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시사회 (1)
민우의 한마디가 순식간에 좌중을 휘어잡았다.
“으음.”
“허허…….”
다들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민우는 지금까지 정치와 관련된 일에서는 수동적이었다.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때는 거의 묻는 말에만 발언했다.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순간이 많았지만 그는 늘 침묵했었다.
그래서 한민당 사람들은 민우를 내심 깔보고 있었다.
배운 것만 많고 욕심이 없는 쉬운 사람이라고.
그런데 지금 그 법칙이 깨진 것이다.
“진심이시오?”
“그렇게 물어보시는 저의가 궁금하네요. 여전히 자격을 문제 삼고 싶으신 겁니까?”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서였다. 질문을 꺼낸 위원이 살짝 당황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박 위원께서는 늘 조심스러우셨잖습니까. 자문위원으로 일할 때도 그랬고 말이지요. 갑자기 이러시니 좀 적응이 안 된달까. 뭐, 그런 거지요.”
“그건 그때 제 포지션 때문입니다.”
“포지션이요?”
“자문위원이 해야 할 일은 정책에 대한 조언뿐입니다. 그 이상의 일을 하는 것은 월권이고요. 하지만 전 지금 후보님의 캠프의 위원으로 참석했고, 대변인이 될 기회가 생겼습니다. 더 주저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무도 반문하지 못했다. 민우는 그들의 허를 정교히 찌르고 들어갔다. 당연, 김강현 후보의 입장에서는 매우 흡족한 장면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인 사람일 줄은 몰랐군요.”
이한백이 결국 한마디 했다.
불만을 표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결국 그도 김강현 후보의 선택에 따라야 할 수밖에 없었다.
“자격이나 경험에 대한 문제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위원님들의 말씀은 충분히 들었으니 선대위원장님의 결정에 따르고 싶습니다만. 어떠십니까?”
민우가 제안했고, 김강현 후보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동의했다.
한편으로 이한백은 눈매를 좁히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가 말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 여론이 그의 손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들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민우가 그만한 능력이 있어서였다.
‘그동안 능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군.’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쪽으로는 전혀 무감각할 줄 알았는데 제법 솜씨가 좋았던 것이다.
만약 이 문제를 김강현 후보에게 넘겼더라면 선대위원장인 이한백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선대위원장은 오히려 대선 후보보다도 캠프에서 더 큰 권한을 갖고 있어야 한다. 선거 전략을 수립하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 각종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상황에서 민우가 결정권을 이한백에게 넘긴 것이다.
그러니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던 김강현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 하나는 잘 택했다면서.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운을 뗀 이한백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민우를 바라보면서.
“박 위원의 근본적인 자질을 의심한 게 아닙니다. 내가 말한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단 말은 방금과 같은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박 위원이 나서야 할 때 나서지 않으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정치는 상대방이 틈을 보였을 때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찌르고 들어가야 하거든.”
“그 부분은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제가 대학에 휴직계를 내지도 않았겠지요.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포지션의 문제라고 하신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군요. 오히려 신중해서 좋습니다. 내가 좀 모난 이야기를 했는데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았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선대위원장으로서 충분히 걱정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한백 위원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박 위원이 대변인을 맡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후보님의 뜻이기도 하고 나의 뜻이기도 하니 다른 위원분들은 이제 그 문제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맙시다.”
이한백이 밀어붙이자 그 누구도 반문하지 못했다. 민우는 어깨를 펴고 당당히 앉았다.
김강현의 입장에서는 큰 도박이었다.
민우에게 중임을 맡기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선대위원장은커녕 부위원장직도 버거울 것이다.
하지만 대변인이라면 다르다.
전공을 살릴 수도 있고, 세계 명사들과 인맥을 쌓아놓았기 때문에 여러 부분에서 도움을 받기 쉽다.
민우를 그냥 교육특보로 활용하기에는 조금 아쉽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김강현은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곳에 배팅한 것이다.
김강현 후보가 손뼉을 한 번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이제 보직은 모두 결정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우리 캠프의 비전에 대해서 말이지요. 일찍 들어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 * *
김강현 후보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밤 11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이수빈이 거실에서 TV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 많았어요. 생각보다는 일찍 왔네?”
“몇 시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고 있을 때 올 줄 알았지.”
“윤아는?”
“방금 잠들었어.”
민우는 옷을 갈아입은 뒤 간단히 씻고 밖으로 나왔다. 이수빈이 간단히 먹을 만한 것을 준비해 놓고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먹을 것을 챙겨주는 것보다, 오늘 있었던 일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사장님 만난 거는 어떻게 됐어요?”
이수빈은 대선 캠프보다 재단전입금에 관심을 보였다.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 앉은 민우는 일단 딸기 하나를 포크로 집었다.
“고급 정보를 듣고 싶으면 좀 더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냐?”
“치킨?”
“됐어. 이 시간에 치킨은 무슨.”
피식 웃은 민우는 딸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달달하니 맛있게 잘 익었다.
“이사회에서 논의하고 결정한다고 하셨어. 형식상의 논의가 될 거 같아. 적어도 이사장님은 크게 거부감이 없어 보이더라고.”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전에 받은 50억, 좀 모자란다고 했었잖아요.”
