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77화 (477/500)

작은 보답 (2)

다음 날, 김강현 후보는 약속대로 ‘새교육협의회’ 임원들과 만나기 위해 명인대로 출발했다.

‘새교육협의회’ 행정 업무는 명인대에서 처리한다. 여러 상징적인 이유 때문에 구성원들은 명인대에 사무국을 존속시키는 것에 합의했다.

덕분에 신임 사무장인 한진섭은 죽을상이었다.

“아, 진짜 개 떨려 죽겠네. 애 나올 때도 이렇게 안 떨렸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곁에 있던 민우가 재밌다며 웃었다.

“뭐 그리 긴장을 해? 어울리지 않게.”

“유력한 대통령 후보잖아. 이렇게 만난다는 게 실감이 안 돼서 말이야. 정치인 만난 적 한 번도 없어.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도 모르겠고.”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뭐.”

“하, 졸라 무책임하네.”

“말은 가려서 합시다. 한 사무장.”

약간은 반강제로 사무장 일을 맡게 된 한진섭이었다. 아무리 강단에 선 경력이 많다고 해도, 김강현 후보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왜 오신 건데? 어제 단일화 확정 발표 후에 첫 일정 아닌가?”

“그만큼 교육 개혁에 관심이 많다는 거지. 언론에서도 무게 있게 다룰 거야. 그러니 실수하면 안 된다.”

“아니, 야. 부담감을 더 주면 어떡해? 위로는 못 해줄망정.”

“지금은 네가 사무장이니까.”

“어휴, 진짜 한 대 때리고 싶네.”

민우는 엄살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친하기 때문에 한진섭을 후임으로 앉힌 게 아니었다.

그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살다 보니 느낄 수 있었다. 유능한 사람들은 정말 많지만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한진섭은 사무장이라는 직위를 물려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아직이냐?”

“예. 아직 도착 전입니다.”

서지훈 총장과 정연주 이사장이 함께 나타났다. 이제 슬슬 김강현 후보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때맞춰 검은 세단이 건물 쪽으로 진입했다.

민우는 그것이 김강현 후보가 타고 다니던 차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후보님 오십니다.”

“가자.”

새교육협의회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가 차가 서기만을 기다렸다. 곧 뒷좌석이 열리고 김강현 후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찰칵! 찰칵!

주변에서 셔터음이 들렸다.

어느새 몰려든 기자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는 김강현 후보와 서지훈 총장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김강현 후보가 먼저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서지훈입니다. 어제 일은 정말 축하드립니다. 대한민국의 앞날이 좀 더 밝아진 느낌이군요.”

“정말이십니까? 요즘 듣던 중 가장 반가운 말씀이네요.”

“박 선생 때문에라도 응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유능한 분을 제가 뺏은 것 같아서 늘 송구할 뿐입니다.”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민우는 웃으며 겸손을 표했다. 김강현은 이번엔 정연주와 인사했다. 그녀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솔직히 김강현의 입장에서는 서지훈 총장보다 정연주가 훨씬 어려운 사람이었다.

단순히 재단 이사장이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뒤에 대한그룹이라는 굴지의 기업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잘 보이는 것 또한 선거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부임 후 청문대가 정말 많이 성장한 것 같더군요.”

“아직 멀었어요. 하지만 조만간 명인대를 능가하는 멋진 대학이 될 거예요.”

“하하하. 그것 참 기대되는군요.”

“들어가실까요?”

일행이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총장실에서는 귀빈을 맞이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오자 한진섭이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김강현 후보를 맞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새교육협의회 사무장 한진섭입니다.”

“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아드님을 보셨다고 들었는데요.”

“예?”

뜻밖의 인사말에 깜짝 놀랐다. 곁에 있던 민우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니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한진섭이었다.

“바, 박 선생이 말씀드렸나 보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한 사무장께서도 아주 유능한 분이라고 많이 들었습니다.”

“아, 예!”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한진섭도 한쪽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다.

몇몇 기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는 김강현 후보의 배려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지금 초대된 기자들은 약 10분간 참여하여 회담 내용을 속보로 내보낼 것이다.

그 이후에는 비공식 회담이 준비되어 있다.

‘후보님이라면 아마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준비하셨을 것 같은데?’

민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김강현 후보는 실리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민우와 새교육협의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 걸음을 옮긴 것은 아닌 듯했다.

잠시 의례적인 이야기들이 오갔다.

새교육협의회 측에서는 교육 개혁을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부탁했다. 김강현 후보는 대선과는 상관없이 당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약속된 10분이 지나자 기자들이 퇴장하고 새교육협의회 임원들과 김강현 후보만이 자리에 남았다.

“이제 좀 조용해졌으니 슬슬 본 이야기를 꺼낼 때인 것 같습니다.”

“편히 말씀하시죠.”

“총장협의회를 비롯해서 많은 단체들이 여러분들을 모함하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권을 잡는다면 그들은 더 이상 여러분들을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글쎄요.”

좋은 이야기였지만, 서지훈 교수는 회의감을 품었다. 김강현 후보가 흥미를 보였다.

