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76화 (476/500)

작은 보답 (1)

드라마틱하게 단일화가 확정된 그 날 밤, 민우는 김강현 후보가 캠프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후였다.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을 무사히 소화한 민우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사무실 로비에 앉았다.

만약 김강현 후보가 따로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민우도 정리하고 퇴근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실까? 어차피 내일 회의도 있으니 그때 이야기하셔도 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강현 후보는 민우에게 잠시 얼굴 좀 보자고 말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민우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

수많은 방송사에서 긴급 속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어느 채널이든 김강현 후보와 민우의 모습을 번갈아 송출하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TV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영 어색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잘 어울리는 배경은 칠판이 놓인 강의실인 것 같다.

‘익숙해질 일은 없겠지. 그럴 필요도 없고. 앞으로 몇 달 뒤면 모두 끝날 테니까.’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짐은 있었다. 이홍주의 지지자들까지 흡수한 지금, 김강현 후보는 초대형 태풍으로 성장해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야권은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정권 교체를 호소하며 민심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불안 요소 중 하나였다. 거기에 야당엔 대통령감이 없다는 논평도 많았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친 상황.

정치 9단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강현 후보가 그 상황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치명적인 스캔들이 터지지 않는 이상 이 분위기를 바꾸기는 힘들 것 같다고.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김강현 후보가 안으로 들어왔다.

“박 대변인!”

“축하드립니다. 후보님.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이게 다 박 대변인 덕이죠.”

두 사람은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그런데 이한백 위원장은 안 온 겁니까?”

“아, 먼저 들어갔습니다. 오늘 다들 고생하기도 했고 시간도 늦어서 말이지요.”

“그렇군요.”

민우는 직감적으로 김강현 후보가 혼자 와야 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오늘 기자회견 잡았다지요? 역시 박 대변인 순발력은 대단합니다.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다니요. 이 위원장도 잘했다고 좋아하더군요.”

“여유가 있었다면 내일 했을 텐데 사무실에 워낙 전화가 많이 와서요. 기자들 안 불렀다면 다들 퇴근하지도 못하고 전화기 붙잡고 있어야 했을 겁니다.”

“하하. 이거 너무 좋아해서도 안 되겠군요. 내일 회식이라도 합시다! 다들 고생했으니까.”

“좋습니다. 기왕 좋은 일이 있으니까 근사한 곳으로 가시죠.”

“메뉴 선택은 박 대변인에게 맡기지요. 자자, 이쪽으로.”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옮긴 장소는 평소 김강현 후보가 쓰던 개인 사무실이었다. 김강현은 검소하고 실용적인 성품이라 내부 장식품 없이 깔끔하고 심플했다.

자리에 앉은 김강현이 차분히 대화를 시작했다.

“일단 늦게까지 기다리라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편히 말씀하시죠.”

“표정을 보니 역시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실은 좀 중요한 일인데…… 내일 일정 때문에 말이지요.”

민우는 바로 내일 일정을 떠올려 보았다. 오늘 회담 결과에 따라 변수가 많아 딱히 정해진 일정은 없었다.

단일화에 성공하냐 실패하냐에 따라 움직여야 할 곳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정이라면 이한백 위원장께서 마음에 두신 게 있을 것 같습니다만.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안 그래도 기업 총수들과 미팅을 한번 해보자는 이야기는 나왔습니다.”

이한백 위원이 가장 집중하고 있는 것은 민생, 즉 국가 경제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한 이후 세계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대한민국도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은 종식이 선언되어 세계적인 유행이 끝나긴 했지만, 경제가 회복되려면 여전히 시간이 필요했다.

민우가 캠프 위원회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국가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한백은 굳이 오늘 자리를 만들어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민우는 짐작했다.

“이렇게 다시 말씀해주시는 건 다른 의도가 있으셔서 그런 걸까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김강현 후보가 민우를 바라보았다.

“단일화에 성공한 후 첫 행보가 제일 중요합니다. 아마 그 캠프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역시 이한백 위원장의 조언을 듣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위원회에서도 경제 회복을 우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물론 그건 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금 예상을 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예상을 깨신다면…….”

“저는 교육이야말로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박 대변인을 제일 먼저 캠프로 모셔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말이죠. 그리고 그때 일도 있고.”

“그때 일이요?”

민우가 알아듣지 못하자 김강현 후보가 씨익 웃었다.

“왜 전에 있잖습니까. 이태하 이사장님하고 한정식집에서 본 거 말입니다. 서지훈 총장도 같이 왔었을 때.”

