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83화 (483/500)

다시 대학으로 (4)

“그런데 좀 어색하네요.”

강예진에게 한 말이었다. 지금 이 공간에서 민우가 존대를 할 만한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뭐가?”

“행사 준비는 역시 선배잖습니까. 진행자석이 아니라 심사위원석에 앉아계신 게 좀 낯설어서 말이죠.”

논문 심사는 물론 학과 대소사를 책임지고 진행하던 옛 추억을 떠올린 한마디였다.

당연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뒤에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강예진이 고개를 홱 돌렸다. 논문 심사를 참관하기 위해 모여든 석사과정생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다들 얼음이 되었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졸업한 지 한참인데.”

강예진이 무섭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민우는 이미 그런 공격에 면역이었다.

“그래도 선배가 준비해야 행사가 잘 돌아갔잖아요. 다른 선생님들도 선배가 졸업한 걸 많이 아쉬워하세요. 특히 민 선생님이 종종 그러시죠.”

“야. 이젠 좀 나도 숨 좀 쉬고 살자. 노예 생활 20년 했으면 이제 면천해 줘야지. 꿈에 나올까 무섭네.”

“하하하하.”

사실 강예진이 자유의 몸이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최근까지 ‘현대서사학회’를 조직하여 운영했기 때문이었다.

학회 설립인에 이재환과 최민식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중 가장 후배인 본인이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곤 했었다.

지금은 그 자리를 차민재가 이어받았기 때문에 다소 여유가 생긴 편이다. 민우와 휴머니티에서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고 말이다.

그때 앞문이 열리고 오늘 심사의 주인공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점잖게 인사한 학생이 자리에 앉았다.

심사받는 학생이 앞자리에 혼자 앉고, 심사위원들이 맞은편에 나란히 앉는 형식으로 테이블이 준비되었다. 마치 청문회에 선 기분일 것이다.

동시에 석사과정생들이 모여 있는 뒷좌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야. 엄청 쫄리겠는데?”

“나였으면 오기 전에 묏자리 알아봤을 거 같아. 떨려서 말도 안 나올 거 같지 않냐?”

“강예진 선생님은 그렇다 쳐도 나머지 두 심사위원이 박민우 선생님하고 이수빈 선생님이라니…….”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네.”

“박민우 선생님이야 조곤조곤 잘 말씀해주셔서 크게 무섭진 않은데, 이수빈 선생님 엄청 무섭잖아. 평론가라 몰아붙이는 것도 장난 없고.”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평가하면 안 되는 거라니까. 겉만 보면 완전 천사신데.”

석사과정생들의 시선은 오늘의 주인공을 향해 있었다.

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논문 심사를 참관하기 위해 들어온 석사과정생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 논문 심사를 받게 될 주인공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한편으로는 걱정하기도 했다. 가까운 미래의 자신이 모습이 될 테니까.

젊고 뛰어난 교수들의 피드백은 정말 아프다.

그 누구보다도 최신 이론에 가장 근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박민우가 누구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떼놓고 본다고 해도 그는 이미 세계적인 석학이었다. 그가 던진 한마디 한마디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선배라면 괜찮지 않을까? 당돌하잖아.”

“하긴, 박민우 선생님 밑에서 오래도록 배웠다니까. 학교를 두 번이나 옮겼다면서?”

“학부 때부터 괴짜로 유명했다던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바로 오늘 석사논문 심사의 주인공은 차민재였다. 이제 그도 4학기를 마치고 석사학위를 앞둔 것이다.

하지만 석사과정생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차민재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발표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석사학위를 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민재는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된다면 무엇을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만 걱정하고 있었다.

석사과정생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차민재는 더욱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그럼 슬슬 시작할까요? 차민재 선생. 준비는 잘했습니까?”

민우의 한마디에 강예진은 또 다른 변화를 느꼈다. 심사 대상자에게 선생이라며 존칭을 쓰는 것을 말이다.

차민재가 답했다.

“지난 1차 심사에서 지적하셨던 부분을 보완해서 다시 써왔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부분은 있겠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했다는 게 얼굴에 쓰여 있네요.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건강이 우선입니다. 괜히 그러다 쓰러져서 저처럼 이불킥하지 마시고.”

“하하하하.”

민우의 한마디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민우는 예전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던 일화를 이렇게 적절히 활용하곤 했다.

학생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고향집도 아니고 이렇게 대학원에서 건강을 염려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연구사 검토와 연구방법론 부분은 크게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론에서 수정 보완된 부분만 따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시작하죠.”

민우가 허가했고, 차민재가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차민재의 논문은 일전에 과제로 써서 제출했던 논문을 좀 더 확장시킨 것이었다.

테마는 웹소설이었다. 한국 웹소설의 역사를 조망하고 그 특성을 분석한 방대한 논문이다.

석사논문 페이지수는 보통 단행본 절반에 불과하지만, 차민재의 석사논문은 이미 박사논문 수준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할 말도 많고 분석한 자료도 많다는 이야기였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국문학계에서 학위논문에 그림 같은 이미지 자료가 들어가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차민재는 젊은 학자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이미지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보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약 1시간가량 쉼 없이 발표한 차민재가 결론을 맺었다.

