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84화 (484/500)

다시 대학으로 (5)

“어? 박 선생.”

민우가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반가운 인물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함께 있었다.

대학원에서 만난 직속 선배인 이재환과 최민식이었다.

이미 두 사람은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전임교수가 되어 자리를 잡았다. 최근엔 민우와 현대서사학회를 함께 꾸려나가고 있다.

최민식은 민우의 매형이기도 해서, 굳이 대학이 아니더라도 볼 일은 많았다.

“선배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평소라면 형이라고 하겠지만, 오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민우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늘 홍찬주 선생 박사논문 심사 있어서 왔어. 너도 오늘 심사라면서?”

학칙에 따라 박사논문 심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외부 심사위원 두 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명인대 출신이기도 한 이재환과 최민식을 부른 것이다.

“아, 맞다. 찬주도 이번에 심사죠? 저는 지금 민재 쪽 심사 끝나서 연구실에 가 보려고요.”

“어땠어?”

“아주 좋았어요. 예진 선배는 불만이 좀 있어 보였지만요.”

“역시. 그 스승의 그 제자군.”

“하하하.”

“백수 생활 끝나서 많이 아쉽지?”

“어쩔 수 없죠 뭐.”

이재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최민식이 할 이야기가 있는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내년 1학기 즈음 박사논문 심사 하나 맡아줄 수 있냐?”

“백현대요?”

“그래. 내가 지도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네 논문을 잔뜩 인용해 왔더라고.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보려면 원저자를 불러야 하니까.”

“심사가 아니라 팬미팅이 될 수도 있겠네요.”

민우의 한마디에 이재환과 최민식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건방지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민우라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아무튼, 와줄 수 있지?”

“불러만 주시면 언제든 가겠습니다.”

“오케이.”

대변인 생활을 끝내고 처음으로 만나는 상황이라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곧 심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다.

이재환이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다음에 한번 다 같이 보자. 예진이랑 같이.”

“옙. 고생하십쇼.”

“박민우.”

돌아서려고 했는데 최민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호도 없이 캔커피가 날아왔다. 최민식이 들고 있던 캔커피를 민우에게 던진 것이다.

민우는 한 손으로 가뿐히 받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논문 심사엔 캔커피가 제격이잖아?”

“잘 마실게요.”

민우는 언젠가의 추억을 되뇌며 캔커피를 꼭 쥐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뭐야?”

민우는 잘못 들어왔나 싶어 출입문에 박힌 호수를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자신의 연구실이 맞았다.

“왜 그래요?”

“그러게. 심사를 너무 열심히 해서 정줄 놨나?”

이수빈과 강예진이 한마디씩 했다.

둘은 자리를 잡고 간식을 먹으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이수빈과 나란히 연구실을 쓰기 때문에 잘못 들어온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민우는 짐을 책상에 내려놓고 이수빈의 옆자리에 앉았다.

“수빈이 연구실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놀랄 걸 놀라야지? 못 올 손님도 아니고.”

“요즘 한가하신가 봐요?”

“일 열심히 했는데 좀 쉬면 안 되니? 얘는 나이 먹더니 사람 채근하는 스킬만 늘었네. 석사 때 좀 잡아놨어야 했는데.”

“쓸데없이 민재한테 화풀이하니까 그렇죠.”

“어머머, 누가 화풀이를 했다고 해?”

강예진이 정색하며 답했다. 다행히 안에는 차민재가 없었다. 논문 심사가 끝났으니 동료들과 함께 근처 술집에서 부어라 마셔라 할 것이다.

“개판이 뭡니까 개판이? 좀 좋게 이야기할 수도 있잖아요. 문장이야 오래 쓰면 자연스레 느는 법인데 그걸 못 기다려서 뭐라고 합니까?”

“제자를 두 번이나 버린 사람이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윽…….”

민우는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차민재가 민우를 따라 학교를 두 번이나 옮겼다는 것은 명인대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차민재가 처음 민우를 만난 것은 상아대였다.

민우는 모교 강의실에서 차민재를 만났고, 이후 청문대로 자리를 옮기자 차민재는 대학에서 자퇴했다. 그리고 수능을 다시 치러 청문대에 입학했다.

시간이 흐르고 청문대를 졸업한 차민재는 명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곳에 민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면 민우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두 번이나 대학을 옮긴 것이다.

강예진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평소에 잘 가르쳤어야지. 너 석사 시절에 문장 가지고 민식 오빠한테 털리던 거 기억 안 나? 오냐오냐 키우는 것도 제자한테 안 좋은 법이다?”

“아, 예. 자알 알겠습니다.”

민우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친누나가 눈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도 민재 보니까 나도 제자 키우고 싶더라. 똘똘한 녀석으로.”

“누나도 자리 잡으면 키울 수 있겠죠. 따르는 사람 은근 많잖아요?”

“다들 무서워하던데?”

“그럴수록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종종 있잖아요. 제가 석사 때 그랬던 것처럼요.”

민영환 교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때는 정말 무서웠다.

그나마 두려움을 덜어내고 그를 선생으로서 존경할 수 있게 된 것은 실존주의 연구 노트를 그에게 물려받았을 때였다.

만약 그 일이 없었더라면 아직까지도 무서워하고 있을 거다.

“그건 민 선생님이 그만한 자격이 있으셔서 그런 거지. 성격이 어떻든 결국 그 사람이 이룩해놓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난 아직 없잖아. 민 선생님은 국문학계의 대부니까. 그리고 너나 수빈이나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하고 있잖아? 민우 너는 번역을 잘하고, 수빈이는 평론을 잘하고. 근데 그에 비해서 나는 뭔가 잘하는 게 없단 말이지.”

