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같은 신입 (2)
민우는 마치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말하는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브리핑을 이어갔다.
혹은, 본인이 직접 대선에 출마하는 것처럼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민우의 말을 경청하며 기록하고 있는 기자들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이게 한민당의 정책인지, 아니면 김강현 후보의 대선 공약인지, 혹은 민우의 향후 계획인지를.
“특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출산율입니다. 2018년 처음으로 합계출산율이 1.0 이하로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출산율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경제를 살린다는 목표보다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문화가 될 수 있도록 각종 정책을 수립할 계획입니다.”
카메라를 향해 있던 민우의 시선이 다시 기자들 쪽으로 움직였다.
“그 연장선으로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도 개혁의 대상입니다. 여전히 경쟁적으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자원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전문 기술직을 양성하고,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대학은 연구 중심의 기관으로 축소 재편될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원을 줄인다는 얘기야?”
“아무래도 통폐합 같은데.”
“박 대변인이 이 정책을 내놓은 건가? 교육특보이기도 하잖아.”
“글쎄. 좀 더 들어보자고.”
기자들의 속삭임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그만큼 대학을 연구 중심의 기관으로 축소 재편한다는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간 민우는 대학이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에 대해 말해왔다. 강사법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고, 명인대 자체적으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이는 강사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식으로 대학의 볼륨을 키우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대학이 축소 재편될 거라는 말이 나오니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손을 들고 발언권을 청할 수 없었다.
질의응답 시간이 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민우의 브리핑은 계속되었다. 기자들은 잡담을 멈추고 마지막까지 그의 말에 집중했다.
“우리 한민당에서는 오늘 말씀드린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부단히 고민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국민께서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상 정책 브리핑을 마칩니다.”
드디어 브리핑이 끝났다.
그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이한백 선대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갑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람 보는 건 어려운 일이군. 나도 아직 멀었어.’
물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한백은 민우가 정치 경험이 부족하며 소극적이라는 자신의 판단이 정확히 빗나갔음을 인정했다.
민우는 경험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석사 시절부터 인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늘 고민해오던 사람이었다.
정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결국 민우가 해왔던 것은 정치라는 특수한 분야가 아니라 그것을 아우르는 훨씬 더 큰 개념의 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수십 년간 강단에 선 경험과 온갖 기자들을 상대해온 시간이 민우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정확한 발음과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표정은 훌륭한 요리에 곁들여진 특제 소스와도 같았다.
‘이 이상의 대변인은 찾을 수 없겠지. 아니, 어쩌면…….’
오히려 대변인을 시키는 게 재능 낭비인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민우는 그 이상의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이한백의 입가에 미소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민우는 여전히 단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이제 질문을 받겠습니다. 오늘 브리핑된 내용 외의 질문은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민우의 말에 기자들이 무섭게 손을 들었다. 민우는 그중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을 지목했다.
“안녕하세요. 경한신문 정치부 박윤지입니다.”
얼마 전 민우가 김강현 후보의 대선 캠프에서 대변인 보직을 맡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박윤지는 문화부에서 정치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김강현 후보의 대선 캠프를 전담하게 됐다.
그녀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소 민우와의 비즈니스적 관계를 잘 알고 있던 경한신문의 경영진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보직 이동을 전하며 그들은 이번에도 특종을 물어오라고 단단히 주문했다.
“김강현 후보의 공약은 잘 들었습니다. 좀 더 젊은 유권자들을 위한 정책이 많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아, 조금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네요. 오늘 브리핑은 당 차원에서의 정책 브리핑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한민당의 대변인도 겸임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민우가 부드럽게 지적하자 박윤지 기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 전 걸려온 전화에서 김강현 후보가 당부했다. 오늘 브리핑은 한민당의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박윤지는 베테랑 기자였다. 잠시 주춤했지만, 첫 질문이라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좀 다른 질문을 드려야겠는데요. 교육 정책에 대한 부분입니다. 앞으로 대학은 연구 중심의 기관으로 축소 재편될 거라고 하셨는데요. 한민당 교육분과 자문위원이자 김강현 캠프 교육특보인 박 대변인의 의견이 반영된 정책인지 궁금합니다.”
첫 질문치고 난도가 좀 높다.
하지만 이미 브리핑 내용을 정리할 때 민우도 짐작하고 있었다. 대학 문화를 융성하려는 자신의 평소 행동과 맞지 않는 부분이었으니까.
