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좋다 (2)
새 아침이 밝았다.
민우는 오늘부터 본격적인 스케줄에 들어갔다. 오늘 하루 바쁘게 움직일 그를 위해 레아는 아침 일찍부터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어휴, 요즘 너무 춥네요.”
차에 올라타자 곧 따뜻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레아는 추위를 많이 타는 민우를 위해 출발 전부터 열선을 틀어 놓았다.
컵홀더에는 따뜻한 카페 라떼가 준비되어 있었다. 옆쪽 트레이에는 간단히 먹을 간식이 놓여 있었다.
하나같이 민우의 취향을 저격하는 것들이었다.
소소한 행복 중 하나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민우는 두 손으로 컵을 쥐고 커피를 마셨다. 조금 늦잠을 잔 덕에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쿠키도 한 봉지 깠다.
그사이 차가 출발했다.
“오늘 일정 변동은 없으시죠?”
“예. 우선 재단 사무국으로 갑시다.”
오늘은 명인대 이사장인 이태하를 만나러 간다. 민우는 교무처장 후임이 확정되기 전에 추가 재단전입금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
그냥 자리를 넘기기에는 조금 찝찝했다. 일을 벌여 놓고 수습을 하지 않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서지훈 총장은 자신이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민우는 이번 일은 본인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태하 이사장과 면담을 잡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 전화했었네요?
주예린이었다. 민우는 마시던 커피를 홀더에 내려놓고 핸드폰을 바싹 귀에 가져다 댔다.
“현장 보고하라면서? 그래서 전화했었는데.”
― 오~ 벌써 다녀왔어요?
“오늘부터는 시간 내기 어려워서 후딱 다녀왔다.”
<방랑자들> 촬영 현장 이야기였다. 주예린은 겉으로 신경 안 쓰는 척했지만, 작품 제작이 잘되고 있는지 내심 궁금해했었다.
“마침 가니까 마지막 씬 촬영하고 있더라고. 설명 듣고 배우들하고도 인사하고 왔어.”
― 어땠어요?
“내가 영화 전문가는 아니지만 느낌이 좋아. 배우들도 후회는 없다고 하고. 작품 하는 사람들이 그 정도로 말했으면 최선을 다한 거 아닐까?”
― 뭐, 그렇긴 하죠.
“이번 작품, 꼭 잘된다.”
사실 민우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한정현 감독이 클라이맥스로 설정한 장면 때문이었다.
한겨울 척박한 땅을 뚫고 푸른 싹이 트는 장면.
새로운 희망이 싹튼다는 전형적인 메타포였지만, 민우는 특별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조예가 깊어서 느껴진 게 아니다. 바로 그 푸른 싹에서, 민우의 눈에만 보이는 푸른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신비로운 푸른빛은 늘 성공을 암시했었다.
그래서 민우는 이번 영화가 한정현 감독의 소망을 성취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서 원작자인 주예린의 바람을 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 빈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성은이 망극하네요.
“고마움은 말로만 표현하지 말고 맛있는 걸로 좀 해라.”
― 좋아요. 우리 집사를 출동시키죠.
“진섭이 너무 부려먹지 말고. 참, 한정현 감독님이 묻던데? 시사회 때 한수영 교수님 초대할 거냐고.”
― 음…….
고민이 길어졌다. 민우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 아직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연락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선생님 쪽에선 먼저 연락 안 왔어?”
― 네. 아직은요.
어쩌면 한수영 교수도 주예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민우는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이 이상은 참견이었다.
“확정되면 한 감독님께 한번 연락해봐. 기다리고 계신 거 같으니까.”
― 알았어요.
“그럼 수고.”
― 아, 선배.
“응?”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민우는 피식 웃었다. 주예린이 얌전히 신년 인사를 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다.
“오냐. 너도 많이 받아라!”
* * *
재단 사무국에 도착한 민우는 바로 이사장실로 올라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태하 이사장은 별로 반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처장급 교수가 이사장을 만나러 직접 찾아오는 건 참 오랜만이군.”
잘 지냈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상투적인 인사말도 있을 텐데 굳이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실 이태하 이사장도 이렇게 냉대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만든 현실 탓이었다.
서지훈 총장이 총장협의회에서 탈퇴한 이후 새로운 협회를 설립했다. 거기에 여러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 사학 관계자들의 시선이 고울 수가 없다.
거기에 민우가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고, 다른 대학도 호응함으로 인해 대학과 재단의 이익률이 전반적으로 감소할 거라는 전망이 현실화되고 있다.
대학과 재단 관계자들은 명인대와 청문대에서 시작된 새로운 정책의 흐름이 자신이 속한 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다.
즉, 이태하 이사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각계각층의 비난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사장이나 되는데 밑에 직원 하나 다루지 못한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제가 처음은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다행입니다.”
“처음은 아니지.”
“인사도 드릴 겸해서 뵙자고 한 겁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사장님.”
“자네도.”
두 사람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턱을 괸 채 민우를 빤히 바라보던 이태하 이사장이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요즘 자네들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살 것 같단 말이지. 그나마 서지훈 총장이야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지만 자네는…….”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나야 참는다 치지만 다른 이사들이 걱정하는 것까진 막을 수 없지. 수익률이 점차 떨어지고 있으니 말이야. 게다가 요즘 일본에서도 못 잡아먹어서 안달 아닌가?”
