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63화 (463/500)

회심의 일격 (4)

기자들이 소란을 떨 만했다.

시미즈 유이토 교수는 동경대의 문학부의 원로 교수다. 또한 일본 문학계의 대부이기도 하다. 30년 이상 변함없이 청렴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박민우상 시상식에 나타났다는 것은 말 그대로 특종이었다.

지금까지 일본 매스컴에서는 박민우상을 폄하하기에 바빴으니까.

좀 더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축복하기 위해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기자들에게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의외네. 시미즈 교수가 여기까지 올 줄은. 네가 초청했냐?”

서지훈 총장이 물었다.

타치카와 교수가 박민우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바로 그날, 민우는 시미즈 교수에게 초청 서한을 보냈다.

시미즈 교수는 초청장을 잘 받았다고 답신했다. 하지만 참석 여부는 말하지 않았었다.

“전에 초대장을 보내긴 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실 줄은 몰랐네요.”

“네가 가봐야 할 거 같은데?”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시미즈 교수는 왜 갑자기 이곳에 온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미즈 교수 일행은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할 테니까.

아무리 일본에 억하심정이 있다고 해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민우는 출입문 쪽으로 달렸다.

마침 한발 먼저 나타난 송승현 이사가 현장을 정리했다.

“다들 물러 서주세요. 취재는 이따 프레스룸에서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행사 전이니 질서를 지켜주세요.”

“질문 몇 개만 좀 하겠습니다!”

“아예 질문 못 하고 싶어요? 협조하지 않으면 퇴장시키겠습니다. 어디에서 오신 기자분이죠?”

서슬 퍼런 송승현 이사의 일침에 기자들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직원들이 재빨리 주변을 통제했고, 민우는 멀리서 온 손님을 맞이할 수 있었다.

「시미즈 교수님.」

「박 선생.」

그제야 시미즈 교수가 웃었다. 여러 감정이 섞인 미소였다. 민우는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시기까지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단순히 거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출국 직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렸을 것이다. 굳이 가야 하냐고. 가더라도 쓴소리를 아끼지 말라고.

물론 시미즈 교수는 쓴소리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편하게 왔습니다. 참, 같이 온 분들을 소개해 드리죠.」

시미즈 교수는 함께 온 학자들을 소개해 주었다. 모두 일본 명문대의 문학부 교수들이었다. 이들이 일본 문학계를 대표한다고도 말했다.

민우는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악수를 청했다.

생각지 못한 환대에 감동했는지 일본인 학자들은 두 손으로 민우의 손을 잡았다.

「제가 온 이유는 선생께서도 짐작하고 계시겠지요.」

「어찌 교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부디 좋은 일이기를 바랄 뿐이지요.」

「오늘 우리는 일본 문학계를 대표하여 성명을 발표할 겁니다. 우리 말고도 많은 선생들의 의견을 모아왔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학문적 성과를 축하하고, 좀 더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겁니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민우가 정중히 물었고, 시미즈 교수는 굳게 결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우리는 일본 매스컴에 생산적이지 못한 비난과 혐오를 멈추라고 요구할 계획입니다. 시상식이 끝나면 바로 기자회견을 열고 싶군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공식 기자회견 전에 교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양해해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민우는 비행기를 타고 이곳까지 온 시미즈 교수와 동료들의 용기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일찍 손을 썼어야 했는데, 박 선생께는 그저 미안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늦더라도 일이 바로잡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시미즈 교수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시미즈 교수 일행을 앞 좌석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한차례 소란이 끝나고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민우의 이름 세 글자가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학술사에 길이 남게 된 순간이었다.

* * *

본식이 시작되기 전, 송승현 이사와 제임스 사장이 순서대로 축사를 했다. 그리고 민우도 마이크를 잡고 짧게 한마디 했다.

“여러분들도 다들 아시다시피 이 상은 인류의 지혜와 지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네요. 단순히 기술의 발전만이 아니라,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 또한 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민우는 앞 좌석에 자리한 시미즈 교수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민우는 그들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그 실수를 되짚어보고 진심으로 반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주 극소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그 용기를 가진 분들을 만났습니다. 이 자리를 빛내주신 그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민우는 우렁찬 박수를 온몸으로 느끼며 무대를 내려왔다.

가장 먼저 문학 부문 시상이 진행되었다.

오늘의 주인공, 타치카와 교수는 차분히 연단에 올랐다.

