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좋다 (3)
이태하 이사장과 협의를 마친 민우는 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전입금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어. 그렇다면 이사회 회의는 그냥 형식적으로 진행되겠지.’
50억 정도는 재단 입장에서 큰돈이 아니다. 오히려 그 돈을 의미 있게 쓰는 중이니 50억 이상의 돈이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생각난 김에 민우는 서지훈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 결과를 보고했다. 원칙적으로 서지훈 총장과 함께 와야 했기 때문에 바로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
― 고생했다. 혼자서 면담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이제야 좀 마음이 편해지네요.”
― 조만간 후임 결정되면 같이 밥이나 먹자.
“알겠습니다.”
서지훈 총장은 다시금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곤 전화를 끊었다.
이로써 민우는 아무런 후회도 남기지 않고 교무처장직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최근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나저나 정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구나.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민우에게는 확고한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그 계획을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빠짐없이 성공시켰다.
당연히 주변의 기대가 충만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제는 정말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에 드러날 테니까.
교수 시절에는 대학이라는 울타리가 어느 정도 보호해 주었다.
하지만 정치판에 투신한 지금은 그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줏대 없이 이리저리 휘둘릴 필요도 없지. 내가 취해야 하는 건 반드시 취하자. 이것도 나에겐 큰 기회나 다름없어.’
차분하던 민우의 눈이 한차례 반짝였다.
다음 목적지는 한민당 당사가 아니라 서울 중심에 위치한 사무실이었다.
이제는 대선 캠프가 공식적으로 꾸려졌기 때문에 당사를 이용할 수 없다. 김강현 의원은 접근성이 좋은 빌딩에 사무실을 냈다.
곧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민우가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을 닫기 전 레아에게 지시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세요. 저녁도 먹고 하면 좀 늦을 겁니다. 택시 타고 들어갈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에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내일 봐요.”
레아를 보내고 바로 사무실로 올라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화분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동양란도 있었고 처음 보는 희한한 나무도 있었다.
리본띠를 보니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개소를 축하한다는 멘트를 적어놓았다. 새삼스레 김강현 의원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실감이 났다.
“박 위원님! 어서 오십시오. 여기 사무실은 처음이시죠?”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친근하게 인사했다. 민우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김강현 의원의 수석보좌관인 진영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보좌관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만큼 김강현 의원이 아끼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세월만큼 정직한 것은 없으니까.
진영수는 평소 ‘킹메이커’를 꿈꾸고 있었다. 꼭 김강현 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민우에게도 다짐하듯 말하곤 했었다.
다른 보좌관이나 측근들이 지자체장이나 구의원 등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끝까지 김강현 의원의 곁을 지켰다.
한마디로 요즘 보기 힘든 의리 넘치는 사람이었다.
“처음이긴 한데 분위기는 익숙하네요. 그런데 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적당히 맞춰 오셨습니다. 다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마지막이면 늦은 거 맞네요.”
“하하하.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민우는 서둘러 진영수의 뒤를 따라갔다.
회의실 안에는 이미 도착한 여러 위원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이번 대선에서 한민당은 경선을 치르지 않는다. 김강현 의원의 단독 출마로 합의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피로를 덜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 박 위원님! 어서 오십시오.”
김강현 의원은 굳이 일어나서 민우를 맞았다. 덕분에 다른 위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모인 위원 중 민우가 가장 젊었다. 나이도 그렇고, 다른 위원에 비한다면 정치 경험도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김강현은 마치 민우가 위원장이라도 되는 듯 깍듯하게 대했다. 당연히 그런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강현 의원의 별명은 ‘정치 9단’이다.
그런 기류를 읽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자, 다들 아시겠지만 앞으로 우리 캠프에서 교육특보로 활약해 주실 박민우 위원입니다. 나이는 어릴지 몰라도 이 자리에 서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계신 분이죠. 아마 이 부분에선 이견이 없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 다들 합심해서 좋은 결과를 내 봅시다.”
김강현 의원이 사람 좋게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고이기도 했다. 누구도 민우의 자질을 걸고넘어져선 안 된다고. 지금은 서로 뜻을 모아야 할 때라고.
“잘 오셨습니다. 박 교수.”
“이제 위원님이라 불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하하하. 아무튼 반갑습니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민우를 환영했다. 민우는 인사를 돌리곤 자리에 앉았다.
