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78화 (478/500)

한일대의 청개구리 (1)

김강현 후보와 정연주를 보낸 민우는 바로 연구실로 향했다. 온 김에 차민재의 논문을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휴직계를 빨리 낸 탓에 논문 지도교수는 이수빈이 맡기로 했지만, 그래도 논문의 기초를 잡아준 것은 본인이라 간간이 봐주고 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인사와 환영을 받으며 민우는 연구실로 걸어갔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너무 바빠 잠시 잊고 있었던 이름이 디스플레이에 찍혀 있었다.

민우는 반가운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선생님! 지금 학교시죠?

“어. 그래. 지금 연구실 가는 길이야. 어떻게 알았어?”

― 뉴스에서 봤어요. 김강현 후보님하고 총장실에 계신 사진이 올라왔더라고요. 지금쯤 끝나셨을 것 같아서 전화해 봤어요.

“지금 막 끝났어. 타이밍 기가 막히네.”

― 다행이네요!

전화를 건 사람은 얼마 전 명인대 의대를 졸업한 이소윤이었다.

올해 초, 그녀는 의사 국시에 합격하여 이제는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명인대 부속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연락할 겨를이 많이 없었다.

민우도 한창 김강현 캠프에서 대변인으로 활동할 시기였으니까.

“요즘 많이 바쁘지? 나도 정신이 없어서 통 연락을 못 했네. 너 국시 합격하면 다 같이 술 한잔하기로 했었는데.”

― 천천히 하면 되죠 뭐. 저도 그렇지만 지모 오빠도 시간 내기가 좀 힘들어서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럼 술자리는 좀 미루는 걸로.”

― 지금 연구실로 가면 뵐 수 있을까요? 잠깐 뵙고 싶은데요.

“그래. 그쪽으로 와.”

어차피 차민재와 약속을 하고 온 건 아니라서 시간이 그렇게 촉박하진 않다. 민우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연구실로 향했다.

안에는 차민재가 책상에 앉아 논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연구실에서 철야를 했는지 턱에 수염이 가득하다. 살도 좀 많이 빠진 것 같아서, 민우는 들어오자마자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쉬엄쉬엄하라니까 왜 그렇게 무리를 해? 얼굴 꼴은 그게 또 뭐고?”

“아…… 그게요. 좀 중요한 부분에서 막혔거든요. 연구방법론 부분인데, 적당한 이론 찾기가 좀 힘들어서 밤 좀 샜어요.”

“너 지금 3학기잖아. 다음 학기도 있는데 뭘 그리 무리하냐?”

명인대 국문과 석사과정은 총 4학기다. 3학기 동안 학점을 이수하고, 나머지 1학기 동안 논문 작업에 착수한다.

보통 석사들은 3학기 무렵 논문 기초자료를 모으고 4학기에 집필하는데, 차민재는 작년부터 논문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마치 박사논문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석사논문인데 뭔가 의미 있는 논문을 쓰고 싶었어요. 선생님 논문처럼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계속 인용되고, 기억되는 그런 연구물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민우는 더는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민우가 발표한 석사논문은 최근에도 수십 차례 피인용될 정도로 잘 써진 논문이다.

일반적으로 석사논문은 인용되는 경우가 드물다. 석사논문보다 더욱 정교하게 쓰인 박사논문을 인용하는 것이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우의 석사과정 논문은 학술지는 물론이고 각종 학위논문에서도 인용될 정도로 공신력이 있었다.

‘너도 같은 꿈을 꾸고 있었구나.’

한때 자신도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철야를 한 적이 많았다.

만약 그런 노력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의 민우는 아마 없었을지도 모른다.

‘격려는 해주지 못할망정 방해해서는 안 되겠지?’

민우는 차민재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래도 면도는 하고 다녀라.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안 생기는 거야.”

“어차피 면도해도 안 생겨요.”

“똑똑한데?”

“오신 김에 논문 좀 보여드릴까요?”

“좋지.”

민우는 차민재에게 논문을 받아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읽다 보니 커피가 당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차민재가 한발 빨랐다.

“땡큐.”

“이거 뇌물이니까 잘 봐주세요.”

“걱정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요즘 대변인 노릇 하느라 칼날이 많이 무뎌졌거든.”

“…….”

차민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그때, 노크가 들렸다. 민우는 들어오라고 말했다.

이소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근무 중에 나온 것인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다. 민우는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어서 오십쇼. 이소윤 선생님.”

이제야 민우는 그녀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의사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곤 하니까.

그러자 이소윤이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끄러우니 선생님이라는 말은 빼주심 안 돼요?”

“그건 내 맘이지. 의사한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아직 의사라고 하기엔 좀…….”

“면허 있으면 의사지 뭐.”

민우는 잠시 논문을 내려놓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마주 앉아 보니 민우는 그녀에게서 발생한 작은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외모가 아니라 눈빛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순수한 정기가 맺혀 있었다.

민우는 그 미미한 차이를 느끼는 게 가능했다. 루카치의 유물의 힘을 모두 흡수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소윤은 다른 의대생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한창 바쁠 본과 4학년 때 인간다운 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민우의 강의를 청강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인간다운 것을 위하여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 의사가 됐다.

이제는 대학이 아니라 현장에서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 선 것이다.

“인턴 생활은 어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요. 거의 쉴 시간도 없고, 잘 시간은 더 없고요.”

“그런데 용케 나왔네?”

“지인 찬스 좀 썼어요.”

“누구?”

