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61화 (461/500)

회심의 일격 (2)

모르는 번호로 온 낯선 전화였다.

그래서 타치카와 교수는 섣불리 통화 버튼을 터치하지 못했다.

그의 과거사 때문이다.

일본에 있던 시절, 그는 무수히 많은 음해세력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살려주지 않겠다는 폭언은 예삿일이고, 심지어 가족들까지 협박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민우를 만나 한국으로 떠나온 지도 이제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상황.

그래서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민우와 눈이 마주쳤다.

왜인지 모르게 민우는 웃고 있었다. 손에 든 전화기는 계속 진동하는 상황.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전화가 무슨 전화인지 아는 사람처럼.

민우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그였다. 그래서 타치카와는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타치카와입니다.」

타치카와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친절한 음성에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는 한마디가 전해졌던 것이다.

「제가…… 박민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고요? 아니, 장난 전화 아닙니까? 제가 어떻게…….」

타치카와는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그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몇 번의 질문이 오간 끝에, 타치카와는 자신이 박민우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마친 그는 한동안 자리에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박 선생님.」

「수상 축하드립니다. 그간 고생 많으셨네요.」

「…….」

수상을 축하한다는 한마디보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는 뒷말이 묵직하게 마음을 때렸다. 타치카와는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그간 있었던 불합리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무력하게 두 손을 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민우를 만나지도 못했을 거고, 이런 기회를 잡지 못했을 거다.

「제가…… 제가 이렇게 큰 상을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받으셔도 됩니다. 타치카와 선생께서는 충분히 자격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첫 번째 수상자는 한국인 중에서 나와야 하는 게 아닙니까?」

「설마 그 말씀을 아까 통화할 때도 하신 건 아니겠죠?」

민우가 웃으며 물었고, 타치카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통화에서 말하진 않았지만, 왠지 부끄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큰 상을 수상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조건은 그 사람이 우수한 결과물을 내놓았는가죠. 다른 하나는 바로 이겁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타치카와 교수께서는 학문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타치카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상태로 민우가 말을 이었다.

「이 모든 부분에서 타치카와 선생은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선생의 독도와 한일관계 연구는 한국인들에게 자신감을, 그리고 세계인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게 되었지요.」

「박 선생님…….」

「의문을 품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문학상 수상위원회의 결정이니까요. 타치카와 선생을 수상자로 선정하는 것에 조금의 이견도 없었습니다.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죠.」

민우는 뒤쪽에서 궁금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세드릭에게 프랑스어로 이 소식을 전했다. 타치카와가 박민우상을 수상하게 됐다고.

세드릭은 타치카와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한번 포옹해 주었다.

이번에 수학 부문에서는 세드릭이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민우는 가까운 미래에 그의 수상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관계가 좋지 않은데, 이 소식이 알려진다면 시끄러워지는 거 아니오?」

세드릭은 이제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정통하게 되었다. 타치카와 교수와 친하게 지낸 덕분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우리가 아닐 겁니다. 아마 일본 언론이겠죠.」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한 일을 처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군.」

세드릭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민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편히 앉았다.

「오늘 저녁에 다들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가셔서 저녁 식사나 하시죠. 제 와이프가 축하 인사 겸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합니다.」

「좋소.」

「그렇다면 꼭 가겠습니다. 이수빈 선생께는 미리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수상자들에게 개별 연락이 모두 끝난 다음 날.

‘박민우상’의 부문별 수상자 리스트가 재단 홈페이지에 공개되었다. 동시에 모든 언론사에서는 수상자의 업적을 대서특필했다.

문학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이견이 나오지 않았다. 비교적 균형 잡힌 수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박민우 물리학상 수상자에 한국인이 선정되자 국내 여론은 물론 외국 언론사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간 아쉽게도 노벨물리학상 수상 직전에 미끄러진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 부문은 그 관심 자체가 달랐다.

일본인이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에 모든 언론이 흥분하며 떡밥을 물었던 것이다.

김강현 의원은 민우를 따로 불러 첫 상은 한국인으로 선정해야 뒤탈이 없다고 조언을 했었다. 이미 수상자가 일본인으로 결정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 제1회 박민우상 문학 부문 수상자 일본인 내정

― ‘친한파’ 타치카와 유지 교수는 누구인가?

―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학술적으로 밝힌 유일한 일본인 학자

― 전문가들 ‘타치카와 교수의 박민우상 수상은 시의적절한 것’이라 밝혀……

적어도 언론 반응은 김강현 의원이 우려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언론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인용하며 적절한 수상이라 평가했다.

특히 박윤지 기자가 속한 경한신문은 이번 문학상에 관한 긍정적인 기사를 가장 많이 쏟아냈다.

전에 민우가 세드릭 교수와 만났던 이야기를 기고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번 특종에 박윤지 기자가 전면에 나섰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박윤지 기자는 그간 받았던 특혜를 톡톡히 갚았다.

