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시사회 (2)
바쁜 나날이 지나고 봄기운이 완연해졌다.
민우는 대선 캠프와 휴머니티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캠프 대변인을 맡게 됐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내부적으로 정책과 공약을 좀 더 다듬은 다음 기자회견을 열기로 가닥이 잡혔기 때문이다.
거기에 범여권인 민중당 소속인 이홍주 전 총리가 출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한민당에서 대선 후보로 나선 김강현은 최대한 언론 접촉을 자제했다. 후보 단일화의 가능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것이다.
지금 괜히 공약을 발표하는 등 언론 접촉을 해 봐야 민중당만 자극할 거라는 의견을 수용했다.
그리고 민우는 오늘을 기점으로 휴머니티의 모든 활동을 중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휴머니티에 정치색을 입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우는 휴머니티를 시작으로 몇몇 단체에서도 이름을 내렸다. 그 단체엔 새교육협의회도 포함되어 있다.
새교육협의회는 서지훈 총장을 주축으로 정연주 이사장, 그리고 청문대의 유서희 총장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교육 협의체였다.
그곳에서 사무장직을 맡고 있던 민우는 그 자리를 한진섭에게 물려주었다.
처음엔 완강히 거절했다.
하지만 이제 슬슬 큰일을 해볼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에 결국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민우야 말할 것도 없고 서강일이 최근 휴머니티 학장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자극이 된 것이다.
“이렇게 또 발을 빼는 건가? 일은 잔뜩 만들어 놓고 혼자 빠지는 데 아주 도가 텄어.”
팔짱을 낀 서강일이 투덜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며칠 전부터 ‘박민우상’을 수상한 학자들의 특별 강연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소 확보와 홍보 계획까지. 모든 것이 멤버들의 몫이었다.
휴머니티 캠퍼스의 교수연구실에서 짐을 챙기던 민우는 잠시 손을 멈춰야 했다.
어느새 다른 멤버들도 다 모여 있었다.
“특별 강연은 네가 유치한 거잖아. 왜 나한테 덤터기를 씌워?”
“나야 뭐 교섭만 한 거니까. 다들 박민우 박민우 하면서 눈 번쩍이면서 꼭 강연에 참여하겠다고 하는데 내가 무슨 유치를 했다 그러냐?”
“나였으면 그런 생각도 못 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한 게 맞아.”
“퍽이나 못했겠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래도 싫은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창립 멤버들은 민우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가 단순히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대선 캠프에 투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새로운 시대가 좀 더 가까이 다가온 건 아닐까, 그런 묘한 기대감을 품었다.
이번 대선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분명 민우가 교육특보로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테니까.
“그럼 언제쯤 돌아오시는 거예요?”
이번엔 정연주가 물었다. 민우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선거 끝나면 바로. 가을에 선거니까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초에는 다시 돌아올 수 있겠네.”
“그렇게나 빨리요?”
“빨리라니. 올해는 통째로 자리를 비워야 해서 마음이 심란하구만.”
“누가 당선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김강현 의원님이 당선되면 곁에서 좀 더 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게. 너무 바로 나오는 것도 모양 빠지지 않나?”
한진섭이 거들었다.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미 마음 정했다.”
아무도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은 민우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 고집을 누가 말리냐, 그런 표정이었다.
“뭐, 여러분들이 저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못 돌아오는 거겠지만 말이죠. 다들 정신없이 바쁘겠지만 조금만 참읍시다. 좋은 날이 올 테니까!”
“완전 밉상이네.”
“그러게. 눈치 없게 염장 지르고 있네.”
“진상이다.”
“경찰 불러!”
“때로는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법이죠.”
이수빈까지 그러는 걸 보니 한 대 맞을 분위기였다. 민우는 가방과 짐을 들었다. 이제 캠퍼스를 잠시 떠날 시간이었다.
“다들 잘 부탁해.”
짧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한마디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우를 캠퍼스 밖까지 배웅했다.
* * *
3월 초입, 민우는 중요한 전화를 받았다. 바로 김강현 후보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 아쉽게도 단일화는 당장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홍주 후보가 아예 만나줄 생각을 안 해서 말이지요.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말씀입니다만 포기하신 건 아니지요?”
― 당연히 아닙니다. 저는 계속 대화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겠지요.
민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단일화에 너무 목을 매고 있으면 큰 것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오히려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게 낫다.
― 이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해야 할 시기가 온 듯합니다. 선대위원장도 그렇게 조언했고요. 캠프와 당이 협심해서 이홍주를 압박할 겁니다. 제 발로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해야지요.
그래서 한민당에서는 전격적으로 정책 브리핑을 준비했다. 한발 빨리 움직여 경쟁자를 도태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브리핑 준비하겠습니다.”
― 가볍게 준비해주시면 될 듯합니다. 대선과 연관짓는 것은 좀 부담스러우니 한민당의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하면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오히려 가볍게 준비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 진영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민우는 재빨리 외투를 걸치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한참을 이동했다.
그가 내린 곳은 대학로였다. 정확히는 그 근처에 있는 소극장에 볼일이 있었다.