“지모 오빠요. 순환 근무 중인데 지금은 흉부외과에 있거든요. 오빠가 시간 빼줬어요.”

“그렇구나. 든든하겠다. 지모도 있고 강유찬 학장님도 있고.”

“그래도 선생님보단 덜하죠. 총장님도 계신데 이제는 김강현 후보님도 계시잖아요?”

민우는 맞는 말이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맥으로 따지면 자신을 능가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득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소윤이 단지 안부나 물으러 온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양지모에게 따로 부탁해서 시간을 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때 이소윤이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익숙한 형태의 봉투였다. 청첩장이다.

봉투를 뜯어보니 심플하게 인쇄된 내용물이 나왔다.

상대는 당연히 양지모였다. 짧은 인사말과 함께 두 사람이 이번 여름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딱히 듣지 못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은 연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생각보다 일찍 결혼하네? 인턴은 마치고 할 줄 알았는데.”

“어차피 그때 돼서도 정신없는 건 마찬가지라서 좀 서두르기로 했어요. 살림도 합치면 좀 더 편하고 하니까요.”

“서로 의지하면서 생활하는 것도 좋겠네. 어차피 같은 병원에서 근무할 거니까.”

“맞아요. 괜히 관계가 애매하면 눈치만 보여서 결심했어요. 식장은 명인대 근처에 잡았어요. 좀 작은 곳이에요. 많이 초대는 못 할 것 같아서요.”

“오케이. 바쁘더라도 꼭 가마.”

결혼식 날짜를 보니 대선이 끝난 직후다. 시기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대선 전이었다면 참석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소윤이나 양지모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민우도 그들을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결혼식을 꼭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선생님께서 주례를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그렇고 지모 오빠도 꼭 선생님이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해서요.”

“……내가?”

민우는 깜짝 놀랐다.

주례라는 말이 굉장히 어색하게 들렸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교수인데 주례를 맡을 일이 없었으니까.

민우가 물었다.

“어, 좀 갑작스러운데. 주례를 서달라고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학장님도 생각해 봤고 다른 교수님들도 생각해 봤는데…… 역시 선생님만 한 분이 안 계셨어요. 선생님이 안 계셨더라면 오빠랑 이렇게 이어지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그래도, 좀 더 신중히 생각해 보지 그래?”

“신중히 생각해 보고 부탁드리는 거예요.”

이소윤의 확신에 찬 한마디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할게. 대신 너무 기대는 하지 마. 다른 건 몰라도 주례는 처음이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행복한 결혼식이 될 거 같아요. 나중에 오빠랑 시간 맞춰서 같이 인사드리러 올게요.”

“그래. 어서 들어가 봐. 바쁠 텐데.”

이소윤이 꾸벅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갔다.

민우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청첩장을 열어보았다. 제자가 벌써 결혼을 하겠다고 이렇게 청첩장을 들고 찾아오다니. 제자의 주례를 서는 건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현실이 되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제 슬슬 나이를 먹기 시작한 건가?’

그래도 즐거웠다.

앞으로도 경험할 새로운 일들이 많아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민우는 잠시 내려둔 차민재의 석사논문을 다시 손에 쥐었다.

* * *

일정을 모두 마친 민우는 캠프 사무실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레아의 편안한 운전이 민우에게 꿀 같은 휴식을 선사했다.

그때 서강일에게 톡이 왔다.

잠시 통화 괜찮냐는 말이었다. 민우는 즉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어. 무슨 일이야?”

― 일 끝났냐? 오늘 학교에 왔다는 소문이 있던데.

“갔었지. 연구실에 잠깐 들렀다가 바로 캠프로 왔어.”

― 그럼 얼굴 좀 비추고 가지. 겁나 비싸게 구네.

“하하하. 미안.”

― 집에 가는 길?

“응. 지금 가고 있다.”

― 그럼 잠깐 얼굴 좀 보자. 내가 네 아파트 앞으로 갈 테니까.

민우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서강일이 집 앞까지 찾아오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일인데?”

―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고 얼굴 보고 이야기합시다.

“알았다. 그럼 집으로 올라와. 차라도 한잔하게.”

― 괜히 이수빈 선생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으니 너만 밖으로 나와.

민우는 알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서강일은 이수빈 걱정을 했지만, 아마 자신에게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나쁜 일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잠시 후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마침 서강일이 아파트 입구에서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는 그의 차에 올라탔다.

“무슨 일인데 대뜸 찾아오고 그래? 무섭게.”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현실이 슬프네.”

“뭐 안 좋은 일이냐?”

서강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한일대 전체 감사받은 건 알고 있지?”

“알지. 요즘 그것 때문에 엄청 시끄럽잖아.”

“장소필 그 인간도 걸려 들어간 것 같아. 친인척 학점 비리에 입시 비리 건으로.”

민우가 깜짝 놀랐다.

장소필 교수는 한일대 국문과 교수로, 서강일의 석박사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년에 서강일을 잔인하게 내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감사 결과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보직해임 단계인데, 곧 파면될 거라는 이야기가 많아. 민희가 아직 한일대 출강하고 있거든. 그쪽에서 소식 듣고 있는 모양이야.”

“파면이라면 중징계잖아?”

“두 번 다시 대학으로 돌아오지 못하겠지.”

아이러니하지만 서강일이 휴머니티에서 활약하게 된 것은 장소필 교수의 역할이 컸다. 그가 서강일을 대학에서 내친 바람에 다른 뜻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파면된다면 어떻게 될까?

서강일이 다시 한일대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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