일각에서 경한신문이 박민우 교수의 개인지인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포털 뉴스를 쭉 훑어본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네. 반발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해.’

당연히 문화예술계 쪽에서는 아쉬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첫 상은 한국인에게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다소 민족주의적인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민우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재단 입장에서 적극적인 변호는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괜히 설명해봐야 꼬투리만 잡힐 거야. 그들도 상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만약 ‘박민우상’이 제정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들은 ‘나도 상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품지 못했을 것이다.

민우는 그들이 불만을 토로하기보다는 미래를 준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민우상’은 1회 수상으로 끝나는 그런 인스턴트한 상이 아니었으니까.

‘아니면 문화예술상을 따로 분리해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지금 문학상은 학술과 예술이 합쳐져 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래도 수상 기회가 절반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민우는 이 문제를 송승현 이사와 제임스 사장과 한번 논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상식이 끝나면 그간 언론 반응과 전문가 평가를 취합하여 피드백 회의를 하게 된다. 그때 이야기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일본 쪽 반응을 좀 살펴볼까?’

민우는 일본의 대표적인 포털사이트로 접속해 뉴스를 뒤져보았다.

역시나 엄청난 혹평이 쏟아졌다.

― 엉터리 수상 파문! ‘박민우상’ 문학 부문에 타치카와 유지 교수 선정

― 야나가와 문부성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들의 무대’ 일침

― 한국의 폭주는 어디까지인가? 국제 학술 생태계를 망치는 외래종

― 큰 상에 대한 경험의 부재가 주원인으로 밝혀져

자극적인 카피가 메인 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소설을 쓰는구나.’

그들의 말이 완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일본 언론은 소량의 팩트와 다량의 허구를 섞어 기사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큰 상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해서 연구 역량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큰 상을 받는 것엔 다소의 운도 필요한 법이니까.

‘학계 반응은 아직 없는 건가?’

민우는 기사를 더 찾아보았지만 일본 학계 반응은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그들이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시미즈 교수님이라면 뭔가 다른 반응을 보여줄 것 같았는데.’

일전에 타치카와 교수를 만나고 난 이후, 동경대의 시미즈 교수가 숙소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민우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이리저리 휘둘리고 침묵하는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해 봐야 배울 게 없을 것 같다고. 그래서 교류를 잠시 끊은 거라고.

그리고 그때 진솔하게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 시미즈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타치카와 교수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가 나올 거라고.

그래서 민우는 그가 ‘박민우상’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추측했었다.

‘좀 더 기다려보자. 뭔가 입장 발표가 나오겠지.’

이미 일본을 향해 낚싯대를 드리운 상황이다. 물고기가 걸릴지 아닐지는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민우는 브라우저를 끄고 컴퓨터를 종료했다. 지금은 물이 한창 들어오는 상황. 노를 젓기 위해 교무과 사무실로 향했다.

* * *

“변호영 과장님. 잠시 저 좀 보실까요?”

“네.”

변호영 과장이 재빨리 일어나 처장실로 들어왔다. 민우는 소파에 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박민우상 관련해서는 들으셨죠?”

“아, 예. 타치카와 교수님께서 상을 받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비단 타치카와 선생만의 기념할 일이 아니라 우리 대학도 기념할 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 한마디만 했는데도 변호영 과장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수상을 축하하는 플랜카드를 걸고 홈페이지에도 팝업 배너를 띄우겠습니다. 거기에 기념 특강을 주최하면 좋겠네요. 대상은 일반인으로 확대하는 게 좋겠지요?”

“역시 과장님이시네요. 처장은 제가 아니라 과장님께서 하셔야겠는데요?”

“하하하하.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그런데 따로 보도자료를 준비해야 할까요?”

“아뇨. 보도자료까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서는 것보다 타치카와 선생께서 직접 인터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프레스룸 정도만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미 타치카와 교수에게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대응 요령을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변호영 과장이 나가자 민우는 바로 전화를 걸어 타치카와에게 프레스룸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면 된다고 말했다.

― 인터뷰는 언제쯤 하면 좋습니까?

“수상 직후 하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상을 받기 전에 하는 건 좀 모양새가 좋지 않죠. 괜히 일본 쪽에 소재만 던져주는 꼴이니까요.”

―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 참, 이번에 저희 안사람이 교수님 가족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박민우상’ 수상 전화를 받았던 그 날 밤, 타치카와 교수의 가족은 민우의 집에서 맛있게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보답을 하려는 거다.

“와이프가 좋아하겠네요. 좋습니다. 초대해 주시면 가야지요.”

― 그럼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의자를 살짝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낙엽이 지고 뼈만 앙상히 남은 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곧 눈이 내리고 눈꽃이 피겠지.

민우는 더 멀리, 푸른 하늘로 시선을 던지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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