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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460화 (460/500)

회심의 일격 (1)

세드릭이 명인대에 자리를 잡자 한동안 이슈가 계속되었다.

일각에서는 ‘낭비’라는 키워드로 우려스러운 논평을 냈지만, 대부분은 명인대의 영입을 높게 평가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보통 해외 인사 초빙은 응용과학 분야에서 많이 이루어지곤 하는데 이번에 명인대는 수학, 즉 기초과학 분야의 인재를 초빙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IT 강국이라고 평가받지만 기초과학의 성과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오죽하면 옆 나라 일본에서 한국은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며 무시할까.

그 원인을 따지자면 무수히 많다.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 시스템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고, 대학 교육이 취업 위주로 돌아간다는 의견도 많다. 또한 대학의 기업화도 빼놓을 수 없다.

한마디로 학자다운 학자가 나올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민우는 그 부분에서는 동감했다.

입시와 취업이라는 목표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목표 아래에서는 한계가 명백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민우라고 해서 그 원인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전력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원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다. 대학교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당에서 자문위원으로 일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요.”

이곳은 한민당 당사의 회의실.

민우는 김강현 의원과 독대하는 중이었다. 세드릭의 초빙을 성공시켰다는 기사를 보자마자 김강현 의원이 그를 불렀다.

김강현은 민우의 말에 감화된 표정이었다.

손뼉까지 치며 호응할 정도였다.

“그럼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응당 그러셔야지요. 이런 표현이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박 교수께선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분이기도 하니까요. 나랏일에선 말이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실 분입니다.”

“너무 기대가 크신 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이번 일은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요. 운도 실력입니다.”

민우는 편히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차기 대선을 준비하고 있는 김강현 의원이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누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뭔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이번에 경한신문에 세드릭 교수와 만나게 된 풀스토리가 실리지 않았습니까? 정말 박 교수님의 행동력이 감탄했습니다. 마치 20세기 초의 대학가를 보는 것 같았어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느껴지더군요. 마음과 마음이 오간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세드릭의 임용을 확정 지은 민우는 그와 의논해 직접 경한신문에 기고했다. 세드릭을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기록한 원고였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려는 목적의 기사가 아니었다.

민우가 보고 느낀 학자로서의 삶을 그대로 집약했다.

세드릭이 왜 은거하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부당한 행위는 더 이상 반복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건전한 학계를 만들기 위해 우리들이 해야 할 일도 짤막하게 기술했다.

대중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학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정말 잘해주셨습니다. 우리 대학계도 조금 더 각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지요. 의원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럼요. 그래야지요.”

“제가 다녀오는 사이 별일 없으셨지요? 경황이 없어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아, 아닙니다. 선물은 무슨! 괜히 그런 거 주고받아 봐야 기자들에게 먹잇감만 던져주는 거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이제 슬슬 근황 이야기가 끝나 민우가 슬쩍 떠봤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갑자기 보자고 하셔서 좀 긴장하고 있었는데요.”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별일은 아니니까요.”

“별일은 아니라는 말씀은 뭔가 일이 있긴 한 거군요.”

“역시 국문과 교수님이십니다. 하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린 김강현 의원이 본론을 꺼냈다.

“그 있잖습니까. 박민우상. 그거에 대해 좀 여쭤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는 통화로 하기에는 좀 그래서…….”

“예. 말씀하시지요.”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 듣기로는 박민우상 문학 부문에 일본인이 선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민우는 표정 관리에 집중했다.

김강현 의원의 눈꼬리가 매섭게 좁혀졌다. 이 정도 관록이 있는 국회의원이라면 사람의 표정만 봐도 속내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민우도 만만찮은 사람이었다.

“아시다시피 선정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비밀이라서요.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하네요.”

“으음, 그렇군요. 수상자가 정해지긴 한 겁니까?”

“거의 정해졌다고 보셔도 됩니다. 후보 선정은 끝났고 이제 최종 선정만 남았으니까요.”

민우가 조금 곤란하다는 듯 설명했으나, 김강현 의원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가 몸을 좀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비밀인 건 알지만 저에게만이라도 살짝 귀띔해주시는 건 어떨지…… 아무래도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준비해야 해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건 의원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원칙의 문제죠.”

“힌트라도 주면 안 됩니까?”

“죄송합니다.”

민우가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단호할 줄은 몰랐다.

“이것 참. 난감하군요.”

김강현 의원은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이것으로 민우에게 빚을 하나 지웠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물론 그 빚을 가지고 민우를 압박하거나 괴롭히지는 않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손에 든 패가 많을수록 유리하다.

“문제는 문화예술계나 학술계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전에 문체부 장관을 하기도 했었고, 후임들이 그쪽으로 나가 있다 보니 들려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떤 이야기입니까?”

