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59화 (459/500)

천재 수학자의 결심 (4)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전화해 보죠.」

굳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는 학계를 떠난 것에 회의감을 품었고, 민우에게 여전히 명인대로 부임하기를 바라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지금 세드릭은 교수 자리를 놓고 협의를 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민우는 즉시 전화를 걸었다.

저녁 7시가 지나 있었다. 서지훈 총장은 이미 퇴근하고 없겠지만, 지금 이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서지훈 총장은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잠시 통화 가능하십니까?”

― 괜찮아. 세드릭 씨 벌써 숙소로 돌아가신 거냐?

“아뇨. 아직 같이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지금 세드릭 씨가 선생님을 좀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언제 미팅을 잡으면 좋을지 여쭤보려고요.”

― 지금 모셔와. 나 총장실에 있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지금요?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 네가 전화하길 기다리고 있었지.

품위 있는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렸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민우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서지훈 총장은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기다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굳이 말을 늘릴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모시고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우는 그 소식을 세드릭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가지. 안내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그의 굳은 결의가 피부로 느껴졌다. 새삼스레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카치의 유물에 담겨 있던 신비로운 힘의 능력을.

두 사람은 곧 총장실에 도착했다.

* * *

「처음 인사드리는군요. 갑작스레 뵙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세드릭은 영어를 사용했다. 느낌도 상당히 정중해졌다. 프랑스어는 몰라도 영어라면 서지훈 총장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했다.

「아닙니다.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지요.」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세드릭 씨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박민우 선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확신하거든요.」

세드릭의 시선이 민우를 향했다.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민우는 겸손히 웃었다.

「제자를 참 잘 두셨더군요.」

「자주 듣는 이야깁니다. 앉으실까요?」

세 사람이 소파에 자리했다. 민우는 서지훈 총장과 나란히 앉았고, 세드릭은 홀로 앉았다.

세드릭은 뜸을 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박민우 교수는 제가 명인대에 부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뜻에 부응하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별로 놀라질 않으시는군요.」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박 교수는 순진해 보일지는 몰라도, 일단 한번 물면 절대 놓치지 않는 근성을 지녔거든요. 결국 세드릭 씨도 두 손을 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이죠.」

「그 제자의 그 스승이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하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세드릭은 깍지 낀 손의 엄지를 슥슥 비비며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우리는 세드릭 씨를 모셔오기 위해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았습니다. 어떤 의견을 주셔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우선 강의에 대한 문제입니다. 한국 대학에서도 정교수들은 일 년에 강의해야 하는 시수가 정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 교수에게 얼핏 듣기로 강사법 시행 이후로 더욱 타이트해졌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죠. 부담되신다면 얼마든지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

「시수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처음 몇 년 정도는 박사과정 학생들만 가르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서지훈 총장이 민우를 바라보며 의견을 물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수학과 쪽의 의견을 들어야 합니다. 총장 직권으로도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세드릭 씨의 원만한 연구 활동을 위해 절차를 지키려는 것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세드릭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히려 신중하게 나서고 있는 서지훈 총장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원리원칙을 따져 합리적인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니까.

이런 사람이 수장으로 있는 대학이라면 적어도 어이없는 일로 골치 아플 일은 없겠다 싶었다.

「세드릭 씨. 제가 역으로 하나 제안해도 괜찮겠습니까?」

민우가 조심스레 나섰고, 세드릭이 귀를 기울였다.

「박사과정 수업만 하시려는 의도는 알겠습니다. 기초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고차원의 이론을 잘 가르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학부생들의 가능성도 타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음, 그렇지요. 결국은 그들이 성장해서 대학원생이 되는 거니까.」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오픈 클래스를 열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수학과 학생만이 아니라?」

「예. 명인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특강입니다.」

세드릭이 팔짱을 끼며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우의 저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민우가 설명했다.

「세드릭 씨의 특강을 듣고 싶어서 따로 저에게 부탁했던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기중엔 공대생도 있었고 의대생도 있었죠.」

「흥미롭군요.」

「세드릭 씨의 행적이 이미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요청을 무시하는 것은 좀 잔인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세드릭 씨보다 뛰어난 학생들이 나올 수도 있는 거고 말이죠.」

「박 교수 당신처럼 말입니까?」

「하하하. 아닙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세드릭은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한 학기에 한 번 특강을 진행하는 것으로 하지요.」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보가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박 교수께서 짚어주신 덕이죠.」

만족스럽게 웃은 민우는 한발 물러섰고, 서지훈 총장과 세드릭의 협상이 계속되었다.

「두 번째로 전용 연구소를 원합니다. 저는 다른 연구는 하지 않고 오로지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일 겁니다.」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이라면…….」

서지훈 총장은 생각에 잠겼다. 그도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이 수학은 물론 여러 응용과학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쓰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세드릭 씨의 이름은 인류 문명사에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이름을 날리는 것엔 관심 없습니다. 다만 제 연구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역시 확고하시군요. 의견은 잘 알았습니다. 존경심이 샘 솟는군요. 그 제안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전용 연구실 설치와 연구조교 배정을 지원하지요.」

「그럼 이제 마지막 조건입니다.」

앞선 두 조건은 민우 선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것이었다. 아마 그가 제시하려는 세 번째 조건은 쉽게 들어줄 수 없는 것이리라.

