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대학으로 (2)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난 민우는 가족들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식당으로 향한 그는 먼저 냉장고에서 싱싱한 채소와 고기를 꺼냈다.
자취생 시절 요리를 줄곧 해 먹곤 했는데, 요즘 완전히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 소소한 일상을 보내다 보내 재미있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도마를 꺼내 채소를 올려놓고 칼을 움켜쥐었다.
탁탁탁탁탁탁!
치익! 치이이익!
프라이팬 위에서 채소가 맛있게 볶아졌다.
한편으로는 가족들이 든든히 아침을 먹을 수 있게 차돌 된장찌개를 끓였다. 곧 구수한 냄새가 솔솔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가족들이 식탁에 모였다.
잠에서 덜 깬 이수빈에 비해 딸 윤아는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숟가락을 쥐고 밥을 맛있게 먹었다.
“어제 철야 했어?”
“아뇨. 요즘 이상하게 잠이 많아졌네. 빨리 피곤해지기도 하고.”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 봐. 조심할 나이잖아.”
“나 아직 서른셋이거든?”
발끈하는 모습도 민우에겐 귀엽게 보였다.
먼저 출근한 것은 이수빈이었다. 그녀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와 윤아가 유치원에서 사용할 물건들을 챙겨주었다. 그리고 딸과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이제 내년이면 윤아는 초등학생이 된다.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간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편으로는 사춘기가 언제 올까 걱정되기도 했다. 이 순간만큼은 민우도 딸을 가진 평범한 아버지가 되었다.
“아빠.”
“응?”
“소윤 언니는 어디로 여행 갔어?”
어제가 이소윤의 결혼식이었다. 그에 대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었는데, 윤아는 신혼여행이라는 개념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보고 느끼는 게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는 민우였다.
“안 갔어. 언니는 바빠서 나중에 간대.”
“왜?”
“의사들은 바쁘니까.”
인턴 생활을 하며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혼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신혼여행을 미뤘기 때문이다. 인턴을 마치고 여유가 될 때 다녀오겠다고 했다.
민우는 윤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윤아가 돌연 활짝 웃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결론이 나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민우는 그냥 웃어넘겼다.
“이따 저녁에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빠표 돈가스!”
“오케이! 맛있게 해 놓을게. 잘 다녀와.”
“웅!”
민우는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윤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예전에는 민우가 돌아갈 때까지 손을 같이 흔들어 주곤 했는데, 요즘은 부쩍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몰두해서 금방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 어머니도 이런 기분이셨을까?’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궁금한 게 많이 남았다.
그 길로 민우는 명인대로 향했다.
* * *
서지훈 총장과 설예라 교수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조금 남아서 민우는 세드릭의 연구실에 들렀다. 오랜만에 안부를 물을 겸해서였다.
마침 세드릭은 연구실 안에 있었다.
다른 손님들도 함께였다. 바로 소르본에서 온 동료들인 미셸과 셀린느였다.
「마침 다들 계셨네요.」
「민우 씨!」
다들 활짝 웃으며 민우를 맞았다. 민우는 운이 좋았다. 세드릭이 직접 로스팅한 격이 다른 커피를 마실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내년에나 복직한다던 사람이.」
미셸이 물었고, 커피를 음미하던 민우가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약속이 있어서요. 총장님하고 교무처장님과 점심 식사하기로 했어요.」
「역시 명인대의 실세는 다르군요!」
「하하하. 아기는 잘 크고 있죠?」
「덕분에요.」
미셸도 얼마 전 아버지가 되었다. 건너 듣기론 그의 와이프가 한국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음식도 잘 맞고 말이다.
「셀린느 씨는 얼마 전에 논문 발표하셨죠?」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놀고 있는 것 같아도 관련 논문은 다 챙겨보고 있습니다. 셀린느 씨 이름으로 된 논문이 학회지에 실려있는 거 봤어요.」
「어땠나요?」
도도한 도시 여자의 이미지를 가진 셀린느였지만, 지금 질문은 그녀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민우가 시간을 끌자 초조해졌다.
