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좋다 (1)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새해 첫날부터 내리던 눈이 이틀째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다. 서재에서 책을 읽던 민우는 잠시 쉴 겸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눈송이가 포근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때 하품을 하며 이수빈이 들어왔다.
윤아는 유치원에 가 있는 상황이라 낮잠을 잔 모양이었다.
“다음 학기부터 강의도 없는 사람이 공부하는 거예요?”
“그냥 심심해서. 근데 벌써부터 백수 취급 하는 거야? 너무하잖아.”
“그냥 해본 말이지.”
“앉아 봐.”
민우는 이수빈을 의자에 앉게 한 뒤 어깨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이수빈은 온탕에 들어간 아저씨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아, 좋다! 이런 여유.”
“당신도 며칠 좀 쉬지 그래?”
그 한마디에 이수빈이 정색했다.
“어떻게 그래요? 민재도 올해 석사논문 발표할 거고, 휴머니티 일도 한가득인데. 서재에서 한가롭게 책이나 읽는 누구와는 다르다구요.”
“뭔가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인데.”
“그렇게 느꼈다면 진짜 그럴지도?”
이수빈은 재밌다며 웃었다.
문득 이런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굉장히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기 중엔 서로 바빠서 얼굴도 보기 힘들었는데, 학기가 끝나고 민우가 휴직계를 내자 서로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졌다.
마치 대학원 석사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던 때였으니까. 새삼스레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오빠는 정말 대단하다니까? 임용된 지 1년 만에 휴직계를 내다니. 다른 교수들이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걸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
“뭐, 오빠가 더 큰 일을 하려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새로운 처장은 누구로 내정됐어요? 다들 궁금해하더라고요.”
“글쎄다.”
민우는 아직 교무과 처장직에 있다. 후임이 결정되는 대로 자리에서 내려올 예정이었다.
“홍주희 선생님이 하실 것 같던데. 잘은 모르겠어. 아직 확정된 건 아니라서.”
“홍주희 선생님이라면 믿을 만하죠.”
홍주희는 신방과 교수로 일전에 총장 후보 토론회 때 맹활약을 펼친 인물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서지훈 총장 라인에 속한 사람이었다.
최근 서지훈 총장은 지지율이 더욱 높아지자 과감한 인사를 단행했다. 처장급을 비롯한 여러 보직에 자신의 수족을 앉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역 회의가 열려도 서지훈 총장이 추진하는 일은 대부분 통과되었다.
거기에 민우가 지난 1년간 뿌렸던 씨앗이 만개하는 중이다.
역대급 투자를 유치한 의학부와 공학부는 완전히 민우의 편이 되었고, 인문학부는 물론 수학과와 물리학과를 비롯한 이학계열도 ‘기초학문 장려 정책’ 덕분에 민우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우는 서지훈 총장의 핵심 인물이다.
즉, 서지훈 총장이 대학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
“사실 당신을 추천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집에서 계속 잔소리만 들을 것 같아서 못 했어.”
“뭐라고요?”
이수빈이 기겁했다.
“절대 안 돼요! 지도하는 학생도 늘어서 큰일인데 어떻게 거기서 보직을 맡아요? 그리고 오빠도 다른 처장에 비해 나이가 어려서 애먹었는데 더 어린 내가 하면 다들 뒤에서 험담할 거예요.”
“시대가 어느 시댄데 나이를 들먹여? 능력만 있으면 그만이지.”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라서 안 됩니다.”
“이럴 땐 인정이 빠르네.”
민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빤히 노려보는 이수빈을 보고는 재빨리 웃음을 거뒀다.
“그래도 교무처장을 아무나 앉힐 수는 없어. 새로운 정책이 좀 더 예리하게 다듬어지려면 당분간은 우리 쪽 사람이 해주는 게 좋아. 재단 쪽 사람이 오면 골치 아파지거든.”
“이럴 때 강일 오빠가 전임이었다면 얼마나 좋아. 카리스마 있게 일 처리 딱딱 잘할 거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서강일은 여전히 명인대 시간강사로 활동 중이다. 아무리 민우가 힘이 있다고 해도 그를 정교수로 앉힐 수는 없었다.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서강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니까.
“전임으로 꽂아달란 이야기는 안 했어요?”
“전혀. 요즘은 뭔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어떤 생각?”
민우는 그간 스쳐 지나갔던 일들을 하나로 모아보았다.
최근 있었던 인상적인 일이 몇 가지 떠올랐다.
서강일은 ‘박민우상’ 본상 시상식에 참석해 수상자들과 접촉했다. 그리고 휴머니티의 비전을 설명하며 특강을 유치했다고 한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서강일의 과감한 행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휴머니티는 민우와 긴밀히 연결된 곳이었다. 타치카와 교수를 포함한 각 분야의 수상자들은 휴머니티의 특별 강연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휴머니티가 국경 없는 지식 단체로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박민우상’ 특별 강연을 휴머니티의 전통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대학교수라는 직업에 약간 흥미를 잃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 요즘 휴머니티 일하느라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고 있잖아. 완전히 재미들인 것 같아.”
“굳이 교수할 필요는 없다 이건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일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됐잖아. 강일이의 목표는 그냥 교수가 아니라 자대 교수였고. 장소필 선생님이 곧 정년퇴임이라고는 해도 돌아가기는 힘들 거야.”
국문과의 관례 때문이다.
정년을 마친 교수들 중 학계에 공헌한 바가 큰 사람들은 명예교수로 남게 된다. 공식적으로 교수직에서는 물러나지만 여전히 학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장소필 교수가 한일대 국문과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서강일이 돌아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장소필 교수가 물러나면서 자신의 사람으로 가득 채워 놓을 게 분명하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서강일이 교수직에 정이 떨어진 이유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굳이 이 상황에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모양새가 좀 이상하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걷냐, 아니면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개척할 것이냐. 그 문제인 것 같아.”
