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같은 신입 (4)
“손님이요?”
보통 캠프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명인대와 휴머니티를 쉬고 있는 요즘은 집 근처 카페에서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게다가 오늘 찾아오겠다고 한 사람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요즘 만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캠프 일을 하고 있어서였다.
민우와 관계된 사람들은 대부분 요직을 맡은 경우가 많아서 캠프에 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메일이나 전화로 해결하곤 했다.
“일단 안으로 모셔요.”
― 네. 알겠습니다.
민우는 인터폰을 끊었다. 진영수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손님이 오신 모양이네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시고 힘내십시오.”
“고마워요. 다음에 같이 저녁이나 드시죠.”
“좋습니다. 대변인께서 사 주시는 거죠?”
“그럼요. 이 근처에 삼겹살 맛있는 곳 있는데 거기로 가시죠.”
“옙!”
민우는 진심으로 진영수에게 고마웠다. 살벌한 전장에서 전우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영수가 나가고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손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익숙한 얼굴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지? 기자들인가?’
민우는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기자나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눈빛은 민우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박 선생님.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혹시나 싶었는데 계셨네요. 학교에서 뵙기가 어려워서요.”
저마다 반갑게 인사했다. 민우는 얼떨결에 그들과 악수했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죠?”
“저희는 명인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박 선생님 후배들이죠. 국문과는 아닙니다만.”
“아아. 명인대에서 오셨구나.”
민우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어렴풋이 느껴졌던 동질감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들도 민우처럼 학문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방문이 반갑게 느껴졌다.
“저는 신방과에서 강의하고 있는 노우림입니다. 이쪽은 물리학과 정일우 선생님. 이쪽은 심리학과 채홍진 선생님. 이쪽은…….”
자신을 노우림이라고 소개한 젊은 남자가 다른 사람들도 소개했다. 심리학과부터 시작해 물리학과, 철학과 등 각자 전공이 달랐다.
‘정말 기묘한 조합인데?’
보통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쯤 되면 전공에 따라 교우 관계가 좁아진다. 같은 학과 소속이라고 해도 세부 전공에 따라 거리가 많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선 명인대 시간강사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만나서 반갑네요.”
“죄송합니다. 연락을 드리고 찾아왔어야 했는데. 선생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노우림의 말에 민우가 두 손을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정말 뜻밖이라서 즐겁네요. 잘 오셨습니다.”
“역시. 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시게 된 겁니까?”
“대단한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마침 이 근처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선생님 이야기가 나와서 한번 찾아와 봤습니다. 좀 뜬금없죠? 다들 말리긴 했는데 제가 한번 가 보자고 우겨서 오게 됐습니다. 하하하.”
노우림을 비롯한 다른 선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잘하셨어요.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죠.”
민우는 가운데에 마련된 자리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접대용 소파가 가득 찬 것은 사무실을 연 이후 처음이었다.
곧 얼음이 담긴 컵에 주스가 담겨 나왔다. 진영수가 직접 준비해 준 것이었다. 그에게 대접할 저녁 메뉴가 삼겹살에서 소고기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다들 전공이 다르신데 모일 기회가 있으셨나 봐요? 같은 전공이어도 세부 전공이 다르면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죠.”
“그렇긴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박 선생님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 덕분이요?”
“저희는 명인대 시간강사조합 실행위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공이 달라도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겁니다.”
“아, 그랬군요.”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명인대 시간강사조합’은 민우가 기획하고 서강일이 조직한 비전임교원 단체다.
모든 대학에는 전임교원을 위한 ‘교수협의회’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시간강사들은 대학을 위해 일하고 있음에도 목소리를 내기가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그들의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이었다.
‘강사법’ 시행 이후 시간강사에게 교원 지위가 부여되었음에도 관련 단체는 조직되기 어려웠다. 회사 측이 노조를 경계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서지훈 총장이 임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시간강사조합’을 출범시켰다. 물론 그 전에 서강일을 명인대로 초빙한 것이 첫 번째 단추이긴 했다.
그렇게 순조롭게 출발한 ‘시간강사조합’은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줬다.
근무 환경을 비롯해 대학으로부터 제대로 대우를 받고 있는지 모니터링하고 대표자들이 협상에 나서 시간강사의 권익을 향상하는 데 일조했다.