“아무래도 상징성이 있는 상인 만큼 가능하면 첫 번째 수상자가 우리나라에서 나와야 한다는 거지요. 다른 건 몰라도 문학상만큼은 말이죠.”

한국 문학은 국제상과 인연이 별로 없다.

노벨문학상이 대표적이다. 민우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인은 한 명도 없다. 한국인의 노벨문학상 수상 회수는 단 1회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만약 해외에서 수상자가 나오게 된다면 내부 반발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특히나 첫 번째 수상자가 일본인이라면…….”

김강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장면이 떠올랐다.

원래도 일본에 적대감이 많지만, 2019년 발생한 수출규제로 인해 한일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그래서 김강현 의원의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민우는 자신 있게 웃었다.

“의원님.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박민우상 문학 부문 수상은 걸작을 써낸 작가들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텍스트로 쓰인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하죠. 그래서 학술적 성취가 훌륭한 연구자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렇지 않더라도 저는 우리 문학이 일본 문학에 비해 뒤처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죠.”

“으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이런 논쟁이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네요. 첫 상을 누가 받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주최국으로서 어떻게 이 기회를 살려야 하는가에 있다고 봅니다.”

김강현 의원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뭔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시는군요.”

“그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이제 수상자 발표까진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다들 깜짝 놀라시지 않을까요?”

11월도 곧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제 한 달만 지나면 박민우상의 주인공들이 분야별로 발표될 것이다.

김강현 의원이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제가 졌습니다. 하하, 역시 박 교수님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군요.”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닙니다. 박 교수님도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언제나 우리를 놀래키는 분 아니십니까?”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기대하고 있지요.”

* *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세드릭은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했다. 적응한 게 아니라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는 사이 민우가 그의 연구소에 들렀다.

「오, 프로페서.」

민우가 들어오자 대형 칠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세드릭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방해한 것 같네요. 미안해요.」

「아니. 하루아침에 풀릴 방정식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고생하지도 않았지.」

세드릭은 어깨를 으쓱하며 펜을 칠판에 놓았다. 그리고 민우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한쪽에서는 명인대 수학과 대학원생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었다. 수학과 박사과정생들이었는데, 마치 학회에 참석한 것처럼 진지했다.

세드릭은 부임 조건으로 자신만의 전용 연구소를 받았지만 그 연구소를 개인적인 목적으로만 활용하진 않았다.

지금 세미나 중인 박사과정생들이 좋은 예다. 그들은 별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연구소는 세드릭이 세기의 난제를 해결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박사과정생들이 훌륭한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그 모든 지도과정을 세드릭이 맡는 중이다.

「이렇게 지도를 잘하시는 거라면 학부 수업도 하셔도 되지 않았을까요?」

「끔찍한 소리를 하는군. 학부 수업과 대학원 지도는 차원이 다른 문제야. 나는 귀찮고 번거로워서 학부 수업을 맡지 않은 게 아니네. 다만 그쪽에 재능이 없었을 뿐이지.」

「미리 말씀드리지만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지나치게 겸손하다고 손가락질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쩔 수 없는 거고.」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타치카와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수학과 연구소에 인문대 교수가 앉아 뭔가를 보고 있으니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타치카와 교수님은 오늘도 열심히 하시네요.」

「참 대단한 사람이야. 가르쳐 주는 것을 스펀지처럼 쑥쑥 빨아들이더군.」

「그래요?」

여기엔 사연이 좀 있다.

유럽 순방을 마치고 난 이후 민우는 타치카와 교수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었다. 민우가 일본어도 곧잘 해서 가능했다.

그러다 어느 날 타치카와 교수는 민우를 통해 세드릭과 인연을 트게 됐는데, 그때 배운 프랑스어를 조금 써먹게 되었다.

그 이후로 타치카와 교수는 프랑스어에 푹 빠졌다.

마치 다른 전공을 찾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민우가 보직 때문에 바빠 매번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세드릭과 회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무료하지 않아서 좋아. 이 머나먼 이국에 친구가 생긴 느낌이라고 할까?」

그렇게 말한 세드릭은 피식 웃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었다.

모든 게 달랐다.

타치카와는 결혼을 해 가족이 있었고, 세드릭은 독신이었다. 대학에서 배운 것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금방 친해졌다. 오히려 전혀 다르기 때문에 호기심에 이끌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행이네요. 친하게 지내시는 것 같아서 저도 좀 마음이 놓입니다. 두 분 모두 조국을 떠나서 오신 거잖아요.」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고 있었군.」

「그 정도는 아니고요.」

「그런데 무슨 일로? 타치카와 교수에게 용건이 있나?」

민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타치카와 교수가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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