어디를 가든 환영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라 한동안 출연하지 못했던 KBC 교양프로그램 ‘독서의 밤’에도 특별 출연해 많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다 보니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논문 나왔습니다.”

올 한 해도 저물어갈 무렵, 차민재가 검은 양장으로 인쇄된 논문 한 부를 들고 연구실로 찾아왔다. 민우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논문 제목과 이름이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한쪽 구석엔 지도교수의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그곳엔 민우의 이름이 아니라 이수빈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석사과정 지도교수는 민우였지만 논문 지도교수는 이수빈이었다. 민우가 중간에 휴직을 했기 때문에, 3학기에 들어선 차민재가 논문 지도교수를 이수빈으로 제청했다.

“아쉽네. 내 이름이 아니라 이수빈 선생 이름이 들어가 있어서.”

“괜찮습니다. 이수빈 선생님께도 정말 많이 배웠으니까요.”

“너한텐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삼세번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절 버리신 건 아직 두 번이니까 한 번은 남지 않았을까요?”

“하하하. 이 녀석이.”

적절한 농담이었다. 민우가 논문의 첫 페이지를 열어보니 오른쪽 하단에 감사의 글귀와 차민재의 이름이 손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 글귀를 쓸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마음이 찡해졌다.

논문도 하나의 작품이다.

작품을 출산에 비유할 수 있다면, 차민재는 이제 산통을 이겨내고 새 생명을 낳았다. 이제 이 논문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문득 민영환 교수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

이 논문이 나오기까지 차민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민우는 제자를 격려해 주었다.

“정말 고생 많았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지? 내년 계획은 세웠냐? 다들 네 행보에 관심이 많아. 얼마 전엔 레아 씨까지 나에게 물어보더라.”

“일단…… 내년 전기 대학원 모집엔 원서를 내지 않았습니다.”

“음. 그렇구나.”

대학원은 연간 두 번의 입시를 치른다. 크게 전기 모집과 후기 모집으로 나뉜다.

보통 4학기에 논문 심사를 받는 석사과정생들은 졸업예정증명서와 함께 미리 원서를 내 박사과정에 지원하곤 한다. 하지만 차민재는 지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세워둔 계획이 있는 듯했다.

사실 민우는 차민재가 바로 박사과정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예감하고 있었다.

차민재는 자신을 롤 모델로 삼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자신을 보고 어떤 마음을 품을까. 누구나 상상해볼 수 있다. 민우처럼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경험을 쌓고 싶을 것이다.

“1년 정도 쉬면서 세계 각지를 돌아다녀 보고 싶어요. 견문이 좁은 것 같아서 늘 아쉽고 답답할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선생님이 참 부러웠습니다.”

“부럽기는. 목적지는 정했어?”

“아직 정하지는 않았어요.”

“그럼 이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민우는 책상에 올려둔 편지 봉투를 집었다. 얼마 전 이수빈이 자신에게 준 것이었다. 유용하게 쓰라면서.

겉에는 ‘Harvard University’라는 영문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받아든 차민재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예전에 이수빈 선생 하버드에 초청받아 유학 다녀온 거 알고 있냐?”

“예.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 이후로 우리 과에서 정기적으로 유학생을 보내고 있어. 원래 임시로 하던 거였는데 이수빈 선생이 워낙 좋은 성과를 내서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지.”

“아…….”

“그쪽에서 학생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어때? 딱히 목적지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미국에서 공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멍하니 편지 봉투를 바라보던 차민재가 그것을 뜯었다. 편지를 열어보니 정중한 문체로 씌어 있는 초대장이 위용을 드러냈다.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이나 이수빈 선생님께도 다른 제자들이 많잖아요.”

“다른 건 생각할 거 없다. 갈지 말지 그것만 생각하면 돼.”

“가겠습니다!”

“결정이 빠른데?”

민우는 웃었다. 그는 차민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박사과정에 지원하지 않았다는 전제조건하에서 말이다.

“기왕 여행을 가는 거면 가이드가 있는 게 좋잖아요. 이렇게 좋은 가이드를 붙여주셨는데 제가 마다할 이유는 없죠.”

“영어는 괜찮지?”

“선생님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합니다.”

“다행이군.”

이제 차민재는 1년간 하버드에서 공부하게 될 것이다. 1년 뒤 그가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문득 궁금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타고 와보고 싶을 정도로.

“그럼 출국 준비해라. 늦어도 다음 달에는 나가봐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준비 마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정리 잘하고.”

“넵!”

꾸벅 인사한 차민재가 연구실을 나갔다.

이제 제자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일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민우는 다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뒤적였다.

이젠 민우가 출국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이제 슬슬 약속을 지킬 때가 됐지?’

지난 ‘박민우상’ 시상식에서 일어난 이변 때문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가 시미즈 유이토 교수가 일본 지식인들과 함께 성명서를 들고 방한했었다.

