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58화 (458/500)

천재 수학자의 결심 (3)

민우와 이수빈은 열심히 명인대의 명소를 소개했다. 하지만 세드릭의 심미안을 만족시킬 만한 곳은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대학이 학문의 요람이긴 하지만 너무 건물이 삭막한 느낌인데.」

「하하하. 프랑스에서 오신 분들의 반응은 대부분 똑같네요.」

「또 누가 그런 평을 했소?」

「소르본의 랑느 박사께서 그러셨습니다. 아주 오래전이긴 하지만요.」

세드릭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야는 달라도 프랑스의 자랑이자 소르본의 심장인 랑느 박사를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궁금하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소?」

「프랑스와 달리 한국은 근대적인 대학의 개념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명인대도 개교한 지 이제 70년 정도밖에 안 됐거든요. 건물에 역사가 스며들기엔 부족한 시간이죠.」

「그렇군.」

한참을 돌아 세 사람은 인문대 건물 앞에 도착했다. 한쪽에 펼쳐진 작은 연못 위로 오리 가족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민우가 소개했다.

「이곳이 명인대 인문관 건물입니다. 인문학부 내 학과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저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올라가 봐야지. 캠퍼스 투어는 이쯤하고, 당신의 연구실이나 좀 구경해 봅시다. 내 서재만 오픈하는 건 공평하지 않은 일이니까.」

「가시죠.」

민우는 세드릭을 데리고 연구실로 들어갔다. 이수빈은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인사했다.

「저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야겠어요. 세드릭 씨. 말씀 잘 나누시다 가세요.」

「꽃다발 감사하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봅시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기회를 만들어볼까요? 식사에 초대할게요. 박 선생님이 콜마르에서 근사한 저녁을 얻어먹었다고 들었어요. 보답해야죠.」

「고맙소.」

세드릭은 흔쾌히 수락했다. 민우는 한국에 오래 체류할 건지 묻고 싶었지만, 적당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이수빈이 돌아가자 민우는 세드릭에게 소파 자리를 권했다.

「커피 어떻습니까?」

「좋지.」

민우는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굵게 간 다음, 드립 커피를 만들었다. 풍성하면서도 묵직한 커피향이 연구실을 적셨다.

보통은 커피향이 나면 손님들이 좋다고 말해주곤 했는데 세드릭은 별 반응이 없었다.

민우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콜마르의 식당에서 내온 커피는 이 세상의 커피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향이 좋았다. 그의 성에 찰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한번 드셔보십시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너무 솔직해도 양해해 주시오.」

잔을 든 세드릭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무래도 원두를 바꿔야겠소. 블렌딩이 형편없는 거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세드릭 씨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수입해 오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하하. 그때 그 커피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그랬다가는 레이첼이 좋아하지 않을 거요. 우리 가문의 비법이거든.」

「원두 말고도 드립 방식으로도 커피의 맛이 좀 달라지지 않습니까?」

「당연한 말씀을.」

「그럼 다음에 저희 집에 오셨을 때 좀 알려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도구는 준비해 놓겠습니다.」

「어떻게든 나를 초대하려고 작정하셨군.」

민우는 웃었다.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식사 초대를 하는 것은 그에 대한 호감의 표시다.

의외로 세드릭은 그 제안을 쿨하게 받아들였다.

「좋소. 어차피 한국에는 며칠 더 있을 것 같으니 한번 들르지.」

「정말이십니까?」

「한국 가정식은 어떤지 좀 궁금했거든. 아무래도 요리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민우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틀 뒤로 시간을 잡았다. 그때 또 누구를 초대해야 하나 싶었지만, 결국 세드릭만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잠시 책장 좀 구경해도 되오?」

「얼마든지요.」

세드릭이 책장 쪽으로 다가가 책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한국어로 된 서적이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손에 걸리는 책을 꺼내 보았다.

그때 민우는 흠칫 놀랐다.

번쩍!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그 신비한 푸른빛이 책에서 흘러나와 세드릭 쪽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세드릭의 몸을 한 번 훑고 다시 책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쳤다.

‘뭐지? 그 빛은 완전히 소멸된 줄 알았는데…….’

