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74화 (474/500)

후보 단일화 (1)

민우는 오랜만에 명인대에 들렀다.

어젯밤 서지훈 총장에게 연락이 왔다. 바쁜 건 알지만 그래도 얼굴 좀 비추라고. 겸사겸사해줄 이야기도 있다고 해서 아침부터 서둘렀다.

대학본부 주차장에 차를 세운 민우는 바로 총장실로 올라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도착한 설예라 교수가 서지훈 총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다들 잘 지내셨어요?”

“왔냐?”

“진짜 오랜만이다! 박 선생. 요즘 TV에 자주 나와서 그런지 얼굴 확 폈네?”

“워낙 잘 먹고 다녀서 말이죠. 살도 많이 쪘어요.”

“수빈이 힘들겠어~ 애가 하나 늘어난 느낌이겠는데?”

설예라 교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국문과 학과장에서 물러나고 지금은 명인대 교무처장직을 맡고 있다.

당시 민우의 후임으로 신방과 홍주희 교수가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서지훈 총장은 왼팔 격인 설예라 교수를 선택했다.

민우는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설예라 교수가 청록회 멤버이기 때문이었다.

선거를 치를 때 청록회 멤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공을 세우면 포상을 내려야 따르는 사람들이 불만을 품지 않는 법이다.

서지훈 총장은 설예라 교수 말고도 다른 청록회 멤버들을 요직에 앉혔다.

그리고 반년 만에 대학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은 민우의 공백을 훌륭히 메우고 있었다.

“근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민우가 숨도 쉬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서지훈 총장이 혀를 찼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요즘 뭐 하고 사는지 정도는 보고하는 게 순서 아니냐? 누가 상전인지 모르겠군.”

“제가 뭐 하는지는 뻔히 아시잖아요. TV만 틀어도 나올 텐데.”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다만.”

선거가 가까워진 지금 민우의 미디어 노출 회수는 정점을 찍고 있었다. 그만큼 발표할 내용이 많아진 것이다.

김강현 후보의 지지율은 점점 상승하는 추세다. 그것이 민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민우를 대변인으로 세운 것을 호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각에서는 대선이 아니라 여권 단일화 과정이 진정한 결승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단일화의 고비만 넘긴다면 본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밀이었다.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대통령에 걸맞은 인물이 김강현 외에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니까.

하지만 민우를 비롯한 캠프 위원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자그마한 스캔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모든 것을 망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강현 후보도 오히려 유리할수록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지뢰밭 길을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이다.

“참, 얼마 전에 명인대 강사들이 찾아왔었어요. 약속도 안 잡고 무작정 찾아왔더라고요.”

“어디를?”

“캠프 사무실에요.”

두 사람이 흥미를 보였다, 민우는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분명 두 사람도 보람을 느낄 것 같아서.

역시나 두 사람은 환하게 웃었다.

민우는 그들 대신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제가 대신 인사를 받긴 했지만 이게 다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핸드폰으로 가족사진 봤을 때 하마터면 울 뻔했어요.”

“그럴 만도 하지. 공감이라는 게 그래서 중요해. 현직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알 수 없는 것들이거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함부로 재단하려고 하고 있어.”

“탁상공론은 이제 그만해야죠.”

“어깨가 무겁겠구나.”

“그간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오셨는지 이제야 제대로 느끼고 있습니다. 더 좋은 소식 전해드릴 수 있게 노력해야죠.”

서지훈 총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할 일도 막중하지만, 민우가 캠프에서 할 일도 결코 가볍다곤 할 수 없었다.

“마침 때가 잘 맞았구나. 우리도 너에게 해줄 이야기가 하나 있다.”

민우는 살짝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예라 교수와 눈빛을 교환한 서지훈 총장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이사회에서 통보가 왔다. 보류된 전입금 50억, 다시 받아 오는 것으로.”

“정말요?”

“그게 끝이 아니야. 성과가 좋으면 추가로 20억 정도 규모의 연구기금을 조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응용학문 쪽은 오일 머니가 들어오고 있으니 기초학문 쪽으로.”

“아…….”

혹시 액수가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긴 했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니 믿기지 않았다.

액수가 커서가 아니다.

20억 정도는 1년 안에 소진될 정도의 적은 금액이다. 대학과 사학재단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민우가 의미 부여를 한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겠네요. 선례가 생겼으니 앞으로도 연구기금을 만들기 쉽겠어요.”

1에서 10을 만드는 건 쉽다.

하지만 0에서 1을 만드는 건 극히 어렵다. 지금의 경우처럼 말이다. 시작이 어렵지, 막상 시작되면 덩치를 키우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 네가 해낸 일이지.”

“제가 해내긴요. 다 같이 해낸 일 아닙니까? 선생님께서 총장이 되지 않으셨다면…….”

“아니.”

서지훈 총장은 민우의 말을 딱 잘랐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야기가 다르지. 우리 공대에 활기를 불어넣은 건 자얀의 투자야. 그리고 자얀을 부른 건 민우 너고.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아랍에미리트에 국빈으로 초대되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을까?”

잠시 잊고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한마디였다. 곁에 있던 설예라 교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래서 대학을 운영하는 우리 입장에서도 기초학문에 투자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어. 대학 내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특혜를 누리게 된 셈이지. 네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이번 일은 네가 한 게 맞다! 인사받을 자격은 충분해.”

“하하하…… 할 말이 없게 말씀하시네요.”