굳이 그를 소개하는 영상을 내보낼 필요는 없었다.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일 테니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축하합니다. 타치카와 씨!」

제임스 사장이 미네르바의 트로피를 직접 건넸다. 메달까지 목에 건 그는 이제야 비로소 영예로운 상과 함께 연구비 10억 원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앞자리에 있던 시미즈 교수가 연단에 올랐다.

그의 손엔 소박한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찰칵! 찰칵찰칵!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졌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일본의 여론은 타치카와 교수가 박민우 문학상을 거절하라 요구했다. 하지만 지금 일본 문학계의 대부가 축하하고 있다.

이 기념비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기자들이 일제히 취재 경쟁을 벌였다.

반면 소수의 일본 측 기자들은 영 불편한 표정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 정도 사건이라면 1보로 보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시미즈 교수는 타치카와 교수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간 고생 많았네. 타치카와 선생.」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까지 와 주시고…….」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야 나설 수 있게 됐네.」

「괜찮으신 겁니까?」

시미즈 교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무대에서 내려갔다. 타치카와 교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앞으로 나서 소감을 말했다.

「이렇게 귀한 상을 받을 정도로 제가 한 연구들이 의미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말입니다.」

타치카와 교수는 목이 메었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 심호흡하고 다시 마이크를 가까이 댔다.

한쪽에서 타치카와 교수를 지켜보고 있던 그의 아내와 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저는 이 상을 받은 것보다…… 제 연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 더욱 기쁩니다. 지금까지 신념을 잃지 않고 했던 일이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기분입니다. 한 사람의 평범한 학자로서 정말 기쁘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많습니다.」

타치카와 교수는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운을 뗐다.

「저의 조국에 대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영토 분쟁을 해결할 만한 많은 사료와 연구물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외교적 문제로 확대하고 있지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을요.」

작정하고 올라온 것 같았다. 마지막 발언이 일본 본토에 전해진다면 어떨까.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것 같다.

「그 밖에도 반성해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 경제 규모가 크다고 해서 선진국이라 말하는 것은 이제 낡은 방식입니다. 저는 제 조국이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연구물로서 설득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담담히 소감을 마친 타치카와 교수가 꾸벅 인사했다. 이미 그의 소감은 실시간으로 번역되고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민우는 힘차게 손뼉을 치며 그의 미래를 응원했다.

* * *

시상식이 모두 끝나고 기자회견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스룸으로 움직이려고 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수행비서를 둘이나 거느린 사람이었다.

민우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이홍주 국무총리.

원래 박민우 문학상 시상식에 대통령을 초청하려고 했지만, 의전 및 경호 문제가 있어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했다.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 교수.”

“아닙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격을 높이는 일에 총리가 빠질 수야 있나.”

이홍주 국무총리는 농담을 꺼낼 정도로 평소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정치권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5선 의원 출신이다.

다만 그는 범여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간혹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표적인 ‘지일파’이기도 했다.

“그런데 좀 우려스럽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듣자 하니 시미즈 교수 일행의 기자회견이 준비되었다던데…… 사실입니까?”

민우는 그 질문의 저의를 바로 눈치챘다.

이번 인터뷰가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사실입니다. 성명서를 준비해 오신 것 같더군요.”

“취소합시다.”

국무총리의 말에 민우가 멈칫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엇을 취소하라는 말씀이신지요?”

“인터뷰 말입니다. 다른 곳에서 하라고 하세요. 박민우상은 국제 학술상입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런 이유가 있다고 말했지만, 그 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강사법 관련 정책도 아마 포함되어 있겠지.

그때 분위기를 눈치챈 김강현 의원이 다가왔다. 둘은 대표적인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김강현 의원이 나설 기회를 주지 않았다.

“총리님. 정치도 학문의 일부입니다. 정치적인 목적도 목적 나름이지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취하고 불리한 것을 배척하는 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정치도 학문의 일부라…… 그래서 박 교수가 김 의원의 뒷바라지나 하고 있는 거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민우는 불쾌했지만 표정 관리를 철저히 했다.

“뒷바라지라고 생각하시면 그건 진짜 정치가 아닐 겁니다. 진짜 정치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거죠.”

“그런 정치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정치겠지.”

“요즘은 소설보다 현실이 더 소설 같을 때가 많더라고요.”

담담히 웃은 민우는 그를 지나쳐 프레스룸으로 향했다.

못마땅한 눈으로 민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홍주 총리는 김강현 의원이 다가오려 하자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빤히 노려보던 김강현 의원은 서둘러 민우의 뒤를 따라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