“강일 오빠는 이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겠네요?”
“그렇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정연주의 오피스텔에서 집들이를 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대학에서 버림받아 목표를 상실했던 서강일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보란 듯이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뭐, 앞으로 대학 일은 서지훈 선생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죠. 후임 걱정은 그만하고 캠프 일이나 잘 준비해요. 이제 오빠 차례니까.”
“그래야지.”
민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 갈 길이 멀다.
얼마 전, 김강현 의원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캠프진 구성을 발표했다.
하나같이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만 모였다. 이번엔 기필코 대선에서 승리하겠다는 김강현 의원의 다짐이 엿보이는 인선이었다.
그 와중 민우가 이름을 올리자 여론이 들썩였다.
당초 한민당의 자문위원으로 선임될 때 당 정책에 조언을 주는 입장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었는데, 이제는 좀 더 깊이 관여하게 된 것이다.
“안 그래도 다음 주부터 캠프 소집이야. 한동안 정신없을지도 몰라.”
“김 의원님, 이번에 대선에 나가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요?”
“가능성은 커. 문제는 이홍주 총리인데…….”
김강현 의원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기다렸다는 듯 이홍주 총리도 대선 출마에 대한 의지를 엿보였다. 조만간 선거를 위해 총리 사퇴를 고려하고 있다는 기사까지 뜬 상황이다.
“여권에서 단일화를 하지 못한다면 힘들게 될 것 같단 말이지. 서로 쌓인 것도 많아서 대화로 풀기도 좀 어렵다고 하시고.”
“정치는 참 어렵네.”
“정치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거든. 사람 사이에 생긴 문제가 제일 풀기 힘들잖아?”
이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부디 민우가 이번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럼 오늘은 계속 집에 있어요?”
“아니. 이따 좀 나가보려고.”
“김 의원님 만나러?”
“촬영장에 좀 가 보려고. 감독님께 신년 인사도 할 겸.”
“아, 예린이 영화?”
한정현 감독은 <프로페서> 드라마 촬영과 더불어 주예린의 원작 <방랑자들>의 제작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바쁜 것으로만 따지면 민우 못지않았다.
계획대로라면 올해 봄에 작업이 모두 완료되어 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잘 다녀와요. 난 윤아 데리고 친정에 잠시 다녀올게.”
“오케이!”
“너무 좋아한다?”
민우는 시계를 확인하는 척 딴청을 부렸다.
* * *
촬영은 경기도 파주 근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민우는 한 시간 넘게 운전해 겨우 촬영장에 도착했다.
눈이 많이 오고 있어 길이 썩 좋지 않았지만, 다음 주부터는 정말 시간을 빼기 어렵기 때문에 얼굴이라도 한번 볼 요량이었다.
“박 교수님!”
차에서 내리니 명이랑 조감독이 환하게 웃으며 민우를 맞았다.
“아니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눈이 많이 와서 길도 험한데요.”
“감독님이 얼굴 보기 힘들다고 하도 성화라서요. 잘 지내셨죠?”
“하하하. 낚이셨구나. 저야 뭐 늘 죽지 못해서 살고 있지요. 조연출의 운명이란 그런 겁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지금 잠시 쉬는 시간입니다.”
민우는 명이랑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는 커다란 별장이 있었다. 마치 추리소설 속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범죄 현장을 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쪽에는 위험천만한 덫과 각종 총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피 묻은 도끼와 잘리다 만 통나무도 보였다.
주변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세기말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회색빛 배경이었다. 거기다 눈까지 오니 분위기가 제격이었다.
“산 채로 소품이 되기 싫으면 정신 퍼뜩 차려! 마지막 컷이야! 제대로 하라고!”
한정현 감독은 목소리를 높이며 촬영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배우들이 추위에 떨면서도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감독님! 박 교수님 오셨습니다!”
“뭐?”
깜짝 놀란 한정현 감독이 민우를 발견하곤 이쪽으로 성큼성큼 뛰어왔다.
“아니 교수님! 너무 늦으셨잖아요!”
“죄송합니다. 연락도 없이 와서 방해한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안 그래도 마지막 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딱 맞춰 오셨네요.”
“주 작가가 좀 궁금해해서요.”
“그래요?”
주예린은 웬만하면 외출을 하지 않았다. 배도 많이 불렀고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였다. 이번 겨울은 꼼짝없이 집에 틀어박힌다고 한다.
“종종 연락을 드리고 있는데 설명이 좀 부족했나 봅니다.”
“원래 작가들 까다롭잖아요.”
“하하하. 박 교수님께서 말씀 좀 잘해주십시오.”
한정현 감독은 별장 주변을 돌며 촬영장을 소개했다. 폐허인 줄 알았는데 한쪽에서는 푸른 싹이 돋아나고 있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왠지 따뜻한 느낌이 들어 민우는 그 장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역시 박 교수님이라면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이 작은 텃밭이 이번 영화의 클라이맥스입니다.”
“한겨울인데 싹이 자랐네요?”
“종말에서 살아남은 두 주인공이 정착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경작한다는 내용이지요.”
“배드 엔딩은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원작은 배드 엔딩에 가깝지만, 주 작가님이 영화만큼은 꼭 해피 엔딩으로 해달라고 하셔서 말이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동토에 푸른 싹이 튼 것처럼, 한수영 교수와의 관계에서도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민우는 한동안 그 푸른 싹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