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70화 (470/500)

경력 같은 신입 (1)

“다녀왔습니다.”

민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한수영 교수가 시사회장에 나타나서 기분이 좋은 것은 주예린만이 아니었다.

민우도, 한정현 감독도 그랬다.

두 사람은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구우며 소주를 한잔 걸쳤다.

그때 한정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성공적인 시사회는 처음이었습니다. 진짜로요. 영화로 만들길 정말 잘했다고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그간 했던 고생이 다 보상받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주예린과 한수영 교수가 관객석에서 떠나고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한정현 감독은 여운을 음미하고 있었다.

민우는 기꺼이 그 말에 동의했다.

아마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이벤트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두 사람에겐 진귀한 경험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주예린만큼은 아니겠지만.

“왔어요?”

집으로 들어가니 이수빈이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술 마셨어요? 오늘은 선거 캠프에 안 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시사회 다녀왔어.”

“무슨 시사회요?”

“예린이 원작 영화.”

그 말에 이수빈이 살짝 놀랐다. 그녀도 주예린과 한수영 교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와 맺은 인연이지만 그 누구보다 친한 두 사람이었다.

“한수영 교수님이라고 했었죠? 오셨어요?”

“응. 왔어.”

“와! 정말요?”

이수빈이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좋아했다.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었어. 선물까지 챙겨오셨더라고. 애기 신발.”

“우와…… 예린이 정말 좋아했겠어요. 펑펑 울었을 것 같은데?”

“역시 잘 아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자세히는 몰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비밀이거든. 시사회 끝나고 같이 나가더라. 아마 같이 저녁 먹었을 거야.”

“궁금하네요.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민우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이수빈이 인터폰을 들고 뭔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주 선생 왔어요!”

“뭐?”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일까?

민우는 서둘러 옷을 마저 갈아입고는 거실로 나갔다. 주예린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옆에는 짐꾼 한진섭도 있었다.

“웬일이냐? 집에서 쉬지 않고선.”

“모른 척하지 마요. 아까 시사회장에 온 거 다 아니까.”

민우는 움찔 놀랐다.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한 감독님이 그새 일러바쳤어?”

“선배가 문 열고 들여다본 거 살짝 봤어요. 뭐, 그걸 못 봤어도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여전히 미덥지 못한 후배일 테니까.”

주예린답지 않은 차분한 어조다.

이번 일이 그녀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많이 겸손해졌네. 한수영 선생님이 참교육 제대로 하시고 가셨나 보구만?”

“그럴지도요.”

“진섭이 너는 왜 딸려왔냐?”

“갑자기 울면서 전화하는데 깜짝 놀랐잖아. 바로 차 몰고 튀어 나갔지. 한수영 선생님 숙소에 모셔다드리고 나오면서 전화했더라고.”

“잘했네. 한 선생님은 언제 내려가시는데?”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가신다네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좀 앉지? 기왕 왔으니 목이나 좀 축이고 가.”

“어휴, 술 냄새.”

“너 때문이다 인마.”

민우는 주방으로 가 포트에 물을 올리고 차를 준비했다.

잠시 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과자와 차가 준비되었다.

뜻밖의 방문이었지만 민우 입장에서는 반가웠다.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영화 볼 때 무슨 이야기 했어?”

“옛날 얘기했죠. 후배들 장학금 챙겨주려 한 거 있잖아요. 그거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때 연락을 하려고 하셨는데, 제가 싫어할 것 같아서 못 했대요.”

“서로 오해하고 있었네.”

“그렇죠.”

그때 누군가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더라면 오늘 시사회장에서 주예린이 눈물을 쏟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뜻하지 않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 상황에서 용기를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주예린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진행한 거니까.

“선생님은 제가 쓴 작품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영화 이야기도 하고, 피드백도 주셨어요.”

“어떠셨대?”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고…… 감독이 작품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거의 처음 받는 칭찬 아닌가?”

“뭐, 정확히는 제 칭찬은 아니었지만.”

주예린이 웃었다. 순간 감정이 복받쳤나 보다. 다시 울먹이려고 하는 것 같아, 민우는 티슈를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좋은 일로 흘리는 눈물은 굳이 멈추게 할 필요 없다.

오히려 실컷 울어, 그간 얼룩졌던 마음이 깨끗이 씻겨 내려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제작발표회 때 네가 그랬잖아. 혼자 쓴 작품이 아니라고. 한 선생님 도움을 받아 쓴 작품이라고 이야기했으니 선생님도 감격하셨을 거야. 아마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이 시사회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안 그래도 그 말씀 하셨어요. 다음부턴 그런 이야기 하지 말래요. 작가가 프라이드가 있어야 한다면서.”