“제 의견이 반영된 것이 맞고, 대학을 축소 재편한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하거나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았다. 민우는 마이크 앞에서 차분히 대화를 풀어갔다.
“지금의 대학은 취업과 이윤을 내기 위한 사업적 목적을 띄는 기관으로 변모했습니다. 본연의 목적인 연구와 교육이 철저히 자본 논리에 의해 훼손되고 있지요. 결과적으로 부실 대학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인구 감소와 더불어 정원 미달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됐습니다.”
민우의 어조가 엄숙해졌다. 눈빛도 그랬다. 이 문제만큼은 꼭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축소 재편은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규모로 보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대학을 연구 중심의 기관으로 바꾸게 되면 지금보다 더욱 많은 교강사와 연구원들이 필요하게 될 겁니다. 앞에 설명드렸지만 이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강사법’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요.”
민우는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기 위해 시간강사와 대학원생에 대한 투자를 지속해왔다.
그들이 얼마나 생존하느냐에 따라 대학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계획은 김강현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물론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거다.
절대왕정 시대라면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의 민주국가다. 먼저 사회적인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하지만 민우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이었으니까.
자신의 손으로 끝마치지 못할 수도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민우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발자국을 찍어 두었다. 자신의 뜻을 이어받은 누군가 그 길을 걷는다면 훨씬 더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꿈꾸던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진정으로 학업에 뜻이 있고, 세상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고자 하는 포부를 가진 사람들이 대학과 대학원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충분한 지원을 받으며 걱정 없이 연구를 계속할 것입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박윤지는 안도하며 질문을 마무리했다.
브리핑이 있기 전까지 말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학계를 위해 헌신한 민우가 정치권과 야합하면서 변질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특히 명인대에 휴직계를 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 목소리가 더욱 커졌었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은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민우는 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발 물러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처럼 날카롭게 벼려 있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쪽 기자분.”
“한국신문 송영길 기자입니다. 오늘 브리핑에서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는 인구 문제였는데요. 그만큼 한민당에서도 우려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맥락을 잘 짚는 기자였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7대로 떨어지면서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문화가 된다는 게 좀 모호한 표현이라서,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 건지 궁금합니다.”
“좋은 질문을 해주셨네요.”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김강현 후보는 오늘 브리핑에서 선을 적당히 그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곤란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당 위원들은 물론 지금 대선을 준비하는 우리 캠프에서도 가장 중요시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가 도래함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여전히 국가의 성장 동력 중 하나입니다.”
민우가 대선 캠프를 언급하자 기자들의 손이 분주해졌다. 이를 지켜보던 부위원장이 기겁했다.
“위원장님. 박 대변인에게 사인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벌써 대선을 논하기엔…….”
“자네는 좀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했나?”
“이상한 거라니요?”
“기자들이 멍 때리다가 한 방 먹었잖아. 그리고 지금은 정신없이 받아적고 있고.”
부위원장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이한백이 짧게 혀를 찼다.
“그만큼 자연스러웠다는 거야. 박 대변인의 대선 언급이. 물 흐르듯 흘러가다가 대선 이야기가 나온 거니 기자들이 깜짝 놀란 거지.”
“아!”
“저 베테랑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거야. 이제 막 정계에 데뷔한 신입한테 말이지. 정말 재미있지 않나?”
부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민우의 답변이 계속되었다.
“기존 해법에서는 출산 문제를 경제 문제로 접근했습니다. 물가를 잡고, 임금을 높이며 양육 부담을 줄이는 것에 집중했지요. 하지만 새로운 정책은 그와 궤를 달리합니다. 어쩌면 근본적으로 다를 수도 있지요. 우리가 집중한 것은 사회의 안전망입니다.”
민우는 시선을 카메라로 돌렸다. 생중계는 아니지만 녹화방송으로 공중파를 탈 것이다. 민우는 마치 TV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약속하듯 말했다.
“지금까지의 정책은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출산은 경제 논리가 아니라 좀 다른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경쟁에 시달리고 있으며,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정도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출신 학교와 아파트로 신분이 정해지는 안타까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즉,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건강히 자랄 수 있는 안전망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젊은 세대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잠시 말을 끊은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신뢰가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우리의 고민은 그곳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차별이 없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먼저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는 비단 출산율의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가치일 겁니다. 정책이 성공적으로 시행된다면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 믿습니다.”
이한백은 깜짝 놀라 시선을 내렸다.
그의 두 손이 어색하게 들려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손뼉을 치려고 한 것이다.
그때 그는 직감했다.
이번 선거가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도 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