「명인대 교수로서의 모든 의무에서 자유로웠으면 합니다. 오로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세드릭도 조심스럽게 꺼냈다.

사립대학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서지훈 총장은 앞선 제안에서 편의를 많이 봐줬다. 강사법 시행 이후, 전임교원들의 책임 강의 시수가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세드릭의 강의 시수와 강의 대상을 조정하게 되면 반발이 있을 게 뻔했다.

게다가 교수의 의무가 강의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각종 행사 참석은 물론, 학부생들의 취업 지도와 대학원생 논문 지도까지 여러 문제가 걸려 있다.

세드릭은 그 모든 것을 인지한 채로 세 번째 제안까지 온 것이다.

「말 그대로 연구에 올인하겠다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저는 박민우 교수처럼 할 자신은 없습니다. 박민우 교수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요. 용기도 있고요. 겁도 없이 우리 식당으로 찾아와서 날 찾았던 그 날이 떠오르는군요. 아무튼, 인재를 데려올 능력은 없지만 인재가 될 자신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모든 조건을 보증하겠습니다.」

서지훈 총장이 단번에 결론을 냈다. 차분하던 세드릭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빨리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나도 총장이기 이전에 연구자입니다.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 이렇게 총장 앞에서 원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압니다. 앞서 박민우 선생이 용감하다고 하셨지요?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용기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알아주셔서 고맙군요.」

「추가로 세드릭 씨가 머물 자택을 지원하겠습니다. 특별히 연고가 없으시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좋습니다.」

「연봉 및 기타 복지는 박민우 선생과 이야기하시면 될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세드릭 교수.」

서지훈 총장이 악수를 청했고, 세드릭이 그 손을 꽉 잡았다.

마지막으로 세드릭은 민우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민우는 기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대한민국 학계에 길이 남을 협상이 타결되는 순간이었다.

* * *

“진짜 대박이네. 대체 어떻게 꼬신 거야?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난리더라고.”

오랜만에 연구실을 찾아온 한진섭이 그렇게 말했다.

함께 찾아온 주예린도 똑같은 표정이었다. 오로지 한 사람, 이수빈만이 민우를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형이 쩌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뭘 새삼스럽게 그래?”

“국문과 교수가 쩌는 거가 뭐냐? 쩌는 거가?”

“섭섭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민우는 결재가 올라온 서류에 서명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교무처에서 올라오는 결재 서류가 많은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의 부임이 확정된 이후 민우의 기분은 최고로 좋았다.

자고로 결재확률은 상급자의 기분에 정비례한다. 직원들은 지금이 결재받을 타이밍이다 싶어 너나 할 것 없이 결재를 올렸다.

“그런데 뭘 이렇게 잔뜩 사 왔어?”

갑작스럽게 찾아온 세 사람은 커피와 간식을 꺼내놓고 떠들고 있었다.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민우는 과자를 꺼내 입에 물었다.

“파티해야지. 좋은 일 있는데.”

“파티가 아니라 치우기 귀찮아서 여기서 까서 먹으려는 건 아니고?”

“캬! 역시 킹민우! 이 정도는 눈치는 있어야 교무처장을 할 수 있는 거구나!”

한진섭이 다소 오버하긴 했지만 이제는 모두가 민우를 인정했다.

타치카와 교수를 시작으로 미셸, 그리고 셀린느. 거기에 세드릭까지 합류하게 됐다. 다음에 명인대로 초청될 명사가 누굴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주네도 장난 아니겠는데? 엄청 자극됐겠어.”

“말도 마라. 교수 초빙 전문 기관까지 만든다는 얘기가 있던데.”

“레알?”

단순 숫자로 본다면 청문대로 간 인재의 수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큼지막한 뉴스는 모두 명인대에서 터졌다. 세드릭의 초빙 소식이 알려지자 학계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가장 어이없어했던 반응은 다름 아닌 프랑스 수학계에서 나왔다. 한때 프랑스 수학계의 미래라고 불렸던 사람이 잠적하더니 갑자기 명인대에서 활동을 재개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한그룹의 자본력은 끝이 없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해. 언제까지 이런 호재를 이어갈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역시 아무나 앉을 순 없는 자리구만. 머리털은 안녕하시냐?”

“아직은 괜찮아.”

그때 카톡이 왔다.

세드릭이 보낸 카톡이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 잠깐 세드릭 씨 연구실에 가봐야겠다. 다 먹고 치워놔라. 괜히 민재 고생시키지 말고.”

민우가 연구실을 나섰다. 한진섭이 한숨을 내쉬며 토로했다.

“이제 우리는 급이 안 돼서 같이 안 놀아준다 이거냐? 억울해서라도 노벨상 타든가 해야지.”

“섭 오빠도 울오빠상 한번 노려보지 그래요?”

“울오빠상이 뭐냐? 울오빠상이. 품위 확 떨어지네. 그런 마이너한 상은 줘도 안 받아.”

“안 받는 게 아니라 못 받는 거겠지.”

주예린의 일침이 날아오자 한진섭은 얌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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