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75화 (475/500)

후보 단일화 (2)

― 대선 후보들의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야권의 경선이 속속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민중당의 이홍주 전 총리가 김강현 후보와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홍주 전 총리는 며칠 전 기자회견에서…….

민우는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선거 관련 뉴스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답이 안 나온 건가? 빨리 해결돼야 할 텐데. 시간을 끌수록 서로 좋을 게 없어.’

민우를 비롯한 모든 위원들의 관심사는 여권에서 김강현 후보로 단일화가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얼마 전 민우가 주도한 정책 브리핑을 시작으로 김강현 캠프에서는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기습 브리핑으로 이홍주 후보를 압박하겠다는 전략은 제대로 먹혔다.

이홍주 후보를 내세운 민중당에서는 당시 정책 브리핑을 놓고 ‘합의되지 않은 다소 위험한 정책’이라며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합의를 거치지 않고 발표한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내비친 것이 아니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민우가 대선 캠프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이홍주 후보가 상당히 불쾌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반격하지 않았다.

김강현 캠프에서 각종 정책과 공약을 쏟아내는 것에 비해 그들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정말 대선에 출마할 생각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딜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김강현 후보께서 움직이길 기다리는 거지. 분명 협상 카드가 있어 보였는데…… 대체 언제 꺼내실 생각이지?’

언젠가 김강현 후보는 정치에서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도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김강현 후보였다. 그는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박 대변인. 바쁘십니까?”

“아닙니다. 잠시 뉴스 좀 보고 있었습니다.”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죠?”

“아무래도 그렇죠.”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자리를 옮겼다.

김강현 후보는 전국을 오가며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따로 시간을 냈다는 것은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요즘은 좀 어떻습니까? 위원회 정책 회의가 무척 치열하다고 들었는데 말이지요.”

민우의 의견이 정책 회의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민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역시 경험 부족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다들 열정적이셔서 저도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네요.”

“하하하. 그렇게 포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박 대변인이 힘든 거야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 둬야 나중에 일이 좀 더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공직에 진출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앞장서긴 해야 한다. 공청회든 뭐든 참석해서 변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오히려 지금 정책 회의는 연습 게임에 불과하다.

불완전한 강사법을 개정하고 더 나은 정책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논쟁이 불가피하다.

“이홍주 후보를 이번 주말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민우가 깜짝 놀랐다.

“드디어 이야기가 그렇게 된 겁니까?”

“역시 예상대로 이홍주 후보는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대로 무리해서 대선 출마를 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군요.”

“후보께서 기민하게 움직이신 보람이 있었네요.”

“하하하. 그런 셈이지요.”

하지만 김강현 후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다소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편히 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도와주실 일까진 아니지만…… 이것 참. 말씀드려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말이죠.”

“무슨 일이신데요?”

“최측근들에게는 전부 이야기했습니다. 이홍주 후보에게 어떤 딜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요.”

민우는 내심 고마웠다. 자신을 최측근이라고 생각해 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머뭇거리는 이유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박 대변인은 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입니다. 오래전부터 지켜봐 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는 게 생기는군요.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죠.”

“굳이 제가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란 말씀이군요.”

민우는 그렇게 이해했고, 김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 손해 보는 이야기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워지는군요. 만약 박 대변인께서 제가 구상한 내각에 합류하겠다고 하셨으면 고민하지 않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대학으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박 대변인이 순백의 교수로 남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한낱 시간강사 자리에도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 하물며 대통령 자리는 어떨까. 상상하지 못한 일이 많을 거다.

민우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고, 소탈하게 웃은 김강현 후보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예 언질을 드리지 않는 것은 실례라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부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좋은 소식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빈손으로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김강현은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실현되었다.

* * *

이제 여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민우는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선 후보자 등록까지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후보자 등록을 마치면 토론회에 참석해야 하고, 유세 준비도 해야 한다. 오히려 지금이 한가하다면 한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민우는 마치 연구실에서 논문에 빠진 것처럼 각종 정책자료의 홍수 속을 거닐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유세 기간 중 김강현 후보가 쓸 대본을 대시 점검했다. 좋지 않은 말버릇이나 습관을 점검하고 대중 전달력을 높일 방법을 찾는 작업을 그가 담당하게 되었다.

전공을 잘 살린 업무 중 하나였다.

하지만 민우는 일하는 종종 손을 멈췄다. 관심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협상이 잘돼야 할 텐데…….’

민우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오늘, 드디어 김강현 후보와 이홍주 후보가 단일화 협상을 위해 만난다.