“사람을 데려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 연구소도 만들고 조교도 배치하고 하면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지. 여윳돈도 좀 있어야 하고.”
타치카와 교수도 그렇고 세드릭 교수도 전용 연구소를 얻었다. 거기에 행정조교와 연구조교 등 전문인력을 배치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든다.
문제는 스카웃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더 좋은 조건으로 학자들을 데려와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추가로 요청한 50억은 눈 녹듯 사라질 수도 있다.
타치카와와 세드릭 모두 기초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라 크게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지, 만약 응용과학 분야에서 인재를 데려온다면 첨단 장비까지 배치해야 한다. 개중엔 수억은 그냥 넘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서지훈 선생님 임기 끝나면 총장 선거에 나가겠다고 말씀드렸어.”
“……진심?”
“왜 처음 듣는 것처럼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잖아.”
“좀 빠르다 싶어서요. 공직은 안 하려고요? 선거에서 이기면 오빠한테도 자리 돌아가지 않을까?”
“그건 나중에.”
너무 간단히 대답하자 이수빈은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공직인데 이렇게 취사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예전부터 좀 걱정됐던 게 있는데, 그러다 토사구팽당하면 어쩌려고요? 공직도 고위 공무원일 텐데 하라고 할 때 안 하면 기회가 올까?”
“올 수밖에 없지. 10년 뒤의 나는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을 테니까.”
멍하니 민우를 바라보던 이수빈이 빵 터졌다.
“엄청난 말을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정계에 입문하더니 완전 능구렁이가 다 됐네?”
“그럼 아니야?”
“아닌 건 아니지만…… 뭐, 맞겠죠. 오빠가 허세를 부리지 않는 건, 허세를 부리긴 하는데 그게 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 이루어져서 그런 거니까.”
“알면 됐어.”
“이젠 진짜 궁금하다. 오빠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민우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뭐, 끽해야 장관 정도일까?”
“누가 들으면 진짜 아무나 장관 할 수 있는 줄 알겠네.”
“지금은 별 관심 없어. 서지훈 선생님을 잘 도운 다음 대학을 이어받고 싶은 마음뿐이야. 그 전에 경험 많이 쌓아 둬야지.”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민우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노벨상을 탈 때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 민우는 학문의 경계를 넘어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때는 그런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대로 멀어지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는 게 아닐까 해서.
하지만 이제는 그런 불안감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민우는 혼자 나아가지 않았다. 자신은 물론 휴머니티 동료들, 나아가서는 대학 후배와 여러 인연들의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갔다.
이 사람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어? 오빠 전화 온 거 아녜요? 진동 소리 들리는데.”
“내 건가?”
“난 벨소리로 해놨어요.”
서둘러 일어난 민우는 책상 위에서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집었다. 한정현 감독이 건 전화였다.
“네, 감독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너무 밤늦게 전화드린 건 아니죠? 오늘 일정이 바쁘다고 하신 게 생각나서 느지막이 전화했습니다.
“타이밍 좋습니다. 지금 막 집에 들어왔거든요.”
― 하하하. 다행이네요. 잠깐 통화 괜찮으시죠?
“말씀하세요.”
민우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사이 이수빈은 먹다 남은 과일 그릇을 책상에 살짝 올려 주었다.
― 오늘 주예린 작가님과 통화했습니다. 시사회 건 때문에요.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통화했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단 빨리 연락했네요. 그럼 시사회는 언제로 결정된 겁니까?”
― 다음 달 말일로 결정되긴 했는데, 비공개 시사회가 될 것 같습니다.
“비공개 시사회라면…….”
민우는 선뜻 그 의미가 그려지지 않았다. 애초에 시사회는 관객을 몇 명 초대하는 반공개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굳이 ‘비공개’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 이번 시사회엔 두 분만 초청하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그건 시사회가 아닌 것 같은데요.”
― 규모는 그렇지만 모든 과정은 시사회와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저도 나가서 영화에 대해 설명을 좀 할 거고요.
“그래도 두 명은 너무 적지 않나요?”
― 주예린 작가님의 뜻이었습니다. 워낙 확고하셔서 설득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주예린이 감정적으로 나설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뭔가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명이면 누구누구 초대되는 겁니까? 설마 주 작가와 저는 아니겠지요?”
― 그게…… 주예린 작가님과 한수영 교수님. 이렇게 두 분을 모시고 시사회를 열게 됐습니다.
“한수영 교수님이라고요?”
민우는 깜짝 놀랐다. 두 명만 초대한다고 했을 때, 민우는 한수영 교수의 참석을 배제했다.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상상하지 못한 조합이 나왔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다. 정확히는 사이가 좋은 게 아니라 그간 교류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남보다 어색한 사이였다.
“정말 주 작가가 그렇게 요청한 겁니까?”
― 저도 주 작가님하고 한수영 교수님 관계를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좀 걱정스러웠는데, 주 작가님은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음…… 그런가요.”
그게 주예린의 선택이라면 믿어줄 수밖에.
“한수영 교수님은 나오시기로 하셨습니까?”
― 내일 연락드려볼 참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번 기회로 주 작가가 짐을 좀 덜었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생각을 했는지. 역시 작가는 작가라니까?’
이번 시사회가 두 사람의 기억에 평생 남을 새해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민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딸기를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