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72화 (472/500)

경력 같은 신입 (3)

민우의 데뷔는 완벽했다. 한마디로 이번 브리핑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에 성공했다.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민우는 엄청난 화술을 발휘하여 방어에 성공했다. 민우의 머릿속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정책과 그로부터 파생된 지표가 입력되어 있었다.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어른과 어린아이의 싸움을 보는 듯했다.

결국 기자들은 하나둘 짐을 싸고 프레스룸을 나가기 시작했다.

“독하다. 독해!”

“언제 저렇게 공부한 거지? 정치력만 따지면 시골에서 올라온 서생일 텐데.”

“국회 청문회에 나가도 먼지 하나 안 털릴 기세야.”

기자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됐어.’

민우는 결과에 만족했다. 박윤지 기자가 나가기 전에 엄지를 추켜세워준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정리할 짐이 하나도 없었던 민우는 단상에서 내려와 이한백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부위원장이 자신의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거 제 가방 아닙니까?”

“아, 그게요.”

부위원장은 진땀을 흘렸다. 브리핑에 집중한 나머지 가방을 다시 사무실로 돌려놓는다는 것을 잊어먹은 것이다.

“끝나고 바로 가실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후보님께 인사는 드리고 가야죠.”

“받으십시오.”

순발력을 발휘해 위기를 넘긴 부위원장이 정중히 가방을 건넸다. 민우는 가방을 받아들곤 이한백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많이 걱정하셨을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박 대변인을 대신할 만한 사람은 없을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나온 민우는 김강현 후보가 머무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는 민우가 들어오자마자 일어나더니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고생 많았습니다. 박 대변인. 하하하.”

기분이 좋은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민우의 두 어깨를 다독였다.

“정말 잘하더군요! 조금 걱정이 됐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 그 걱정이 기우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자, 이쪽으로.”

김강현이 자리로 안내했다. 민우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김강현은 인터폰을 눌러 서둘러 시원한 음료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달달한 아이스티를 마시니 이제야 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브리핑 보고 계셨던 겁니까?”

“그럼요. 우리 장비로 따로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나오지 못한 당 위원들도 모두 봤을 겁니다. 아주 중요한 브리핑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 보셨겠네요. 후보님께서 캠프와 선을 좀 그어달라고 하셨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이 좀 있었습니다.”

“출산율 이야기 말이지요?”

“예.”

“그거라면야…….”

손을 슥슥 비비며 몸을 가까이 내민 김강현 후보가 은근히 물었다.

“캠프 언급을 직접적으로 하신 건 계산된 발언이었습니까, 아니면 즉흥적인 발언이었습니까?”

“계산된 발언입니다. 너무 조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틈이 있으면 바로 찌르고 들어가는 게 정치다. 이한백 위원장께서 첫 모임 때 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그 타이밍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김강현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반응을 본 민우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잘 하셨습니다! 솔직히 박 대변인께서 지시대로만 하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찬스를 살려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 박 대변인은 센스가 있습니다. 정치적 감각 말이죠.”

“너무 띄워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투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저야 돌아갈 곳이 정해진 사람 아닙니까?”

“그게 참 아쉽단 말이지요.”

김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각의 핵심 인사로 삼아 도움을 받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됐으니까. 민우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민우는 한결같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으니까.

김강현은 자신이 대선에서 승리하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선거를 어떻게 이기냐보단, 차기 내각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박 대변인에게만큼은 늘 열려 있으니까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허허…… 사람 참.”

“그런데 이홍주 후보 쪽은 어떻습니까?”

민우는 과감히 물었다.

이홍주라는 이름은 김강현 후보에게 있어서만큼은 역린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민우는 오히려 그럴수록 확실히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 뭐. 아직 특별한 대응은 없었습니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후보자 등록을 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조용해요. 그게 좀 불안한 감이 있습니다만…….”

“이번 브리핑이 나간다면 생각이 좀 달라질 거 같습니다.”

“박 대변인께서는 어떻게 예상하고 계십니까?”

“고민이 깊어지겠죠. 진짜 대선에서 경쟁하려면 우리가 내놓은 정책을 능가하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긴 합니다. 야당이라면 모를까, 결국 한민당과 민중당은 같은 뿌리니까 말이지요.”

모든 면에서 김강현 후보 쪽이 한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대로 계속 끌려나가는 것은 이홍주 후보 쪽에도 부담이 되는 일이다.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결국 이홍주 후보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될 거야. 결국 딜을 해오겠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김강현 후보가 받아들일지가 관건이었다.

만약 그 모든 것이 타결된다면 범여권에서는 후보 단일화가 성사될 것이다.

지금은 여론이 여권으로 완전히 쏠린 상황.