“아아. 그 일 말씀이군요.”

이제야 이해했다.

당시 민우는 서지훈 총장과 함께 강남에 위치한 한정식집에서 이태하 이사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재단전입금 증액 문제 때문에.

“그때 박 대변인은 그랬습니다. 누구나 최고의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뭐, 정확히는 이명인 선생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그랬었죠. 그때 후보님도 계셨고.”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그때가 참 감명 깊었습니다. 요즘은 어제 뭘 먹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인데도 그 장면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군요. 재단 이사장이라고 한다면 대학의 최고 수장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 젊음과 배포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박 대변인 본인이 이명인 장학생이라고 당당히 말했을 때 얼마나 멋있던지.”

“너무 좋게만 봐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제가 그렇게 본다는데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이건 사적인 감상이니까요.”

문제 될 게 과연 없을까? 민우는 세상의 모든 일은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 문제의 진폭이 작냐 크냐의 문제일 뿐.

고민은 잠깐이었다.

민우는 이 말만큼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례되는 말씀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이에 무슨 실례입니까. 편히 하세요.”

“현명한 지도자가 되려면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제 은사님께 최근 배운 것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은사라면, 서지훈 총장 말입니까?”

“예.”

정확히는 명인대 김명현 실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민우는 서지훈 총장이 취임한 직후 그를 내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김명현의 능력을 높이 샀고, 결국 좋은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요즘도 민우는 김명현과 종종 연락하며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민우는 서지훈 총장이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바로 모범적인 리더의 자질이라는 것을.

“저를 좋게 봐주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저로 인해 생기는 모든 이야기를 공평하게 들으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설령 그것이 부정적인 이야기라도 말이죠.”

“하하하하! 과연, 그렇군요.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걱정입니다. 무엇을 우선할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내일 첫 일정은 박 대변인께서 힘을 좀 써주셔야겠습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새교육협의회로.”

민우는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새교육협의회는 총장협의회에서 탈퇴한 서지훈 총장이 만든 새로운 교육 단체다.

서지훈 특유의 인품과 카리스마에 반한 사람들이 가입을 서둘렀고, 지금은 중견 단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입자가 늘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가입자수만이 아니다.

민우와 서지훈 총장의 교육철학에 공감한 연예인들과 기업인들이 후원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새교육협의회는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리를 제대로 잡아나가고 있었다.

“새교육협의회에 방문해서 여러 조언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곳에는 깨어있는 분들이 많으니까 말이죠. 대신 총장협의회와는 접촉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박 대변인을 위한 작은 보답입니다.”

총장협의회를 비롯해 여러 사학 단체에서 민우와 서지훈 총장을 연일 비난하고 있었다. 이제 김강현이 그 다툼을 잠재우려 한다.

유력한 대선 후보인 김강현이 새교육위원회에 먼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이 들어서는 정부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그 무엇보다도 명확해지는 거니까.

“물론,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건 동감합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예외가 생기는 법이지요. 저는 원칙도 중요하지만 효율도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박 대변인은 앞으로 많은 일을 해주셔야 하는 분인데 잡음이 있어서는 곤란하지요. 그러니 내일 새교육협의회와 의견을 나누고 좋은 정책을 이끌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후보님.”

“그리고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면, 제가 새교육위원회를 선택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일전에 박 대변인께서 말한 최고의 교육 말이죠. 사실 그건 투자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지요. 대학과 재단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진정으로 건강한 학계가 완성될 겁니다. 뿌리가 건강하지 못한데 싹을 틔운 듯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얼마 전, 국내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한일대에서 사건이 터졌다. 개교 이래 처음으로 진행된 종합감사에서 대규모 비리가 적발된 것이다.

자녀 부정 입학은 물론 탈세 의혹까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김강현 후보는 바로 그 부분을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서지훈 총장은 명인대 총장 후보 토론회에서 주목할 만한 저격 능력을 보여주었다. 김강현의 계획에는 서지훈 총장의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후보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돕겠습니다.”

“협회장으로 계신 서지훈 총장이나 관계자분들이 모두 공사다망하신 분들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잠깐 정도 시간 내 주시는 건 괜찮겠지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럼 내일을 기대하지요.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같이 나가십시다! 제가 모셔다드리지요. 하하하하.”

민우는 김강현 후보와 함께 캠프 사무실을 나섰다.

웬만해서는 밤에 전화하지 않으려 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순한 일이 아니라 모두의 꿈과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이 소식을 알리면 다들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서지훈 선생님 반응이 제일 궁금하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민우는 즐거운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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