「음, 아주 좋았어요. 솔직히 프랑스 사람이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한국어 많이 는 것 같네요.」
「다행이네요.」
「협동과정 쪽은 어때요?」
셀린느는 비교문학 협동과정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공을 살려서 문학 작품에 나타난 철학적 배경을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순조로워요. 다른 교수들도 많이 도와주고 있고요.」
「다행입니다.」
「때마침 잘 왔소. 안 그래도 여기 계신 신사 숙녀 여러분께 내 옛날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거든.」
갑작스러운 세드릭의 말에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옛날 이야기요?」
「내가 왜 학계를 떠나게 됐는지에 대해서.」
민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심 놀라긴 했다.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것이. 그의 과거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공개된 적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놀라는 것은 그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겉으로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다른 반응을 기대했던 세드릭이 다소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별로 기대하지 않는 표정인데?」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거든요.」
「역시, 당신이라면 그럴 줄 알았지.」
「민감한 이야기인 것 같아 묻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 궁금증을 풀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왜 그렇게 생각했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죠.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민우의 한마디에 미셸과 셀린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결국 세드릭은 큰 소리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맞는 말이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한 거지. 당신 말이 맞소.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군.」
「그런데 좀 뜻밖이네요. 세드릭 씨가 왜 학계에서 잠적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무수한 추측이 난무할 뿐이지.」
민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세드릭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나는 여러 수학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것에 집중했네. 정답을 찾았을 때의 그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너무 수학에 몰두한 나머지 다른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지. 현대 수학에서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인맥이라는 것을…….」
「역시 사람이 문제였던 거군요.」
「내 연구가 권력을 쥐고 있는 일부 교수들에게 이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너무 늦은 시점이었지. 연구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심했던 내 탓이었어.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네.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일쑤였지.」
세드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 그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권력자를 옹호하는 학계의 관습에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어. 소명할 기회는 있었지만, 내 손도 더러워지는 느낌이라 그냥 떠나야겠다 싶었지. 내가 대학을 떠나더라도 연구는 계속할 수 있는 거니까.」
민우는 짐작하던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드릭이 잠적한 이유는 위대한 수학자인 페렐만이 겪었던 일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대학원생들이 걱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간과 노력을 바쳐 만든 연구물들이 누군가의 손에 빼앗기는 그런 끔찍한 경험.
그런 일은 학교의 수준과는 관계가 없다. 모든 대학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교수들은 제자의 연구비를 착복한다. 혹은 자신의 실적을 채우기 위해 논문 대필을 맡긴다. 아이디어를 빼앗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내 연구가 다른 사람의 명예를 위해 희생되는 걸 참을 수 없었지. 어쩌다 뒤늦게 내 연구임이 밝혀졌지만, 그들은 사소한 실수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네. 여전히 그들은 뻔뻔히 대학에 나가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소. 슬프게도 말이지.」
「정말 악질이네요!」
「어떤 심정인지 이해됩니다. 어디에서든 자주 있는 일이죠.」
민우가 다독였고,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는 웃고 있었다.
「그 와중에 프로페서를 만났소. 그리고 이곳 한국에 오게 됐지. 그리고 깨닫게 됐소. 나는 그저 겁쟁이처럼 도망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여운이 길게 남는 한마디였다. 세드릭은 민우의 연구실에서 경험한 그 신비로운 감정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한편 셀린느는 민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세드릭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 학문적 무기력증에 빠졌을 때, 베데스다 분수에서 민우에게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겁쟁이처럼 도망칠 뿐이라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됐다.
새삼스레 민우의 한계는 어디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바깥일에도 좀 신경을 쓸 거요. 내가 겪은 일을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도록 말이오.」
「저도 협력하겠습니다. 성과 위주의 학계 풍토를 바꾸고, 연구 윤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말이죠.」
「민우 씨라면 믿을 수 있죠!」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미셸 씨도 도와요. 셀린느 씨도 도와줄 거죠?」
셀린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민우는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룸 형식으로 되어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실 모양이구나.’
그저 얼굴을 보려는 것이었으면 함께 교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었을 것이다. 서지훈 총장이 따로 식당을 잡는 일은 흔하지 않다.
예약된 룸을 찾아가니 서지훈 총장과 설예라 교수가 먼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늦었으니 네가 사라.”
“아직 약속 시간 10분 전인데요?”
“우리 중 제일 늦게 왔잖아?”
“…….”
서지훈이 씨익 웃었다. 전에 전화로 놀렸던 것을 앙갚음하려는 게 분명했다.
“휴직해서 월급도 못 받는 제자 삥 뜯으니 기분 좋으시겠어요.”
“무슨 삥을 뜯어? 외제차 끌고 다니는 놈이.”
“제 소원이 뭔지 아십니까?”
“뭔데?”
“선생님 차 바꿔드리는 거예요. 제발 폐차하고 새로 사세요. 20만 넘지 않았어요? 사고 날까 걱정됩니다.”
“굴러가기만 하면 되지 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지훈 총장을 고위 공직자로 만들어서 관용차를 타게 해야 한다는 것을.
옆에서 재미있다며 웃던 설예라 교수가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
“늦었지만 축하해. 복직도 축하하고 선거에서 이긴 것도 축하하고.”
“감사해요. 역시 선생님밖에 없네요. 이미 박사학위를 받아서 지도교수도 못 바꾸고, 아쉽습니다.”
“역시 선배보단 내가 낫지?”
“그럼요.”
“쯧, 잘들 논다.”
민우와 설예라 교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세 사람은 느긋하게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김강현 당선인 만나고 왔다.”
아직 김강현은 취임 전이었다. 그래서 당선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설치된 것 알지? 가능하면 빨리 와줬으면 한다고 하더구나.”
“김강현 당선인께선 약속을 지키셨으니까요. 이젠 선생님 차례죠. 그런데 인수위원회에 들어가려면 총장직에서 물러나셔야 하는 거죠?”
“그래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만 물러나는 게 깔끔하겠지. 교수들은 겸임하곤 하지만 총장은 좀 다르니까. 어차피 다음 코스가 예약되어 있기도 하고.”
서지훈 교수의 새로운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명인대를 물려받을 준비는 됐나?”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