덕분에 명인대를 시작으로 다른 대학에서도 하나둘 강사조합이 생겨나고 있었다.
“서강일 선생이 잘 챙겨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많이 바쁜 것 같아서 말이죠.”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분입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도 먼저 해주시고, 참 의지가 많이 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
“맞아. 그렇지.”
강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겉으로는 잔뜩 엄살을 부려도 나름 내실 있게 조직을 잘 이끌어 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그쪽에 먼저 인사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요?”
민우가 장난스럽게 질투하자 강사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그렇긴 합니다만, 서강일 선생께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강사조합이 생기고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떠들 수 있는 것도 다 박민우 선생님 덕분이라고 말이죠. 박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춥고 낡은 연구실 어딘가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요.”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노우림의 눈이 존경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다른 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우는 그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마치 모두가 노력한 공을 혼자서 독식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결국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러세요? 부끄럽습니다. 오히려 총장님이나 서강일 선생이 더 많은 일을 해주고 계십니다. 인사를 해야 한다면 그분들께 먼저 해야죠.”
“선생님.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 올해 처음으로 아들 데리고 놀이공원 갔습니다.”
“예?”
갑작스러운 고백에 민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노우림이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놀러 갈 생각을 못 했습니다. 월세에 연구비에 생활비에, 방학만 되면 일거리를 찾으러 돌아다녀야 했어요. 아들 녀석이 놀이공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도 어쩔 수 없었죠.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끔은 몰래 울기도 했어요. 내가 이렇게 능력이 없는 아빠였구나 싶어서 말이죠.”
부모를 잘 만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학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민우는 잠시 상상했다.
만약 대학원 시절 윤아를 낳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해주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이기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노우림처럼 어딘가에서 눈물을 흘렸겠지.
같은 아버지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의 고백이 더욱 절실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방학이 되어도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 우리들의 처우를 개선해주시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셨는지 잘 압니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웃고 떠들 수도 없었겠지요.”
언젠가 고맙다는 이야기 정도는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이 장소에서 이렇게 들을 줄은 몰랐다. 찡한 느낌이 코끝에 느껴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민우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대학원 시절 고생했던 어머니와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어머니와 누나는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민우는 지금 효도한다고 해서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들이 헌신한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거니까.
“참, 이것 좀 보시겠어요?”
노우림은 자신의 핸드폰을 켰다.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이 눈에 보였다.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이가 잘생겼네요. 아버지를 닮아서.”
“역시 인문학의 대가십니다. 사람 보실 줄 아시는데요?”
“행복해 보여요. 진짜로요. 앞으로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제가 할 일이 많이 남았거든요.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민우는 다시금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방금 전 있었던 회의에서 실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면 진이 좀 빠졌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오히려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응원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저는 아직도 많은 강사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민우의 말을 경청했다. 민우는 신중하면서도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명인대도 고쳐야 할 게 많이 남았습니다. 단순히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끝은 아니죠. 여러분들이 양질의 연구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 그리고 여러분들의 연구가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학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도울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이제는 비겁하게 뒤에서 숨어있지 않을 겁니다.”
“든든하네요. 저는 선거가 끝나면 바로 명인대로 돌아갈 겁니다. 그때 오늘 약속드렸던 일에 대해 평가해주시면 좋겠네요.”
민우의 겸손하면서도 진솔한 마음이 전해졌다. 여기 모인 강사들은, ‘박민우’라는 이름 세 글자를 다시 머릿속에 각인시킬 수 있었다.
“평가 좋죠. F 드려도 됩니까? 재수강하시는 것도 저희 입장에선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 그건 좀…….”
“하하하하!”
뜻밖의 손님들 덕분에 피로가 완전히 풀렸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아, 근처를 지나가던 직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대변인실을 바라볼 정도였다.
그렇게 민우와 손님들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한참 후, 강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바쁘신데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해야 할 일이 좀 더 명확해진 것 같아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하세요.”
민우는 명함을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연락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우는 사무실 밖까지 나가 배웅했다.
돌아선 노우림이 민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번 선거 꼭 이기시길 바라겠습니다. 적어도 전국에 있는 시간강사들은 다 김강현 후보를 뽑을 겁니다.”
“좋은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명인대에서 다시 인사드릴게요.”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힘내세요. 선생님.”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