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대학으로 (3)
“준비는 아직 안 돼 있습니다.”
민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시기상으로도 바로 총장 선거에 나가는 것은 부담이 컸다. 만약 민우가 계속 명인대에서 근무했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민우의 말은 서지훈 총장이나 설예라 교수의 예상에서 벗어난 한마디였다.
“하지만 해보고 싶습니다. 완벽하게 준비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언제 시작하든 분명 시행착오가 있을 겁니다. 하면서 대응해야죠.”
“오. 캠프에 다녀오더니 상당히 진취적인 사람이 됐는데?”
“그러게요. 뭔가 더 예리해진 느낌이라고 할까?”
두 선생이 저마다 한마디씩 평했다. 민우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좀 더 총장직에 계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제가 총장 선거에 나가는 게 자신 없어서는 아니고요.”
“아니면 뭔데?”
“명인대에 아직 선생님의 색깔이 덜 입혀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임기 시작하신 지 이제 1년 반쯤 지났잖아요? 앞으로 몇 년 더 남았는데, 우리 대학 구성원들이 그 경험을 놓치게 되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씨익 웃은 서지훈 교수가 팔짱을 꼈다.
“그 시간을 네가 대신하게 되면 오히려 구성원들이 더 좋은 경험을 하게 되는 거 아닌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죠. 막상 했는데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는 거고요. 솔직히 사람들은 제가 새로운 정책을 주도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선생님들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탁상공론으로 끝났을 겁니다.”
민우의 말은 담백했다.
오히려 그래서 두 선생은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민우는 겸양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고맙구나.”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럼에도 해보고 싶다는 건 다른 뜻이 있는 거겠지?”
서지훈 총장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민우는 가벼이 응수했다.
“한편으로는 기대되거든요. 새 정부가 들어서고, 그곳에서 권력을 잡으신 선생님이 정계와 학계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말이죠.”
“하하하. 뒷짐 지고 칼춤을 구경하겠다는 말이냐?”
“구경이 아니라 감상이죠. 저도 보고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우가 서지훈 총장의 뒤를 잇는 것은 단순히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명인대도 지난 수십 년간 누적된 비리들이 산적해 있다. 서지훈 총장이 취임한 이후 그 비리들을 척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 모든 것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좋은 말만 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칼을 빼 들고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민우는 그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라면야 총장 직무는 충분히 수행할 수 있겠군.”
“물론 이것도 제가 선거에서 당선되고 이사회가 승인해줘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 거겠지만요.”
“걱정할 거 없다. 너는 이미 명인대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어.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거다. 오히려 이사장님은 기대하는 눈치던데? 최연소 총장이 탄생할 거라고.”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복직 처리는 바로 하마. 내년 1학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겠어. 아마 내가 사퇴하고 나면 부총장이 총장 대리로 올라올 거다. 3개월 정도 시간이 있을 거야. 준비 철저히 해라.”
“알겠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끝났다. 세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 * *
“복직 축하드립니다.”
“축하해요!”
“헉.”
연구실 문을 연 민우는 깜짝 놀랐다. 제자와 동료들이 연구실로 몰려와 꽃다발을 내밀기 시작했다. 작은 선물도 함께였다.
그 선두에는 이다혜가 서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이렇게 많이 모여 있을 줄은 몰랐지. 다들 언제 모인 거야?”
이다혜뿐만이 아니라 학부 제자는 물론, 대학원 제자들까지 모여 있었다. 어림잡아도 스무 명은 넘어 보였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 정보를 얻었죠.”
“누구?”
“누구긴요. 뻔하지.”
민우는 구석에 숨어있던 차민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민우는 이해했다. 이다혜를 막긴 힘들었을 거다.
이다혜는 최근 영미권에서 주목받고 있는 신예 번역가다. 대학에서 만난 제자는 아니지만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번역일을 배웠다.
그리고 ‘박민우 번역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지음사와 작업을 시작했고, 최근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후보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떠오르는 해가 바로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복귀한 소감이 어떠세요? 1년 남짓한 시간이면, 길다면 긴 시간인데요.”
“꿈에서 깨어난 느낌이지.”
이다혜는 민우의 아득한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아주 좋은 꿈을 꾸셨나 보네요.”
“백수가 얼마나 행복한지 이제 깨달았어.”
“하하하하.”
제자들이 재밌다며 웃었다. 민우는 제자들이 사 온 케이크를 잘라 나눠 먹었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니 정말 즐거웠다.
역시 본인은 대학 체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한바탕 수다를 떤 제자들이 모두 돌아갔다.
하지만 손님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민우가 외국에서 데려온 학자들이 동시에 찾아왔다.
타치카와 교수와 세드릭, 그리고 미셸, 셀린느였다.
언제 봐도 든든한 라인업이다.