신랄한 자기비판이었다.

사람은 비교에 익숙하다. 애초에 다른 것과 비교하도록 설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꾸준히 질투하고 좌절하며 때로는 절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민우에게 있어 지금 강예진의 고백은 쉽게 흘려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위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요. 굳이 저는 아카데믹한 것으로 사람의 능력을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교수잖아. 학문하는 사람이라고.”

“저는 좀 시대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민우는 그렇게 말을 끊었다.

어느새 그의 두 눈에 확신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옛날이야 논문을 잘 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는 게 미덕이었겠지만, 요즘은 다르잖아요. 커뮤니티의 시대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정보를 공유하는 방법이 주목받는 시대란 말이죠.”

강예진은 대꾸하지 않고 민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제가 재환 형이나 민식이 형처럼 누나를 오래 봐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누나가 잘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뭔데?”

“방금 얘기한 거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일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쉽게 말하면 행사 진행이죠.”

“야!”

강예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민우는 오해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끝까지 좀 들으세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누나가 대학원에서 했던 일들이 있잖아요. 그 경험을 잘 살린다면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요즘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주목받고 있잖아요? 그거랑 비슷하게 문학 커뮤니케이터 같은 걸 해보면 어떨지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행사도 주최하고 지식도 나누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짬되면 무투브 방송도 해보고요.”

“결국 행사 진행하라는 이야기 아니야?”

“거 사람 참 삐딱하시네.”

“저도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선배 강의 평가 늘 최우수였잖아요? 재미있을 거 같은데.”

이수빈이 거들었다. 하지만 턱을 괸 강예진은 딱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한숨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필요하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테니까.”

“알았어. 그러니 재촉하지 마.”

“아니면 정치해볼래요? 제가 소개해 드릴 수 있는데.”

“미쳤니?”

“하하하하.”

* * *

다음 날, 민우는 연구실로 출근했다.

아직 보직을 받거나 강의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매일 연구실로 출근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굿모닝.”

민우가 웃으며 인사하자 레아는 그 미묘한 차이를 느꼈다.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좋은 일 있으셨어요?”

“좋은 일이요? 아, 뭐. 좋은 일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그런 일이 있긴 했죠.”

“무슨 일인데요?”

“어제 민재 학위논문 심사 통과했어요. 이제 석사과정 졸업하는 거죠.”

레아도 차민재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도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잘됐네요. 그럼 이제 박사과정에 입학하겠네요?”

“글쎄요. 어떻게 되려나.”

뜻밖에 확신이 없는 대답이라 레아가 선뜻 차를 출발시키지 못했다.

“다른 플랜이 있나 봐요?”

“아, 그런 건 아니고요. 명인대로 지원한다는 보장도 없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아직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어요.”

“그렇군요.”

“명인대로 오면 좋겠지만…… 가끔은 새로운 모험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끼는 자식일수록 멀리 여행을 떠나보내라는 말도 있잖아요?”

“민재 씨는 행복하겠어요. 매니저님 같은 분을 지도교수로 둬서.”

“그건 당사자 말 들어봐야 알죠.”

레아는 웃었다. 들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곧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잠시 후 연구실에 도착한 민우가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었다. 매번 차민재가 일찍 출근해 문을 열어두곤 하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어제 완전 달렸나 보네.’

민우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논문 심사 통과를 축하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가끔은 이렇게 마시고 즐기는 것도 장기전에서 중요하다 생각했다.

피식 웃은 민우는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열어 탁한 공기를 내보내고 커피물을 올렸다. 그사이 간단히 청소까지 했다.

그러는 사이 차민재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왔어?”

“아, 선생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뭘 죄송까지 하냐. 먼저 온 사람이 문 열면 되는데. 근데 어제 얼마나 달렸길래 얼굴이 그 모양이야?”

머리는 부스스하고 눈이 퀭해 있었다.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그게…… 잘 기억이 안 납니다.”

“하하하하. 속은 괜찮아?”

“참을 만해요.”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지 그랬어. 어차피 논문 수정이야 금방 끝나잖아? 인쇄까지도 시간 많이 남았고.”

“지적해주신 부분 말고도 조금 더 다듬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차민재가 조심스레 답했다. 민우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충고해 주었다.

“너무 뜯어고치는 것도 안 좋아. 흐름이 꼬일 수 있거든. 아쉬움이 남으면 다음 과제로 남겨 둬. 어차피 평생 논문 쓰면서 살아야 하는데 뭐가 그리 급하냐?”

“알겠습니다. 근데 선생님.”

“응?”

“논문 있잖아요. 몇 부 정도 인쇄하면 될까요? 선배님들은 기본 수량만 해도 될 거라고 하시는데…….”

은근히 고민되는 부분이다. 많이 인쇄했다가 남으면 낭패고, 적게 인쇄했다가 필요할 때 쓰지 못해도 낭패이기 때문이다.

인쇄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명인대 내부에 있는 인쇄소에서 제공하는 기본부수는 30부다.

민우가 웃으며 답했다.

“200부 정도는 해 둬. 그 정도도 부족할 것 같지만.”

“그렇게 많이요? 남으면 어쩌죠?”

“너 예전에 그랬잖아. 내 논문처럼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계속 인용되고 기억되는 논문 쓰겠다고. 그럼 200부로도 부족한 거 아냐? 찾는 사람 많을 텐데.”

“아…….”

차민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200부 하겠습니다. 그런데 남으면 어쩌죠?”

“학위논문이 냄비 받침대로 아주 그만이더라고.”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이야기하며, 민우는 차민재에게 따뜻한 커피가 담긴 컵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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