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80화 (480/500)

다시 대학으로 (1)

자유인이 된 민우는 조용히 칩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거실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구름에 숨은 해가 모습을 드러내며 햇살을 쏟아냈다. 따뜻하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이 얼굴에 닿았다.

민우는 잠시 책에서 시선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래 쉰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었다. 어쩌면 대학원에 들어온 이후로 이렇게 편히 쉰 적은 한 번도 없을지도 모른다.

딸 윤아는 유치원에 갔고, 이수빈은 수업이 있어 출근했다. 넓은 집엔 민우뿐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들의 아침을 챙기고, 딸을 유치원에 보내고 들어와서 간단히 청소했다. 그리고 간단히 간식을 만들어 옆에 놓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치열하게 사는 동료들이 듣는다면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며 부러워할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푹 쉬는 게 좋겠어. 대학으로 돌아간다면 앞으로 언제 또 쉬게 될지 모르니까.’

계획대로 된다면 민우는 내년 초 총장 선거에 나가게 된다. 김강현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서지훈 총장을 내각으로 부를 테니까.

그렇다면 서지훈은 총장직에서 사임할 테고, 그 빈 자리를 누군가 메워야 한다.

민우는 기꺼이 그 자리에 오르기로 결심한 상황.

누가 상대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든 자신 있었다. 이번 대선을 치르며 좀 더 대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제대로 배웠다.

‘그나저나 아직도 시끄럽네. 내가 그렇게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지.’

민우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살폈다.

김강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캠프에서 활약한 사람들은 모두 요직 후보에 올랐다. 오로지 민우만이 그 명단에서 제외됐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민우가 토사구팽을 당한 거라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민우는 적극적으로 변론하지 않았다.

이미 언론과의 온라인 인터뷰에서 자신의 퇴직은 대학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말을 많이 해 봐야 좋아할 것은 호사가들뿐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민우와 김강현의 사이에 흠집을 내려 할 것이니까.

‘뭐,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겠지. 자리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신경 끄자.’

그때 놓으려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지훈 총장의 전화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을 떠올리며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네, 선생님.”

― 잘 놀고 있냐?

“하하하. 잘 놀고 있죠. 5성급 호텔 안 부럽습니다. 여유롭고 좋네요.”

― 그러다 평생 논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셔도 됩니다.”

핸드폰 너머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최근 명인대도 글로벌 사업을 전개하고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면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던 민우였지만 서지훈 총장을 놀릴 찬스는 지금뿐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대학도 경영해야 하고, 또 지음사에 보낼 원고 작업도 열심히 하시고 계시겠네요. 아! 새교육협의회 일도 있구나. 협회는 요즘 잘 돌아가나요?”

― 진섭이가 아주 잘 해주고 있지. 전임 사무장의 공백을 완전히 지울 정도로 말이야.

“그거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 얼굴 좀 비춰야지?

“좀만 더 놀고요.”

― 야.

“하하하. 농담입니다. 내일 제자 결혼식이 있는데 주례를 좀 서야 해서요. 내일모레쯤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시간 괜찮으세요?”

― 주례를 선다고? 네가?

“예. 그 우리 의대 다니던 이소윤 학생 있잖아요. 그 친구가 부탁해서 하게 됐어요.”

― 아직 마흔도 안 된 녀석이 주례를 서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도 아직 실감이 안 납니다. 그래도 당사자들이 부탁하는데 안 들어줄 수가 없더라고요. 아무튼 이상해요. 뭔가 아저씨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 아저씨 맞다.

“제가 아저씨면 선생님은 할아버지겠네요.”

― 휴, 괜히 전화했군. 내일모레 시간 괜찮으니 총장실로 와라. 설예라 선생하고 같이 점심이나 먹자.

“옙.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부터 집안이 부산스러웠다. 민우와 이수빈, 그리고 윤아까지 결혼식에 갈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엄마! 안 가?”

“조금만 기다려 줄래? 아직 준비가 안 끝났어.”

“빨리 가자! 언니 보고 싶은데.”

“잠깐 TV라도 보고 있어.”

윤아는 TV 대신 책을 집었다. 이제 윤아는 명인대 필독 도서 리스트에 있는 책을 읽을 만큼 천부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민우나 이수빈이 권유해서 읽는 것이 아니었다.

서재에 있는 책을 아무렇게나 꺼내 보더니 흥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늘 책을 손에 들고 있으니 따라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독서 수준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들과 비슷해졌다.

그때 단장을 마친 이수빈이 거실로 나왔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만약 흰색 계열의 옷을 입었더라면, 사람들은 오늘의 주인공이 이소윤이 아니라 이수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윤아야. 책 그만 보고 TV 좀 보면 안 돼?”

“TV 재미없는데?”

“아니면 무투브라도 좀 봐.”

“이따가 볼래.”

워낙 영상 매체를 잘 보지 않아서 오히려 이수빈은 걱정되었다.

또래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지 못할까 봐 말이다.

유년 시절은 공부를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또래와 잘 어울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세 살부터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고 하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아서 잘하겠지.”

