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의 일격 (5)
“박 교수님.”
민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김강현 의원이 서둘러 따라오더니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으음, 그게…… 이 총리 때문에 말이죠.”
“아, 그 일이라면 괜찮습니다. 이런 일이야 늘상 있는 일 아닙니까?”
그래도 말이 심하긴 했다. 김강현 의원의 뒷바라지나 하는 게 아니냐고 했으니까.
“혹시 그 전에 또 무슨 말을 나누셨습니까?”
“시미즈 교수 일행의 인터뷰를 취소하자고 하시더군요.”
“역시 그렇군요.”
김강현 의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분노를 간신히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반응으로 민우는 이홍주 총리가 단순한 라이벌이 아님을 직감했다.
돌연 김강현 의원이 고개를 숙였다.
“국정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실례되는 말을 한 것 같군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교수님.”
“아닙니다. 의원님이 사과하실 문제는 아니죠. 이러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민우는 김강현 의원의 팔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사과를 받더라도 그에게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번 일을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요. 조금 강압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박 교수님께만 실례한 게 아닙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의 권위를 본인이 좌지우지하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지요. 아주 오만하고 무식한 일이지요.”
“이런 일을 겪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 박민우상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한 민우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불쾌하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김강현 의원은 새삼스럽게 민우에게 감탄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이제는 모두의 것이 되었잖아요. 그러니 다른 분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겁니다. 그 방식이 다소 거칠고 못마땅해도 말이죠.”
“이런. 여기가 강의실인 줄 알았군요. 박 교수님께 한 수 배운 느낌인데요?”
“생각보다 저 멘탈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대학에서도 별의별 일이 있었으니까요.”
민우는 쿨하게 웃어 보였다.
명인대 대학원에 갓 입학해서 당했던 일들에 비하면 이런 일은 일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래서 민우가 현실이 더 소설 같다고 일침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민우에게 가장 무서운 건 서지훈 총장이나 민영환 교수 같은 지도교수들이지 고위직 공무원이 아니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직후 청와대는 물론 각종 기관에서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강의를 이유로 대통령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 민우인데 당연히 그 밑에 있는 국무총리의 갑질 정도는 아무런 데미지도 입히지 못한다.
하지만 김강현 의원이 걱정하는 것은 이 총리의 태도 문제가 아니었다.
“이 총리가 어느 당 출신인지 알고 계십니까?”
“이 총리라면…… 민중당 출신 아닙니까? 여권 통합을 위해 대통령께서 한민당이 아닌 범여권인 민중당에서 총리를 선임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제대로 알고 계시는군요.”
김강현 의원은 입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게 문제입니다. 범여권 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다 보니 오히려 그쪽에 권력이 쏠리는 일이 벌어진 거지요.”
“제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것 같군요.”
“민중당에서도 대통령 후보가 나올 겁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바로 이 총리죠.”
그 부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우의 짧은 정치적 식견으로도 범여권에서 후보가 둘 이상 나오게 되면 표가 갈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서 진보 진영이든 보수 진영이든 사전에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기도 한다.
“그럼 의원님과 경쟁하게 되는 겁니까?”
“그렇게 될 겁니다. 단일화를 하더라도 그 과정이 순탄치 않겠죠. 이 총리도 야망이 있는 사람이고, 관록도 넘치니 말이죠.”
한마디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이번 일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심스럽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런 정치적인 문제는 제가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야 지금은 한민당의 자문위원일 뿐이지 않습니까?”
민우는 대선 캠프에 합류하기로 되어있었으나 아직 대외적으로는 공표되지 않았다. 김강현 의원 쪽에서 준비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고 해도 이번 일은 민우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도움을 주고 싶어도 후보 단일화 문제 같은 것은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교수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김강현 의원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앞서 사과드린 것은 한국의 총리가 총리답지 못한 일을 해서였고…… 지금 드리는 말씀은 좀 다릅니다. 이 총리든 누구든 대선에 가까워질수록 박 교수님의 일을 방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럴 때 소신을 잃지 마시라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죠. 박 교수님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사람은 저지만, 그 일로 박 교수님이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의리 있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치인들의 겉과 속은 완전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김강현 의원과는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적어도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시잖아요. 예전에 문체부 장관으로 계실 때 말이죠. 청와대 전화도 거절한 게 저인데요.”
“하하. 맞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제가 잠시 잊고 있었군요.”