그중 타치카와 교수가 대표로 나와 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박 선생. 이렇게 다시 만나서 기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제 엄청 바빠질 겁니다. 꽉 붙들고 따라오셔야 합니다.」
「놀이공원은 좋아하진 않지만 그 말씀은 좀 기대되는데요?」
타치카와 교수는 이제 명인대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이제는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이번에 민우는 프랑스에서 온 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에 약속했던 대로 여러분들께서 절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일에 착수할 것 같아서요.」
「드디어 마음을 굳힌 겐가?」
「예. 저는 이번 총장 선거에 나갈 겁니다.」
서지훈 총장은 이미 지난주에 이사회에 사의를 표했다. 그의 행보가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사직서 처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어 대학본부에서는 차기 총장 후보 등록에 대한 공고를 올렸다. 마치 민우가 대학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래서 서지훈 총장이 사퇴하고 민우가 그 자리를 이을 거라는 소문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때문에 프랑스에서 온 세 명의 학자들은 민우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먼저 애도를 표하고 싶네요. 민우 씨를 상대하게 될 후보에게 말이죠. 아무튼 우리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고마워요. 미셸 씨.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한바탕 손님을 치르고 난 민우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뉴스를 확인했다.
마침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언론 브리핑을 생중계하는 페이지를 발견하고는 마우스를 클릭했다.
민우는 최종심사를 얼마 남기지 않은 차민재를 위해 이어폰을 꼈다.
그때 모니터 화면에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서지훈이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나름 저 자리도 잘 어울리시는데?’
대변인 시절 민우도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대학 강단보다 카메라 앞이 더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
그때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야 헤아릴 수 있었다.
― 제가 부름을 받은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입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 저는 그 일을 처리함에 있어 예외를 두지 않고 공정히 임할 것을 국민 여러분들께 약속드립니다.
미소를 지은 민우는 조용히 손뼉을 쳤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은 어렵다.
개인이 저지른 잘못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회피하거나 핑계를 대며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하물며 그것이 집단이면 더욱 심하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서지훈은 교육부 수장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이해관계에 얽혀 방해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저력을 믿었다.
‘선생님이라면 분명히 해내실 거야. 나보다 더 멋있고 통쾌하게.’
그때 서지훈이 카메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민우의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민우를 향해서.
* * *
며칠 후, 명인대 국문과 세미나실에서 석사과정 논문 최종심사가 열렸다.
석사논문 심사는 교내 위원 3인이 위촉된다. 초빙교수 이상 되는 교원이 심사위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교내 위원 3인, 교외 위원 2인으로 진행되는 박사논문 심사에 비하면 연습 게임이라고 할 정도로 부담이 적다.
하지만 오늘 논문 심사에 참여한 교수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결코 부담이 적다는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다.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강예진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오늘 행사 준비를 맡은 대학원생들이 바짝 긴장했다.
강예진은 학석박 3종 세트를 모두 명인대에서 마친 성골 자대생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모든 일화의 결론은 하나였다.
실수하면 죽는다.
“다른 선생들은?”
“아직 안 오셨습니다.”
강예진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에는 생수와 간식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강예진은 그것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요즘은 이렇게 다 맞춰서 준비하니? 물 같은 거.”
“아, 예. 선생님. 그렇게 한 지 좀 됐습니다. 다른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냐. 됐어. 그냥 물어봤어.”
“커피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괜찮다니까?”
“아, 넵!”
박사과정 시절 수많은 학과 행사를 준비했던 그녀인지라 이런 변화가 반갑게 느껴졌다.
교수들의 취향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음료와 간식을 준비하는 게 얼마나 헛수고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녀석이 온 뒤로 참 많이 변했다니까.’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자대생도 아닌데 명인대를 더욱 명인대답게 만든 사람이 바로 민우였다.
어리바리하기만 했던 후배였는데, 어느새 훌쩍 커서 이렇게 함께 논문을 심사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작년까지는 강예진이 논문 심사에 들어올 수 없었다.
올해 들어서야 초빙교수로 임용되었기 때문이다.
민영환 교수의 수제자 중 아직 전임 교수가 되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 강예진이었다.
초빙교수는 비전임교수이긴 하지만 민우가 총장직을 수행하게 되면 정교수 자리가 하나 비게 되니 벌써부터 차기 교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명인대의 터줏대감인 민영환 교수도 이제 정년퇴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
민영환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오래도록 고생한 강예진을 후임으로 앉히고 싶어 했다.
즉, 어느 모로 보나 강예진이 명인대 국문과 정교수가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민우와 이수빈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교수들이 빠져가지고. 선배가 비전임이라고 이렇게 무시하는 거야? 먼저 기다리게 하고 말이야.”
“아이고.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나름 서둘렀는데.”
두 사람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자리를 차지했다. 강예진이 먼저 도착했을 뿐이지 늦진 않았다.
하지만 행사를 준비하던 대학원생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하늘 같은 정교수를 휘어잡는 비전임교수라니.
심사위원 3인이 드디어 한자리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