“하하하하. 여전히 배울 게 많네.”

“아직 멀었죠.”

웃으면서 우는 묘한 상황이었다. 눈물을 닦은 주예린이 민우를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차 타고 오면서 정말 고민 많이 했는데요.”

“안 해도 돼.”

무슨 말이 나올지는 뻔했다.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와서 이야기를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답이 되었다.

하지만 주예린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고맙습니다. 선배.”

“아, 하지 말라니까? 징그럽게.”

“어쩔 수 없어요. 이제는 정말 후회를 남길 일은 하지 않을 거거든요.”

저 말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민우는 대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 * *

며칠 후, 대변인 박민우의 첫 데뷔 무대가 열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근사한 정장을 걸치고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얼마 전 장모가 선물해 준 넥타이를 맸다.

정장과 무척 잘 어울리는 넥타이였다. 마치 행운의 부적이 된 것만 같았다.

오늘은 한민당 정책 브리핑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민우는 차를 타고 당사로 움직였다.

역시나 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당 정책 브리핑은 그렇게 인기 있는 메뉴는 아니었다. 보도자료로도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매스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대선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이고, 범여권인 민중당에서는 이홍주가 출마 선언을 한 상황이다.

때문에 기자들은 오로지 한 가지 사실에만 주목했다. 이홍주가 출마를 포기하고 김강현을 도울지 말이다.

곧 한민당 당국자들도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구. 이거 많이들 오셨구만!”

“박 대변인이 좀 부담스럽겠는데요?”

“걱정할 걸 걱정해야지.”

“하하하하.”

캠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캠프에서 요직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선대위원장인 이한백도 모습을 드러냈다.

민우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예상보다 많이 몰렸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아시겠지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민우는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준비는 충분히 했으니까요.”

“김 후보께서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한백은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야 민우가 조금 더 긴장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때 이한백의 시선이 부위원장을 향했다.

부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고, 이한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대학 강단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오늘이 마지막 무대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박민우 선생.’

이한백은 발표석에 오르고 있는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민우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날엔 새로운 대변인을 앉힐 계획을 세웠다. 대변인이 두 명인 경우도 흔한 일이니까.

캠프에는 여전히 민우의 역량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민우를 얼굴마담으로 세워도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은 김강현 후보가 민우를 직접 발탁했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한 번 정도는 기회를 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첫 위원회에서 민우를 신임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선대위원장으로서 내부 균열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한백은 여전히 민우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신비로운 푸른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지금부터 브리핑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길어지진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짓궂은 질문을 하시지 않는다면요.”

민우가 편안한 마음으로 서두를 열었다. 유쾌한 시작에 기자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지켜보던 부위원장이 화들짝 놀랐다.

“위원장님.”

“왜 그러나?”

부위원장은 속삭이듯 이한백에게 보고했다.

“박 대변인이 대본을 안 들고 나갔는데요?”

“뭐라고?”

이한백이 인상을 찌푸리며 단상을 확인했다. 놓인 자료는 없었다. 브리핑을 시작한 민우는 아무것도 손에 쥐고 있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거 아닐까요?”

“으음…….”

이한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켜보세. 필요하면 다시 자료를 준비해 오겠지.”

“모양새가 너무 안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멈추게 할 순 없잖아? 박 대변인 가방이나 가져와.”

“알겠습니다.”

부위원장이 사무실로 서둘러 뛰어갔다. 이한백은 근엄한 눈으로 민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우리 당에서는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습니다. 인구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 그리고 교육 격차 문제, 외교 문제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5년 전 유행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민우는 녹화되고 있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마치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브리핑을 이어 나갔다.

팔짱을 낀 채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이한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민우는 한 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친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느덧 브리핑을 시작한 지도 10분이 지났다.

그 와중에 민우는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멈추지도 않았다. 마치 근사한 목소리를 가진 성우가 책을 읽는 것처럼 편안함을 선사했다.

‘역시 그랬군.’

이한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선 캠프에서 논의된 A4 100여 장에 달하는 비전과 정책이 모두 민우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긴장한 나머지 대본을 들고 올라가는 것을 까먹은 것이 아니야.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때 사무실로 갔던 부위원장이 민우의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어떻습니까?”

“헛수고한 것 같아.”

“예?”

“우리가 한 방 먹었다고. 대변인을 새로 앉힐 필요는 없겠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한백은 턱짓으로 민우를 가리켰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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