“슬슬 가실까요? 인터뷰 시작했을 것 같네요. 역사적인 순간이 될 텐데 놓치면 안 됩니다.”
민우와 김강현 의원은 나란히 걸으며 프레스룸으로 향했다.
* * *
민우와 김강현 의원은 시간 맞춰 프레스룸에 도착했다. 때마침 인터뷰가 막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시미즈 교수와 그의 동료들이 앞에 준비된 단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오늘까지 참석 여부를 밝히지 않았는데도, 단상에는 그들의 이름과 소속이 한글과 한자로 병기된 명패가 놓여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참여한 기자들은 물론,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시청자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동시통역이 가능한 전문인력이 함께 자리했다. 그들은 시미즈 교수 측의 발언을 정확히 한국어로 통역할 것이다.
거기에 한쪽에는 외교부 당국자들도 나와 있었다. 혹시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지 않을까 싶어 송승현 이사가 바로 요청한 것이다.
‘역시 이사님이야. 물 들어올 때 제대로 노 저으시네.’
민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승현 이사를 비롯한 실무진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먼저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신 지음미래재단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표로 시미즈 교수가 발언을 시작했다.
그를 비롯해 함께 온 일행들도 결사 항전을 앞둔 장수처럼 비장한 표정이었다.
「먼저 인류 문명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은 지음미래재단과 센트럴 북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와 축하 인사를 전합니다.」
찰칵! 찰칵찰칵!
본론으로 들어가자 기자들의 손이 더욱 바빠졌다.
여기에서 분위기가 극명하게 나뉘었다. 한국 기자들은 흥미로운 표정이었지만, 일본 기자들은 굴욕적인 표정이었다.
일본인 그 누구도 ‘박민우상’ 제정에 축하 인사를 건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희는 일본 지식인 대표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희를 비롯하여 300여 명의 학자와 문인, 기타 문화계 종사자들이 참여한 성명서를 발표하겠습니다.」
시미즈 교수가 준비한 자료를 꺼냈다. 무수히 터지는 플래시 속에서 자료가 정체를 드러냈다. 일본 지식인들의 성명서였다.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시미즈 교수는 준비한 성명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를 비롯한 각종 기관 및 단체에서는 ‘박민우상’의 의미를 폄하하지 않아야 한다. 비난을 멈추고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또한, 과거사를 인정하고 반성하여 동아시아 평화에 일조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그 어떤 권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시미즈 교수의 낭독이 이어질 때마다 기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일본 지식인, 그것도 3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낸 성명서가 한국의 심장, 서울에서 낭독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인터뷰는 생중계로 방송되고 있었다.
때문에 대중들의 반응이 댓글의 형태로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일본을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하려는 일본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이 정도로 뭔가 극적으로 변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결국 웃으며 긍정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시미즈 교수는 동료들과 함께 위험한 모험을 시작했다. 명예와 지위를 걸고, 지식인들의 성명서를 들고 한국에 왔다. 이제는 민우가 보답할 차례였다.
‘보류했던 일정도 다시 짜보고, 타치카와 교수님하고 한번 방문해야겠어.’
민우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년 일정을 그려보았다.
* * *
인터뷰가 끝나고 참석자들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민우는 시미즈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를 찾았다.
성명서 낭독의 여파 때문일까. 시미즈 교수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시미즈 교수님.」
민우가 다가오자 시미즈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조금 지쳤는지 시미즈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오늘 말씀을 너무 많이 하신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시미즈 교수는 인자하게 웃었다. 후회는 없어 보였다.
프레스룸에서 성명서 낭독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짓궂은 질문도 많았지만 시미즈 교수는 그 모든 질문을 겸허히 수용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게 대답했다.
오히려 일본 기자들은 침묵했다.
시미즈 교수는 성명서에서 매스컴에 대한 경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진실을 왜곡하고 불필요한 오해와 질투를 야기하는 언론에 일침을 가했다.
그 상황에서 시미즈 교수의 행동을 지적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격이었다.
「아직 힘든 일은 시작도 안 했지요. 일본으로 돌아가 뒷일을 정리해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견뎌야지요. 폭풍이 지나가면 해가 뜨지 않겠습니까? 그게 걱정됐다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겠지요.」
맞는 말이었다. 조만간 일본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바랐다.
「내년엔 타치카와 교수와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특별 강연도 열고, 저희 쪽 단체와 학술 교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해 보시죠.」
「아아,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박 선생.」
시미즈 교수의 미소에서 민우는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