지금쯤 한창 논의 중일 것이다. 그리고 논의가 끝나면 바로 기자회견이 열린다.

물론, 만약 협상이 잘되지 않는다면 기자회견이 취소되거나 싱겁게 끝날 수도 있다.

당연히 민우 입장에서는 기자회견이 길게 열리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기자들 앞에 서는 것이겠지만.

이한백 선대위원장을 비롯해 최측근은 현장에 나가 있었다. 민우는 캠프를 지키며 일부 측근들과 함께 업무를 보고 있었다.

민우도 측근이라고 치면 현장에 나가야 하지만, 결과 발표 후 선거 캠프로 문의가 빗발칠 가능성이 있어서 현장을 지휘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민우는 자원해서 캠프에 남았다.

‘영수 씨한테 전화 좀 해볼까? 현장 분위기가 궁금한데.’

그때였다.

때마침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한진섭의 전화였다.

한진섭은 ‘새교육협의회’에서 민우의 후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쁘더라도 그의 전화는 받는 편이다.

민우는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어. 왜.”

― 바쁘냐?

“당연한 걸 왜 묻냐.”

― 지금 애 나왔어.

민우는 깜짝 놀랐다.

아이가 태어나서 놀란 것도 있지만, 주예린의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하얗게 잊고 있었다는 것에 더욱 크게 놀랐다.

― 아주 건강해. 나 닮아서 아주 잘생겼고.

민우는 피식 웃었다.

문득 처음 아빠가 되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국문학을 전공한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표현을 잘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축하해. 너무 바빠서 못 챙겼네. 미안하다. 주님은 좀 어때?”

― 우리 사이에 뭐가 미안하냐. 낯간지럽게. 주님은 건강해. 엄살 엄청 부리더니 막상 잘하더라고. 벌써 둘째 이야기하고 있어.

“그건 좀 무섭다 야.”

두 사람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럼 주님은 당분간 조리원에 있어야겠네?”

― 당분간은 그래야지. 답답해하는데 어쩔 수 있나.

“고생했고, 축하한다고 전해줘.”

― 같이 전해 줄 선물은 없고?

“그건 뭐 천천히.”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대변인님!”

사무 담당 여직원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민우는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 기자회견 열렸어요!”

“그래요?”

민우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캠프 안에 설치댄 대형 TV에 당국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화면에 빈자리가 잡혔다.

아직 김강현 후보와 이홍주 후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막에는 ‘회담 종료. 곧 입장 표명 예정’이라는 자막이 들어가 있었다.

민우가 물었다.

“이한백 위원장님께 연락 안 왔어요?”

“방금 연락드려봤는데 현장에서도 잘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곧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김강현과 이홍주가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

멍하니 TV를 보던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김강현도, 이홍주도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곧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만세 하듯 위로 들었다. 마치 선거에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후보 단일화에 성공한 것이다.

현장 중계를 하는 아나운서도 긍정적인 소식이 있을 것이란 말을 전했다.

곧 두 후보가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김강현 후보가 먼저 발언을 권했다. 하지만 이홍주 후보는 재차 사양하며 김강현에게 양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지 못하던 앙숙이었는데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 걸 보니 정말 신기했다.

정치의 세계는 경험할수록 새로운 것으로 가득했다.

김강현 후보가 발언을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정말 기념비적인 자리가 될 것 같은데요. 우리는 선거 승리라는 하나의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에 합의했습니다. 한민당과 민중당은 다가올 대선에서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로 합의했습니다. 이홍주 후보의 통 큰 결단에 존경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권 후보 단일화 확정’이라는 굵직한 자막이 출력되었다.

동시에 캠프 사무실에 환호성이 터졌다.

“해냈다!”

“우와아아아!”

모두 아이들처럼 뛰며 좋아했다. 민우도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김강현 후보는 약속을 지켰다.

그때 캠프의 전화기가 동시에 울려대기 시작했다. TV 앞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수십 통의 전화가 쏟아지고 있었다.

“대변인님! KBC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는데요!”

“SBC에서도 왔습니다!”

“언론 쪽도 요청이 들어오고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까요?”

다른 직원들도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손을 들었다.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물이 들어오려고 하고 있다.

아니, 이미 반쯤 들어차 있다. 앞에는 풍광 좋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굳이 배를 부두에 묶어둘 필요가 있을까?

“오늘 저녁 7시에 기자회견 잡읍시다. 전 언론사 소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민우는 기꺼이 노를 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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