다시금 김강현 의원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우리 캠프가 드디어 이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선거 캠프는 그저 선거를 준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갈지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한마디로 국민께 희망을 드리는 자리라는 겁니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은 둘째 일이지요. 대한민국을 좀 더 나은 나라로 만들기 위한 공약이 먼저입니다. 나라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잘 풀리면 잘 풀리는 대로 고민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국격을 높이면서도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좋은 정책이 있다면 기탄없이 이야기해줬으면 합니다. 백지에 처음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다시 시작해 봅시다.”
김강현 의원은 대선에 임하는 각오와 목표를 위원들과 함께 공유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웅건한 힘이 있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위원들이 하나씩 소감을 말했다.
“조금 멀리 돌아온 감이 있긴 하지만 이번엔 꼭 승리하실 겁니다. 감히 누가 후보님의 명성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후보님을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아. 그런 말씀은 마세요. 여러분들을 위원으로 모실 수 있는 저 또한 영광입니다. 그럼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보직을 정해야겠는데…… 위원장도 필요하고 대변인도 필요하지요?”
“생각해 두신 분이 계십니까?”
김강현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그림은 그려두었습니다. 특히 선대위원장은 중요한 보직인데, 혼자 독단으로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니 같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선대위원장은 말 그대로 선거 캠프의 총 지휘자다. 대선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처리한다. 후보의 비전을 제대로 보여줄 사람이어야 한다.
자리에 모인 위원들이 하나둘 의견을 말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후보님의 생각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큰 그림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계신 분은 후보님이니까요.”
“으음, 저는 이한백 위원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리 캠프를 이끌어줄 만한 분으로 제격이지요.”
“찬성합니다.”
“저도 찬성합니다. 이 위원님이라면 중심을 잘 잡아주실 겁니다. 상대에도 꿇리지 않을 거고 말이죠.”
선대위원장은 생각보다 빨리 정해졌다. 한민당의 원로인 이한백이 낙점을 받았다.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김강현 후보가 인선하고 다른 위원들이 찬성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민우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여기 모인 위원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도 했고, 누군가를 추천할 만큼 정치적인 관록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대변인인데…… 대변인은 그저 말을 전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캠프의 얼굴이 될 사람이지요.”
역대 대선 캠프에서 대변인으로 활약한 사람들은 고위 공직자가 되곤 했다. 캠프의 얼굴이 될 사람이라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과거 대변인은 아나운서 출신들이 많이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대외적으로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그저 말만 잘해서는 돌발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만큼의 교양과 지식이 있어야 해낼 수 있는 자리인 셈이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김강현 의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변인은 박 위원이 맡아주셨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김강현 후보가 민우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던 민우는 흠칫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말씀입니까?”
“그래요. 박 위원이야말로 매스컴을 다루는 것에 능숙하니 말이죠. 언젠가 대선을 치르게 된다면 박 위원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위원들은 어떠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찬성의 뜻을 보였지만,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대위원장으로 막 선출된 이한백이 대표적이었다.
“글쎄요. 박 위원의 대응 능력은 높이 쳐줄 만하지만 정치적인 경험이 많이 부족한 게 아닌지 걱정이군요. 작년 우리 당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게 있긴 해도 그건 말 그대로 자문위원일 뿐이니까. 정치적 감각이 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정중하게 포장된 비판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표정의 변화 없이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자신에 대한 평가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분이잖습니까? 젊은 표를 끌어오기 좋을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투표를 잘 하지 않는데 그게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국회의원 출신을 대변인으로 앉히는 게 적당하지 않을지.”
“박 위원이야말로 개천에서 용 난 대표적 케이스가 아닙니까? 자수성가한 분이니 우리 당과 후보님의 색깔과 잘 맞습니다.”
“그래도 역시 정치 경험이…….”
토론이 계속되었다.
이런 노골적인 품평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강현에게 빚을 지울 좋은 기회였다.
‘슬슬 시작해 볼까?’
민우는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한마디 꺼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뜻밖의 개입에 살짝 놀란 위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내부가 조용해졌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서로 감정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중재하려던 김강현 후보가 흔쾌히 허락했다.
“좋습니다. 박 위원. 말씀하시죠.”
“여러분들이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압니다. 말씀하신 대로 경험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많지 않지요. 그래도 이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후보님과 함께했었고, 후보님의 비전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이죠.”
김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문득 민우와 처음 만났던 그때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비전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후보님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보님은 캠프 그 자체이니까요. 후보님이 저를 지목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김강현은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렇다면 저는, 조금 건방질지 모르겠지만 캠프의 대변인으로 한번 나서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