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대의 청개구리 (2)
민우의 생각이 깊어졌다.
‘사필귀정이라더니. 오래 버티진 못했구나.’
장소필 교수는 한일대 국어국문학과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각종 학회의 중임을 맡고 있기도 해서 파장이 생각보다 클 것 같았다.
거기에 국문과 학과장도 맡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권력의 승계 작업도 이루어질 거다.
민우가 물었다.
“후임 학과장은 누군데?”
“아직 말만 많아. 그중 가장 유력한 건 류시진 선생님이고.”
“어떤 분이야?”
“시 전공하셨고, 학부 때 수업 많이 들었었는데 괜찮은 분이야. 내가 만약 소설 전공이 아니라 시 전공이었다면 류시진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셨겠지.”
그렇다는 건 서강일과 류시진 교수와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지도교수에게 버림당한 서강일을 안쓰럽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한일대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리겠네.”
“그렇게 되겠지. 일단 류시진 선생님께 연락은 받은 상황이야. 다시 돌아와서 강의 좀 하라고 하시네.”
“정식 오퍼는 아니고?”
“감사 문제가 좀 해결되어야 오퍼를 받든지 하겠지. 당장 임용은 힘들 거야. 혼란한 상황을 수습해야 하니까. 그래도 나쁜 상황은 아니야. 장소필 그 인간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복권되는 상황이거든.”
비리 교수가 파면된 것은 좋은 일이다.
거기에 서강일이 다시 한일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고 있었다. 이 상황이라면, 학계 동료이자 친구로서 축하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우가 서강일의 어깨를 다독였다.
“축하한다. 이제야 드디어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네.”
그 말에 서강일은 민우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물었다.
“진심이냐?”
“그럼 진심이지 거짓말하겠어? 모교 교수가 되는 게 네 꿈이었잖아. 어떤 분이 한일대 국문과를 이끌어가실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단 나아질 거 아냐?”
“나는 네가 굉장히 아쉬워할 줄 알았는데.”
“어이쿠.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그래도 이 소식은 너나 우리 멤버들에게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
“안 좋을 건 또 뭔데?”
“내가 돌아가면 아무래도 휴머니티 학장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테니까. 지금 하는 일들도 올 스탑될 거고.”
“난 또 무슨 이야기라고.”
민우는 가벼이 웃었다. 반면 서강일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사건을 대하는 온도 차가 커서 이렇게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아니었다. 민우는 복잡한 일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휴머니티 일은 다 같이 모여서 해결해도 되잖아. 어차피 학장도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으니 문제없을 거고. 하지만 네가 한일대 교수가 되는 건 우리가 모인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지. 약간의 운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러면 답은 나온 거 아냐?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너는 참…….”
그래, 이게 박민우라는 사람이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서강일은 한숨을 내쉬곤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이제 마음을 정할 수 있겠어.”
“애들 소집해야겠구만. 후임 정하려면.”
“그럴 필요 없어.”
“왜?”
민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서강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지개를 한 번 쭉 켜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이 편해 보였다.
“너 만나기 전에 정한 게 있거든. 네가 만약 붙잡는다면 한일대로 가고, 쿨하게 보내주는 거면 휴머니티에 남겠다고.”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나 한일대의 청개구리잖아. 잊었어?”
“하하하하하.”
민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한일대 쪽은 어떻게 할 건데?”
“얼굴은 비추겠지만 오퍼가 와도 거절할 거야.”
“좀 아깝지 않냐?”
“지금도 충분히 즐거우니까 괜찮아.”
즐겁다는 말에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두 사람 사이의 말이 끊어졌다.
민우는 서강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편안해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적어도 서강일이 없는 말을 애써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을 매었는지 알겠더라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어.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데 어떻게든 기어오르려고 했던 그 순간이…….”
“그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맞아. 네 말대로 부끄러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부끄럽고 싶었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서강일은 민우와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첫 만남은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결선에서였다.
그때 강민희와 함께 최선을 다해 발표했지만, 결국 민우가 이끄는 팀 307호에게 보기 좋게 패하고 말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학회에서도 대결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그때도 보기 좋게 민우에게 밀리고 말았다. 이듬해 열린 두 번째 대결에서도 발표자와 토론자의 포지션을 바꿨지만 또다시 지고 말았다.
아직 학자로서 무르익지 않았던 당시의 서강일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르익은 지금은 그때를 조금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그때의 부끄러움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것. 열정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긍정적인 힘이었다는 것.
부끄럽고 싶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부끄럽고 싶다라…… 듣기 좋다. 나중에 내 강의 듣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한마디야.”
“하하하. 대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 인정받으니 기분 좋은데?”
“박민우 문학상에 도전할 자격이 충분해.”
“줘도 안 받아 인마.”
“상금 10억인데?”
“그럼 좀 생각이 달라지지!”
“하하하하하.”
이제 불혹을 앞둔 두 친구는 서로 눈치 볼 것 없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들의 깊어가는 우정처럼, 시간이 훌쩍 지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 * *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일.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친 민우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선거 캠프로 향했다. 이미 많은 당국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변인님.”