그때 시미즈 교수는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와 매스컴의 문제를 지적했고, 양국이 서로 협력하여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답례로 민우는 타치카와 교수와 함께 일본에 방문해 학술 교류를 하기로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이다.

때마침 타치카와 교수가 연구실에 찾아왔다. 민우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와 마주 앉았다.

「시미즈 선생 쪽에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학술행사 참석 인원은 대략 3백여 명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3백여 명. 적지 않은 숫자다.

동경대의 시미즈 교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지난번 발표된 성명서에 이름을 넣은 분들이 대부분 오시는 모양이네요.」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성명서가 발표된 직후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심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겁니다. 그대로 놔두다간 상처만 곪을 뿐이죠.」

「그렇긴 해요.」

시미즈 교수가 한국에서 성명서를 발표한 이후 일본 열도는 발칵 뒤집혔다. 각종 학계의 보수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때문에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여전히 두 집단은 서로의 견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매스컴들도 혼란에 빠졌다.

가짜 뉴스와 오보는 기본이었고, 심지어는 혐한 시위까지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 모든 게 한국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타치카와 교수는 여전히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최근 타치카와 교수는 한국으로 귀화했다.

그의 뿌리는 일본에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일본인으로서가 아니라 이웃 나라의 국민으로서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늘 그렇듯 잘 해결될 거니까요.」

「정말이지 박 선생께서는 늘 천하태평이셔서 부럽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따로 계획이 있으신 모양이네요.」

「있긴 합니다.」

민우는 타치카와 교수에게 자신이 세운 계획을 차근히 설명해 주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 놀라움으로 바뀌고, 그것이 종국에는 존경심으로 바뀌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타치카와 교수가 감탄을 내뱉었다.

「이런 안배를 해두셨을 줄이야……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역시 박 선생의 혜안은 따라갈 수가 없군요.」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아직 비행기도 안 탔는데. 아마 이 정도라면 일본에서도 싫어하진 않을 겁니다. 그쪽에도 분명히 옵션을 주는 거니까요. 생산적인 토론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분명 일본에서도 쉽게 대응하진 못할 겁니다.」

「그냥 쉽게 나오셨으면 좋겠네요. 진심으로.」

민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민우 일행이 탄 비행기가 일본에 무사히 안착했다.

「박 교수는 아직인가?」

「입국 수속이 너무 늦는데?」

「혹시 입국 금지당한 거 아닌가?」

「와하하하하!」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인 기자들이 아무렇게나 떠들고 있었다.

민우와 타치카와 교수, 그리고 그들의 특별 일행이 일본에 방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일본 열도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언론의 난타전은 여전했다.

낯짝 두꺼운 변방의 학자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써가며 민우를 비난하는 언론이 많아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민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미즈 유이토 교수가 준비한 학회에 참석하고, 또 그 밖의 행사를 진행하면서 생산적인 교류만 하고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황이었다.

「어…… 저 사람은?」

「헉!」

「문부과학성 대신이잖아?」

일본 기자들이 흠칫 놀라며 한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수행원들 사이로 문부과학성 대신인 야마모토가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일본 취재진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문부과학성 대신이 왜 공항에 나타난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부 기자들은 본사에 전화를 넣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굳은 표정의 문부과학성 대신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박민우다!」

「박 교수가 나왔다!」

놀랍게도 문부과학성 대신의 시선은 게이트를 나서고 있는 민우 쪽을 향해 있었다.

야마모토는 팔을 벌려 민우를 맞았다.

사전에 연락받지 못한 일이었다. 민우는 다소 놀랐지만, 다행히 야마모토의 이름과 직위를 잘 알고 있었다.

「일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박민우 선생.」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부과학성 대신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보통은 악수로 끝나지만, 야마모토 대신은 민우와 살짝 포옹했다. 일본 각료가 이렇게 파격을 보이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그 순간을 기자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이 사진은 실시간으로 본사로 전송되어 특보로 보도되었다.

「박 선생께서 귀한 손님들과 함께 오신다는 말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오늘 일정을 취소하고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러셨군요. 기왕 오셨으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민우는 함께 온 동료들을 소개했다. 먼저 타치카와 교수와 인사를 나눴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동아시아의 명사였다.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강일이었다.

「휴머니티 학장 서강일입니다. 반갑습니다.」

「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야마모토 대신의 눈이 반짝였다. 휴머니티는 최근 그가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는 교육 단체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청문대 이사장 정연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주예린이에요. 초면에 죄송하지만 좋은 온천 좀 소개해 주시겠어요? 차기작은 온천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소설이거든요. 아, 절대로 제가 온천 가고 싶어서 여쭤보는 거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께 알라의 평안이 깃들기를!」

마지막으로 자얀이 흰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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