만약 여권에서 후보 단일화에 성공한다면, 별다른 대선 주자가 없는 야당은 또다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민우는 그저 대선 캠프와 유권자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좋은 소식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

“이제 봄이 오지 않았습니까? 봄꽃도 활짝 폈고 말이죠. 여름이 오기 전에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기대하십시오.”

김강현 후보도 비장의 무기를 숨겨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고. 민우는 그와 악수하곤 사무실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김강현 후보의 말대로 봄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민우는 잠시 멈춰 서 노랗게 핀 개나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잠시 떠나온 대학 생각이 났다.

‘명인대는 지금쯤 어떠려나? 이제 막 개강했으니 시끌벅적하겠지? 신입생들도 들어왔겠고.’

봄바람이 가득한 캠퍼스 풍경이 떠올랐다. 신입 모집에 한창인 동아리 부원들. 잔디밭에 앉아 간식을 먹는 학생들. 한가롭게 기타를 치고 있는 복학생들.

세상이 변해도 3월 무렵의 캠퍼스 풍경은 놀랍게도 비슷했다.

그리고 이제 학생 신분이 아니니 더욱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 되면 한번 가봐야겠다.’

민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생각난 김에 차에 오르며 수제자인 차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4월에 접어들자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민우는 대변인으로서, 그리고 캠프 교육특보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우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대학을 비롯한 교육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정책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

그 일은 김강현 캠프 내에서 이루어졌다.

민우는 전문위원으로서 열성적으로 회의에 참석했지만, 캠프 위원들과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일부 위원들은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온 건지 개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온 건지 의문이라는 말까지 하기도 했다.

그래도 민우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현행 강사법은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렇게 손을 놓고 있다가는 피해자들만 늘어날 뿐이죠. 계속 대학의 자율에 맡길 순 없습니다. 속히 당국과 함께 개정안을 세워야 합니다.”

많은 위원들이 탄식과 함께 난색을 표했다.

“지금 그게 핵심은 아니잖습니까? 교육, 물론 중요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선에서 이기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좀 더 포괄적인 정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박 대변인도 잘 아시지 않소? 현행 강사법이 시행되기까지 얼마나 큰 진통이 있었는지 말이오. 개정안을 내자는 게 그렇게 쉽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게 아니외다.”

“게다가 지금 대학들이 자체적으로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굳이 섣불리 칼을 댈 필요는 없지요.”

“그렇군요. 여러분들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민우는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때로는 그럴듯한 공약을 세우는 것보다 당선 여부와 관계없이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가벼운 이야기도 인터넷을 타고 나가면 큰 이슈가 되는 세상입니다. 대선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프레임을 박아 넣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단 말입니다.”

“으음…….”

“정론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소이까?”

“천천히 진행해야 합니다. 지금은 경제와 외교 분과가 훨씬 급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자칫하다간…….”

민우는 더 이상 발언하지 않았다. 위원들은 다시 외교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회의가 끝날 때까지 민우가 발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위원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민우는 당사 사무실 한쪽에 있는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그때 진영수가 따라 들어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대변인님.”

“뭐 저만 고생하나요.”

민우는 웃으며 서류를 정리했다. 그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진영수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후보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아뇨. 박 대변인께서 요즘 좀 기운이 없어 보이신다고 하셔서.”

조금 생략된 말이었다. 그래도 무슨 의도인지 이해한 민우가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된다고 생각하고 온 건 아니니까. 그리고 다른 위원님들도 전문가십니다. 제 고집만 세울 순 없죠.”

“그래도 대변인께선 교육특보직도 맡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까도 강사법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다른 위원들께서 너무 회의적으로 생각하셔서 놀랐습니다.”

“우리가 교육 문제만 놓고 모인 거라면 그렇긴 한데…… 그 문제가 다른 분야와도 얽혀 있다는 게 문젭니다. 일례로 대학 정책이 그렇습니다. 잘못 손질하면 외국인 유학생들이 손해를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거든요. 과거 미국의 예를 봐도 그렇죠. 뭐든 쉽게 생각할 수 없어요.”

진영수도 요즘 회의에서 민우가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도 회의에 참석해서 위원들의 발언을 정리하는 일을 한다.

당연히 진영수는 민우의 의견이 잘 수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김강현에게 보고했고, 김강현은 민우를 잘 보조하라고 지시했다.

이제 선거 준비가 본궤도에 올라간 상황이다.

아무리 아끼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편만 들어줄 수 없다. 그처럼 냉혹한 것이 바로 정치판인 것이다.

“그래도 예전보단 낫지 않아요? 처음엔 다른 위원들이 절 어린아이 보듯 하셨는데, 이제는 동료라고 생각해 주시잖아요.”

“참, 대변인께선 보살이시네요. 저라면 엄청 화날 거 같은데.”

“한화 팬이었거든요.”

뜻하지 않은 농담에 진영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민우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

― 박 대변인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