어느새 준비를 마치고 다가온 민우가 이수빈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윤아는 책에 푹 빠져있어, 부모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이수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빠는 세상 편해서 좋겠어요. 나는 걱정돼서 죽을 거 같은데.”

“그 조급한 마음이 애 망치는 거야. 차분히 기다려 주자고. 우리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서.”

“알았어요.”

“윤아야. 가자!”

“가자아!”

윤아가 활짝 웃더니 책을 얌전히 내려놓고는 부모를 따라나섰다.

결혼식장은 명인대 근처에 있는 소규모 홀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민우 가족은 예식장으로 들어갔다. 부를 사람이 많이 없다더니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모여 있었다.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양지모가 민우와 이수빈을 알아보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교수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해요. 양 선생.”

두 사람이 악수했다. 옆에 있던 이수빈과 윤아도 축하한다고 말했다.

“지금 오신 거죠? 소윤이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주례하는 데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건 없지요? 처음이라서.”

“편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사회자 소개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세요.”

민우는 양지모를 따라가 오늘 예식의 사회를 맡은 그의 친구와 통성명을 했다. 그냥 정해진 순서에 무대로 나가 진행하면 된다고 설명을 들었다.

그사이 이수빈과 윤아는 신부대기실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선생님!”

이소윤이 환하게 웃었다. 가까이 다가간 이수빈이 그녀를 살짝 안았다.

“축하해. 기분은 좀 어때?”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엄청 떨려요. 선생님은 결혼할 때 어떠셨어요?”

“그렇게 긴장되진 않았는데? 오히려 좋았어. 박민우는 이제 내 꺼다 하면서. 혹시 전 남친이 올까 봐 긴장되는 건 아니고?”

“하하하하.”

이수빈의 친근한 농담에 이소윤의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 이제 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소윤이 제안했다.

“우리 사진 찍어요.”

“그럴까? 윤아야. 언니 옆에 앉아.”

“그런데 박 선생님은요?”

“아까 사회자분이랑 이야기하고 있던데.”

이소윤은 민우가 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때마침 민우가 신부대기실 앞에 도착했다. 이수빈이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이소윤은 민우 가족과 사진을 찍었다.

마치 가족사진처럼 잘 나왔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민우는 따로 움직였다. 앞쪽에 앉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사회자가 주례는 간단히 해도 된다고 해서 마음이 좀 편해졌다.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며칠 공을 들여 멋들어진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그냥 그때 생각나는 대로, 혹은 느끼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전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박 교수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바로 옆에 뜻밖의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명인대 의과대학장인 강유찬이었다.

민우가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학장님. 잘 지내셨죠?”

“저야 뭐 대학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지요. 하지만 박 교수님은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시더군요.”

민우가 대선 캠프에서 일했던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민우가 고개를 살짝 숙여 겸양을 표했다.

“이제 일 모두 마쳤으니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이미 복직계는 제출했고요. 내일 총장님 뵐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하하하! 잘됐습니다. 처장급 회의에서 박 교수님을 못 보니 얼마나 서운하던지. 명인대 개혁의 주인공이신데 마땅히 다시 돌아오셔야지요.”

“과찬이십니다. 저보다 다른 분들이 더 고생하셨죠.”

“어느 쪽이든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의대는 솔직히 달라진 게 많이 없어요. 교육과정이 따로 있기도 하고, 과 특성상 좀 폐쇄적이니까 말이죠. 하지만 다른 과들의 상황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캠퍼스가 더욱 활기차진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요?”

이제 강사법과 관련한 새로운 정책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적어도 명인대에서는 시간강사라고 해서 차별을 받거나 굶는 일은 없었다.

강유찬 학장의 칭찬은 듣기 좋았지만, 민우는 여전히 할 일이 남았다는 표정이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오더군요.”

그렇게 운을 뗀 강유찬 학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은밀히 민우에게 말했다.

“서지훈 총장이 물러나고 그 뒤를 박 교수님이 잇는다는 말이 들리던데.”

“그런 소문이 있습니까?”

“소문이 아니라도 눈치가 빠른 분들은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이미 김강현 당선인이 서지훈 총장을 낙점했으니 정계로 진출하는 건 시간문제일 테지요. 그렇다면 총장 후임이 필요한데, 그 자리를 이어받을 사람은 한 명뿐이니까.”

김강현은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교육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과정에서 서지훈 총장에 관한 이야기가 몇 번 나온 적 있다.

그 이야기는 역으로 일반 대중들의 입에서 먼저 나오기도 했다.

명인대 총장 후보자 토론회에서 보여주었던 저격 능력을 바탕으로 중임을 맡아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난 것이다.

“아무튼, 조만간 박 교수를 도와드려야 할 일이 생기겠군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잘 부탁드립니다.”

“크게 걱정할 필요 없을 겁니다. 우리 대학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박 교수님의 편이니까요. 김종필 학장도 그렇고, 정종환 학과장도 매번 박 교수님 이야기만 합니다. 이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예요. 하하하.”

예식이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신랑과 신부가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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