시미즈 교수의 성명서 발표 이후 일본 열도는 충격에 휩싸였다.
성명서에 서명한 300여 명의 학자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이어졌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로 무의미한 혐한을 지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현재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도 시미즈 교수와 동료들이 용기를 낸 덕에 학계 교류는 재개된 상황이다.
극우파들에 의한 혐한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와중이지만, 민우는 타치카와 교수와 함께 근시일 내로 일본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오히려 학술 교류는 늘었으니 대학 입장에서는 나쁜 일이 아니죠. 앞으로 함께 해볼 일이 많아질 겁니다. 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태하 이사장은 뭐라 반문하려 했으나 그만두었다.
사학 관계자를 비롯한 야권 정치인들이 자네를 싫어해, 라는 말을 대놓고 할 순 없었다.
“그리고 재단 수익률은 저희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잖습니까? 저희는 좀 더 좋은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뿐이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생각은 안 하나?”
“그러다 두 마리 다 놓치면 누가 책임질까요? 기왕 서지훈 선생님을 총장으로 세웠다면 적어도 임기 중에는 신임해 주셔야 한다고 봅니다.”
“자네가 보기엔 내가 서 총장을 신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그랬다면 오늘 자네를 만나지도 않았을 거네.”
“그럼 다행이고요.”
“그래서…… 온 목적이 뭔가? 말싸움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텐데 말이지. 교무처장 임기도 얼마 안 남았다고 들었는데.”
“재단전입금 때문입니다.”
이태하 이사장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건 서 총장이 알아서 할 문제 아닌가?”
“그래도 제가 시작한 일인데 제가 마무리 짓고 인수인계하고 싶어서요. 그간 있었던 성과도 좀 설명드려야 하고요.”
“서지훈 총장이 허락했나?”
“예.”
“나머지 50억에 대한 이야기지?”
“맞습니다.”
이태하 이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거절할 명분이라도 있었다면 모질게 굴었을 텐데 명분이 없었다. 만들려면 만들 수야 있겠지만 구차해지기만 할 것이다.
실제로 명인대의 평판은 더욱 좋아지고 있다.
이미 국내 최고의 대학이었지만, 이제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도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수익률만 낮아졌을 뿐이지 다른 지표는 완전히 수직 상승했다.
“당시 100억 중 50억을 삭감하신 이유로 대학 운영 성과를 지켜본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것을 수용한 이유는 이사장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수용이라는 표현은 잘못됐네. 나의 지시였으니까. 자네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나?”
“알겠습니다. 정정하지요. 이사장님의 지시로 반년간 열심히 성과를 일궈냈습니다. 아시다시피 명인대의 교육 수준은 훨씬 좋아졌습니다. 전임 총장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질 정도로 말이죠.”
“그건 인정하네.”
“그럼 삭감된 전입금을 다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잠시 고민하던 이태하 이사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조만간 이사회에서 다시 논의해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아직 고마워하긴 이르지 않나? 부결될 가능성도 있는데?”
“이 상황에서 전입금 처리가 부결된다면 다들 진이 빠지겠지요. 성장 동력이 저하될 겁니다. 그 사실을 다른 이사님들이 모르시진 않을 겁니다.”
“지금 협박하는 겐가?”
“협박이 아니라 조언을 드리는 겁니다. 이사장님.”
민우가 한결같이 정중히 말하자 이태하 이사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너무나 당돌한 행동에 질책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요즘 한민당 쪽 분위기는 어떤가?”
“나쁘지 않습니다. 이홍주 총리가 사임한 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상황이라서 긴장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승리할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 스캔들이 끊이질 않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야. 방심하다간 한 방에 훅 가는 법.”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렵게 데려왔더니 1년 만에 휴직계를 낸 교수가 뭐가 이쁘다고 걱정을 해주나?”
이태하 이사장이 넌지시 타박했다. 민우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휴직은 길지 않을 겁니다. 선거가 끝나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야죠.”
“그게 마음대로 될까? 김강현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오히려 대학에서 더 멀어질 것 같은데 말이지.”
실제로 김강현 장관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요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혹은 청와대에서 꿈을 펼칠 기회를 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민우는 그 모든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민우도 이제 정치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런 일은 나중에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집중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이사장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때쯤이면 서지훈 총장님 임기도 거의 끝나갈 테니까요.”
“총장 선거에 나가겠다는 게야?”
“예. 물론 지금도 서지훈 선생님께서 훌륭히 운영해주시고 계시지만…… 언젠가는 제가 꿈꾸는 캠퍼스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공직은 그 이후에 받아도 늦지 않을 것 같아요.”
“최연소 총장이 나오겠군.”
“또 모르지요. 서지훈 선생님이 연임하시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지는.”
이태하 이사장은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민우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지만, 모든 사람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서지훈 총장은 민우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부디 서지훈 선생이 연임하기를 바라야겠어. 자네가 총장직을 맡는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서 말이야.”
하지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과연 민우가 꿈꾸는 이상적인 캠퍼스란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