“결국, 한국 웹소설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성립된 장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 1900년대 초에 유행한 신문연재소설과 밀레니엄 전후의 PC통신이라는 기술적 배경이 접목되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한 우리 문학의 또 다른 양식이라는 것.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웹소설이라는 장르를 분명히 규정하고, 또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문학의 양식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에 의의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상입니다.”

발표가 끝났지만, 심사위원들은 차민재가 제출한 자료를 좀 더 검토했다.

페이지 넘기는 소리만 들려온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이 엄습했다.

가장 먼저 운을 뗀 것은 강예진이었다.

“문장이 여전히 개판인데?”

날 선 비판이 시작됐다. 강예진은 논문의 여러 부분을 지목하며 문제점을 언급했다.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박민우 선생 석사논문 읽지 않았나요? 제자라면 못해도 그걸 참고해서 좋은 문장을 써야지. 내용만 좋다면 무슨 소용이죠? 담는 그릇도 아름답지 않으면 작품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차민재는 강예진이 지적한 부분을 펜으로 모두 표시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이 문장력이었다.

사실 평범한 대학원생에 비한다면 문장을 잘 쓰는 편이었지만, 문제는 심사위원들의 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에 있었다.

그 부분에서 민우는 차민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금 강예진이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모범이 되는 기준을 자신으로 설정하곤 하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넘어야 하는 벽이다.

민우가 서지훈이라는 강철의 벽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처럼.

“저는 좀 다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이번엔 민우가 나섰다.

“방금 차민재 선생은 결론에서 연구의 의의를 짚어 줬어요. 이런 연구를 통해 앞으로 등장할 문학의 새로운 양식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하셨죠. 맞죠?”

“맞습니다.”

“웹소설은 정말 혁신적인 변혁으로 나타난 문학의 양식입니다. 지금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일부가 되었고요. 재미있는 것은 웹소설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지 이제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후, 혹은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어떤 새로운 문학 양식을 접할 수 있을까요?”

매우 고차원적인 질문이었다.

보통 논문 심사는 논문에 쓰인 내용 안에서만 질문이 나온다. 하지만 민우는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묻고 있다.

직감적으로 차민재는 이 질문이 논문 심사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우의 질문은 자신의 앞날을 위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약식이나마 박사과정 입학 면접과도 다를 게 없었다.

“제가 감히 앞으로의 문학이 어떻다고 말하는 게 조심스럽네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누구도 웹소설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나올 거라는 걸 예측한 사람이 없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차민재가 말했다.

“현재의 문화 흐름을 보았을 때, 영상 매체가 대세가 될 것이란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는 없습니다. 텍스트 기반에서 이미지나 동영상으로 옮겨가고 있는 건데요. 글로벌시장 진출만 놓고 봤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웹콘텐츠 중 영상이나 웹툰이 차지하는 비중이 웹소설보다 훨씬 높습니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영상 매체가 지니는 한계가 조금 명확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어떤 한계입니까?”

“제작 속도입니다. 웹툰이나 기타 영상물은 웹소설이 제작되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웹툰이 보통 일주일에 한 편 연재되는 것과는 달리, 웹소설은 보통 일주일에 다섯 편 정도는 업로드가 되니까요. 내용의 압축성만 따져도 텍스트 쪽이 훨씬 유리합니다.”

이 부분은 이미 차민재의 논문 속에서 다뤄진 내용이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은 이어질 차민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따라서 웹소설 등의 텍스트 기반 콘텐츠는 쇠퇴기를 맞이하는 것보단 다른 양식으로의 변모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다 편하고 빠르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할 겁니다. 예전에 인터넷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좀 더 적극적으로 계층 방언들이 사용될 수도 있고, 좀 더 진보된 디바이스에 특화된 새로운 양식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 의견대로 새로운 양식이 나온다면, 오늘의 이 연구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민우가 은근히 차민재의 편을 들자 강예진이 매섭게 민우를 쏘아보았다.

“그럼 지도교수님도 한 말씀 하셔야죠?”

민우가 바톤을 이수빈에게 넘겼다.

민우가 올해 휴직한 탓에 학위논문 지도교수는 이수빈이 맡고 있다. 그녀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앞에서 두 선생님들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문장이나 단락 구성이 보완되어야 하는 것도 맞고, 앞으로의 전망을 좀 더 추가하는 방향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문학을 이야기할 때 늘 내용과 형식이라는 개념을 쓰잖아요. 논문 인쇄 전까지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게 보완하길 바랍니다.”

‘논문 인쇄’라는 표현이 나왔다.

다시 말해 지금 발표한 논문이 최종심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차민재는 고개를 숙였다.

“철저히 수정해서 부끄럽지 않은 논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최종 수정본은 이수빈 선생께서 봐주시기로 하고, 심사는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민우가 심사 종료를 선언했고, 몇몇 대학원생들이 앞으로 나가 축하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차민재는 그리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과제를 하나 끝낸 것 같은 그런 가뿐한 표정일 뿐이다.

민우는 그 이유를 짐작했다.

방금 전, 심사평에서 제자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박사논문으로 어떤 걸 들고 올지 벌써 기대되는데?’

민우가 자리를 정리하고 세미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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