“그건 저희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정부 차원에서 개입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히려 후보께서는 더 중요한 일을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 말이 함축된 말이었다.

‘강사법’을 비롯한 각종 제도를 다듬어달라는 의미였다. 대학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김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서 총장님이십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일이 지나치면 통제할 수 없게 되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이 해주셔야 할 일들이 많은데 방해가 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걱정되었다면 애초에 총장협의회에서 탈퇴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민우는 내심 서지훈 총장이 대단해 보였다. 유력한 대선 후보 앞에서 저렇게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다니.

“정체된 집단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후보께서 나서서 불똥이 튈까 걱정입니다. 후보께서는 사학 개혁을 위한 관련 법안에 좀 더 신경 써 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희가 의견을 드릴 순 있지만 입법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잖습니까.”

“음…… 알겠습니다. 그럼 그 일은 그리하겠습니다.”

“이렇게 먼저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그자들은 어쩌지 못할 겁니다.”

서지훈 총장도 김강현 후보의 첫 방문에 담긴 의의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때 김강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리고 그가 준비한 진짜 본론이 시작되었다.

“방금 서 총장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입법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고. 그렇다면 그 권한을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권한이라 하시면…….”

“일전에 서지훈 총장께서 후보자 토론회 때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명인대는 썩었다는 한마디 말이지요. 그게 인터넷에서 유행이 됐었지요? 하지만 그게 비단 명인대의 문제일까요?”

동시에 서지훈 총장의 표정이 깊어졌다. 김강현 후보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 행정부가 수립된다면 초대 교육부장관으로 서 총장을 모시고 싶습니다.”

“역시, 그러시군요.”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질문을 받은 서지훈 총장은 민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답했다.

“박 선생이 거절했을 테니 그다음 차례는 저겠지요. 새로운 행정부에서 칼춤을 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으음. 하하하. 이거 서 총장 앞에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겠군요.”

김강현 후보는 흔쾌히 사실을 인정했다.

사뭇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찌 되었든 제자보다 후순위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한편, 그제야 민우는 어제 캠프 사무실에서 했던 김강현 후보의 말이 온전히 이해되었다.

그는 그때 첫 일정으로 새교육위원회를 선택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학과 재단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근본적인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격수로 서지훈 선생님이 적격이긴 해. 경험도 충분하시니까. 그런데 과연 그 기회가 온다고 한들 받아들이실까?’

민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모두가 서지훈 총장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곧 나온 대답은 좀 의외의 것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제조건이 하나 충족되지 않았네요.”

“그게 무엇입니까?”

“후보께서 대통령에 당선되셔야지요.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렇군요. 그래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김강현 후보가 유쾌하게 웃었다. 여러모로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배포는 천부적인 것이다.

“그럼 의향만이라도 여쭙고 돌아가지요.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칼춤을 추실 의향이 있으신지?”

“박 선생 생각은 어때?”

“저요?”

“여기에 박 선생은 너밖에 없잖아.”

민우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 이렇게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서지훈 총장의 눈을 바라본 민우는, 이게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답했다.

“저도 선생님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소심해서 칼춤을 제대로 못 출 거 같거든요. 한번 싹 정리하고 오시는 건 어때요?”

총장협의회 건만 봐도 그렇다. 쟁쟁한 사람이 모인 곳에서 큰소리를 칠 정도로 서지훈 총장은 클래스 자체가 다르다.

그때 서지훈이 씨익 웃었다.

“그렇게 총장 자리가 탐나더냐?”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겁니까?”

“장관으로 가면 내가 사퇴해야 하니 그 빈자리를 노리려는 건 아니고?”

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 어처구니없는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그럴듯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요?”

“어차피 할 거라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하루라도 빨리하는 게 낫지.”

“음…….”

민우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 * *

회담은 여러 의미에서 성공적이었다.

회담이 끝나고 귀한 손님을 배웅하기 위해 모두 대학본부 앞에 모였다. 김강현 후보가 차 문을 열더니 민우에게 물었다.

“박 대변인께선 같이 안 가십니까? 캠프에 볼일 있으시면 같이 가시지요.”

“잠시 연구실에 가 보려고요. 이따 오후 늦게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지요.”

곧 김강현 후보를 태운 차가 그곳을 떠났다. 이어 정연주를 태우기 위해 차가 한 대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유진태가 꾸벅 묵례했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요즘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저도 들어가 볼게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조심해서 들어가.”

“이제 대선이 끝나면 명인대도 새 주인을 맞이하겠네요.”

열린 차 문을 잡은 채 정연주가 말했다. 민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좀 놀리면 안 되냐?”

“놀리는 거 아녜요. 진짜로요. 서지훈 선생님껜 죄송하지만 오빠라면 명인대를 더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곁에 있던 서지훈 총장은 피식 웃었다. 물론, 한진섭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리고 그 생각은 저만 하는 게 아닐 거예요. 오빠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똑같이 생각할걸요?”

“알았으니까 어서 가십쇼. 이사장님.”

“후훗.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정연주가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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