“분위기는 좀 어때요?”
“잠 못 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천혜원 후보가 이렇게 치고 올라올지는 몰랐잖습니까?”
진영수 보좌관의 말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 진영의 대선 후보인 천혜원은 판사 출신으로 3선 의원을 지낸 보수층의 대표주자였다.
이번 대선은 김강현 후보의 승리로 점쳐졌으나, 천혜원 후보가 선거 운동과 TV 토론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둬 지지율이 급등했다.
원래는 15퍼센트 이상 차이 나던 지지율이 지금은 3퍼센트 남짓 차이가 날 뿐이다.
오차율을 고려할 때 이 정도 차이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김강현 후보의 캠프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래도 잘될 겁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후보님도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걱정할 시간에 청와대 들어갈 준비나 하세요. 그게 나을 겁니다.”
민우의 과감한 발언에 진영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민우는 복도를 지나 김강현 후보가 머무는 방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후보님.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아아, 박 대변인. 이 상황에서 잘 잤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한숨도 못 잤습니다.”
김강현 후보의 얼굴엔 피로와 긴장이 가득해 보였다. 평생 정치에 투신한 그라고 해도 대선이 주는 부담은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좀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일부터 상당히 바쁘실 텐데요.”
“내일부터 바쁘다니요?”
“당선사례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당선사례? 하하하, 하하하하하!”
김강현 후보가 큰 소리로 웃었다. 민우는 마치 미래를 다녀온 사람처럼, 자신 있게 당선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박 대변인이 보시기에 내가 당선될 것 같습니까?”
“그럴 거라고 확신합니다.”
“근거는요?”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오늘 아침 투표할 때 기호 1번 칸에서 신비로운 푸른빛을 봤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 신비로운 힘은 민우만의 것이었으니까.
물론 그 푸른빛이 당선 여부를 알려주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길조(吉兆)임엔 분명했다.
지금까지 나타났던 푸른빛은 늘 옳은 길로 자신을 인도했으니까.
“후보님이 기획하신 모든 공약은 평범한 국민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전해졌다면, 분명 국민들은 후보님을 지지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당선되면 좋겠지만, 혹여라도 낙선했다고 서운해하지 맙시다. 대통령이나 대변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할 일은 많지 않습니까?”
민우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에서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 한마디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계속 캠프에 계십니까?”
“이따 점심에 잠시 나갔다 저녁 개표 전에 돌아올 예정입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새우며 결과를 지켜보고 싶군요.”
“그럼 전 캠프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연락주세요.”
“그럽시다.”
그리고 그날 오후 6시. 투표가 종료되었다. 이미 주요 공중파 방송사에서는 선거 특집을 편성해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 이번 대선 참 뜨거운데요. 김강현 후보, 천혜원 후보 이렇게 양강 구도가 확립된 이후 끝까지 밀고 당기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인데요. 출구 조사 결과가 준비됐습니다. 함께 보시죠.
모든 당국자들이 TV에 시선을 집중했다. 민우도 로비로 나와 한쪽에 서서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오늘의 주인공인 김강현 후보도 맨 앞줄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곧 카운트가 흘러가고, 결과가 송출되었다.
“우와아아아!”
“해냈습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박수가 쏟아졌다. 민우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김강현 후보가 47.5퍼센트로 천혜원 후보를 약 5퍼센트 차이로 앞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선거 방송에서는 김강현 후보의 캠프와 천혜원 후보의 캠프를 나란히 화면으로 송출했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곧 당국자들은 차분해졌다.
오차범위가 2.5퍼센트 정도인 걸 감안하더라도 출구 조사는 출구 조사일 뿐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선거 결과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초반 팽팽히 흘러가던 양쪽 표 차이가 자정을 기점으로 한쪽으로 점점 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올 무렵 결과가 확정되었다.
“김강현! 김강현! 김강현!”
새로운 대통령의 이름 세 글자를 연호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선거 캠프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격려하는 당국자들. 그리고 김강현 당선자에게 찾아가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중엔 민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결국 박 대변인 말대로 되었군요. 국민께서 제 뜻을 알아주셨나 봅니다.”
민우는 말없이 웃었다. 주변에서 이 장면을 카메라로 담아 송출했다. 이수빈이 생방송을 보고 있을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묻겠습니다.”
“예.”
“이제 정말 대학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바로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김강현이 희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민우가 자신의 곁에 남아 힘을 보태려는 걸까? 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그 오해를 바로잡았다.
“이미 2학기가 시작되어서요. 내년 1학기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몇 달 충분히 쉬고 말이죠.”
“하하하하. 잠깐 설레었군요.”
“대신 서지훈 총장님께는 제대로 전하겠습니다. 당선인께서 약속을 지켰다고 말이죠.”
“좋습니다. 아쉽지만 그걸로 만족해야지요.”
꾸벅 인사한 민우는 자리를 떠났다.
김강현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민우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