한가롭게 연극을 감상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한정현 감독이 제작한 <방랑자들>의 시사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냈다.
당초 계획했던 대로 이번 시사회에는 단 두 명만 초대되었다.
주예린과 한수영 교수.
민우는 과연 한수영 교수가 시사회장에 나타날지 궁금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상아대로 가서 한수영 교수를 만날까도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자신이 중재한다면 한수영 교수를 나오게 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서지훈 총장이 했던, 너무 오지랖을 부리지 말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건 예린이가 극복해야 할 문제야. 내가 나서는 건 실례지.’
결국 시사회날이 밝을 때까지 민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감독님.”
극장 입구로 들어가자 상영관 앞에서 한정현 감독이 안절부절못한 자세로 서 있었다. 민우가 부르자 그는 놀라면서도 반갑게 인사했다.
“어? 교수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걱정돼서 와 봤어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기는 하지만요.”
“하하하.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교수님을 위한 시사회는 따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번에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민우가 주예린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한정현 감독은 아직 민우에게 보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시사회도 준비해 두었다.
“한수영 교수님께 연락은 아직 안 온 겁니까?”
“예. 이렇다 할 답변이 없었습니다. 오실지 마실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시사회를 취소하기는 좀 그래서…….”
“주 작가는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민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시사회 시작까진 아직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어 상영관으로 이어진 출입문을 살짝 열었다. 저 너머로 객석에 앉아 있는 주예린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출산이 거의 임박한 상황이라 배가 상당히 많이 나와 있었다.
곧 세상의 빛을 보게 될 아이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안식년을 내고 대외적인 활동을 모두 끊은 그녀였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시사회가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주예린의 표정은 다소 불안해 보였다.
민우는 문을 닫았다.
“하, 이거 참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네요. 오셔도 걱정되고 안 오셔도 걱정되고.”
“무조건 오셔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와 마주해야 하잖아요. 오시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주 작가도 굉장히 실망할 거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돌아설까요?”
“믿어봐야죠.”
두 사람은 출입구를 지키며 한수영 교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결국 남은 10분이 모두 소진되었다. 오후 3시 정각이 되었지만, 한수영 교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안 오시는 거군요.”
“잠깐만요.”
뭔가를 발견한 민우가 한정현 감독을 붙잡고 구석으로 숨었다. 뒤이어 소극장으로 누군가 들어갔다.
곱게 나이를 먹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쇼핑백이 하나 들려 있었다.
민우와 한정현 감독은 깜짝 놀랐다.
나타난 것은 바로 상아대의 한수영 교수였던 것이다.
“…….”
한수영 교수는 상영관 앞에 서서 물끄러미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녀는 상영관에 앉아 있던 주예린과 상당히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도 불안한 것이다.
결국 민우는 한정현 감독의 등을 떠밀었다.
“아! 한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한정현 감독은 한수영 교수를 맞이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수영이에요.”
“한정현입니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작품은 빠짐없이 읽고 있지요. 책으로만 뵙다 이렇게 직접 뵈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하하하.”
한정현 감독이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띄웠다. 하지만 한수영 교수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고 진지했다.
한정현 감독은 그녀가 들고 있는 백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뜻밖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교수님. 이제 슬슬 시작할 시간인데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그러죠.”
어쩔 수 없이 한수영 교수는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상영관을 채우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문이 열리자 멍하니 앉아 있던 주예린이 이쪽을 바라보곤 깜짝 놀랐다.
“선생님…….”
“…….”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완전한 재회를 위해 한정현 감독은 잠시 물러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퍼뜩 정신을 차린 주예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수영 교수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배가 불러서가 아니었다. 혹여라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한수영 교수는 불룩해진 주예린의 배를 바라보았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수영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이다.
“말괄량이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엄마가 됐다니.”
“……예?”
“축하한다.”
주예린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한수영 교수는 웃고 있었고,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수영 교수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 유명한 유아용픔 브랜드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이거…….”
“애기 신발 좀 샀어. 너 닮아서 잘 뛰어놀 것 같아서 말이야. 받아 둬.”
“선생님. 전…….”
“미안했다.”
주예린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명인대 교수이자 세계적인 작가가 된 지금까지도 떨쳐내지 못한 그 무거운 올가미가 단번에 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아니에요. 제가…… 제가…….”
주예린은 말을 잇지 못했고, 한수영 교수는 손을 뻗어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한정현 감독이 감탄했다. 그는 민우와 영사실에 앉아 있었다.
“이야!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네요. 제 영화를 틀 필요도 없을 정돕니다. 갑자기 현타 쎄게 오는데요?”
“그래도 트세요. 저는 볼 거니까.”
“여기서 보신다고요? 교수님을 위한 특별 시사회는 어쩌고요?”
“이것만큼 특별한 시사회가 또 있겠습니까?”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은 한정현 감독이 기계를 조작했다.
상영관이 암전되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두 시간가량의 러닝 타임은 그간 쌓였던 회포를 풀기에 너무 짧지 않을까?
민우는 편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