하지만 좀 낯부끄러운 이야기였는지 서지훈 총장은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예라 교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쿡쿡거리며 웃는다.

“아무튼 이제 좀 마음이 놓여요. 뭔가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나온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너도 할 일 많을 텐데 당분간은 학교에서 신경 꺼라.”

“그럴 순 없죠. 자주 오진 못해도 신경은 계속 쓰고 있어야죠.”

“그런데 이사장님 만날 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냐? 이번 회의에서 이사들 반대가 심했는데 이사장님이 강행하셨다고 들었거든.”

“그래요?”

그건 의외였다. 서지훈 총장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겠다고 한 말이 제대로 먹힌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냥 전입금 안 주시면 재미없을 거라고 했을 뿐인데.”

“그건 협박이잖아 인마.”

“안 그래도 이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협박이 아니라 조언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천적이 나타난 건가? 하하하하.”

서지훈 총장이 시원하게 웃었다. 그것은 설예라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 * *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선생도 따라 일어나며 민우를 격려했다.

“바쁜 건 좋지만 너무 무리하진 마라. 내년엔 대학으로 돌아와야 하는 거, 잊지 마.”

“알고 있습니다. 저는 자유의 몸이 아니니까요.”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대선 준비한다고 눈치 보지 말고.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단 나을 거야. 가만 보면 박 선생은 너무 신중한 면이 있어.”

“알겠습니다.”

민우는 설예라 교수의 충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생각해 보니 총장실에 올라올 때도 지나치게 주변을 의식했던 것 같다. 떳떳하다면 그럴 필요도 없는데.

별말 아닌 것 같지만 두 사람의 격려는 큰 힘이 되었다.

“다음에 또 인사드릴게요.”

“조심히 가라.”

총장실에서 나온 민우는 인문대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기왕 온 김에 동료들과 제자들에게 인사나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타치카와 교수였다.

그는 ‘박민우상’을 수상한 이후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한국에서만 관심을 받는 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연락이 오는 중이다. 벌써 내년 초까지 스케줄이 꽉 찼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로 말이다.

민우는 인문대 연구동에 위치한 ‘독도 연구소’에 도착했다.

넓은 강의실을 개조해 만든 이 연구소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교류사는 물론, 독도의 영주권이 한국에 있다는 실증적인 증거를 발굴,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경제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별도의 트랙을 운영하고 있다.

때문에 ‘독도 연구소’는 명인대 역사학과가 주관하는 곳이지만, 대일 외교와 경제 전문가를 양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미 정치외교학과와 경제학과와 협력하여 협동과정을 만들기도 했다.

역사학은 전통적으로 비인기 학문이었다. 국내 최고의 대학인 명인대에서도 정원 미달을 고민할 정도로 말이다. 전국적으로 역사학과는 통폐합되는 위기에 몰린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독도 연구소’가 설치된 이후 대학원 입학 문의가 지난해에 비해 많이 늘었다고 한다.

대학원은 시작에 불과하다.

대학원 입학 지원자가 늘어나면 자연스레 학부에도 영향을 준다.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들이 사회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홍보될 테니까.

나아가서는 역사학이라는 전통적인 학문이 젊은 방식으로 재편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민우와 타치카와 교수가 바라고 있는 미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민우는 이미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타치카와 교수가 왔으니 이제 다음은 캠벨 교수 차례야. 캠벨 교수를 명인대로 데려와야 해.’

조너던 캠벨.

그는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민속학자다.

타치카와가 아시아의 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라면, 서구를 대표하는 학자는 바로 캠벨 교수라 할 수 있다.

세부 전공은 약간 다르다. 캠벨 교수는 신화와 인류학 분야였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민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미 민우는 대학원 시절 캠벨 교수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그 시작은 석사 1학기 시절이었다. 최민식의 박사 논문을 돕기 위해 이론적 근거를 찾다가 캠벨의 최신 이론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최민식과 이론서를 내기도 했다.

이후 IAHS에서 우연히 만났고, 캠벨이 공동연구를 먼저 제안할 정도로 인정받게 되었다.

요즘은 가끔 안부 메일을 주고받는 정도지만 언제든 그에게 오퍼를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미나 중인가 보네.’

민우는 연구실 안쪽이 훤히 보이는 창문 앞에 섰다.

타치카와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책상에 모여 있었다. 타치카와 교수는 열성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민우는 걸음을 돌렸다.

이후 프랑스에서 온 교수들과 가볍게 안부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자신의 연구실이었다.

“어? 선생님!”

차민재가 깜짝 놀랐다. 민우는 자판기에서 뽑아 온 캔커피를 휙 던졌다. 차민재는 두 손으로 간신히 받았다.

“별일 없냐?”

“논문 때문에 정신없는 거 빼고는 별일 없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잠깐 들렀어. 총장님 뵙고 오는 길이다.”

“앉으세요.”

“아냐. 바로 가야 돼. 오후에 회의 있거든. 논문은 어때?”

“하…… 제가 논문을 쓰는 건지 소설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민우는 한숨을 내쉬는 제자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논문에 익숙하지 않은 석사들이 으레 하는 고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민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엄살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차민재는 아주 훌륭하게 잘 해내고 있었으니까.

“너무 욕심부리지 마.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박사 논문으로 넘겨도 된다. 주변의 기대가 부담스럽겠지만 즐겨야지 어쩌겠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민우는 다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차민재는, 어서 대선이 끝나 민우와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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