루카치의 유고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던 바로 그때, 민우는 유품에 들어있던 신비로운 힘이 모두 자신에게 흡수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로 인해 만년필이든 안경이든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고에서 그 빛을 다시 보았을 때 반가운 느낌이 먼저 들었다.

마치 유고를 보존서고에서 처음 발견했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민우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드릭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루카치의 유고 원본이었다.

‘원본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다른 유물하고는 다르니까.’

민우에게 신비로운 능력을 선사한 안경과 만년필은 루카치의 조카에게 돌려주었지만, 원본 원고는 돌려주지 못했다. 그가 원본 원고와 그에 따른 모든 권리를 민우에게 양도했기 때문이다.

당시 루카치의 조카는 이렇게 말했다. 숙부의 사상과 이론을 앞으로도 널리 알려달라고.

그래서 민우는 이 상황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유고가 다른 사람에게 반응한 건 처음 있는 일이야.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유고는 왜 푸른빛을 세드릭 씨에게 흘려보내고 있는 거지?’

지금까지 유고 원본을 살펴본 사람은 많았다. 서지훈 총장도, 이수빈도, 한진섭도, 주예린도 모두 읽었다.

하지만 이렇게 선명한 푸른빛을 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설마.’

민우의 뇌리에서 송현우 교수가 임종을 맞이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맞아! 그때 송현우 선생님이 선집에 사인할 수 있도록 마지막 힘을 낼 수 있게 도와준 게 저 푸른빛이었어. 그렇다면 저 빛도…… 세드릭 씨에게 뭔가 도움을 주려는 게 아닐까?’

그것이 학계로 다시 나올 수 있는 용기라면 어떨까?

민우는 묘한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한편, 유고를 넘겨보는 세드릭은 푸른빛을 전혀 인지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저렇게 환하게 빛나는데도 그는 활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독일어로 쓰인 원고였다.

세드릭은 독일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원고를 읽는 것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출판된 것으로 보다가 이렇게 원본으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군. 뭔가 의미가 좀 더 선명히 다가온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중얼거린 세드릭은 다시 유고에 집중했다.

시간이 흘러갔다.

민우는 소파에서 커피만 훌쩍일 뿐 세드릭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았다. 한 시간,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세드릭은 유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약 유고에서 푸른빛이 뿜어나오지 않았더라면 민우는 그에게 몇 마디라도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가 유고를 다 읽고 난 뒤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어?」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세드릭이 정신을 차리곤 시선을 돌렸다. 민우 쪽으로.

「내가 책을 얼마나 붙들고 있던 거요?」

「정확히 2시간 40분이네요.」

「뭐라고?」

세드릭은 어이없다는 듯 민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찰나의 시간이 흘러갔다고 느꼈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민우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거…… 실례가 많았소. 손님 주제에 책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군.」

「괜찮습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친구들도 그랬거든요. 제가 뭔가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터치하지 않았죠.」

민우는 굳이 그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이야기까진 붙이지 않았다. 괜히 세드릭에게 좋은 대답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세드릭은 유고를 제자리에 놓아두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뭐라고 할까. 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오.」

「피곤하시면 호텔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좀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정리가 필요하오.」

일어서려던 민우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턱을 괸 세드릭은 뭔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가끔은 힐끔 뒤를 돌아보며 책장에 전시된 유고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그 푸른빛 때문인가?’

유고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세드릭의 뭔가를 자극한 게 분명했다.

민우는 세드릭을 위해 그의 빈 잔을 다시 커피로 채워 주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소.」

「예.」

「당신은 여전히 내가 명인대로 부임하기를 바라오?」

「그럼요. 저는 세드릭 씨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강연을 듣는 학생들의 표정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됐어요. 당신은 우리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대학은 연구뿐만 아니라 교육도 중요한 곳이지요. 후학을 양성하는 것도 학자의 책무라 생각합니다.」

민우는 잠시 뜸을 들였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꼭 우리 명인대가 아니더라도, 세드릭 씨가 다시 학계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일깨워줬으면 한다고요. 진리야말로 우리들의 빛이니까요. 그건 우리 명인대의 표어이기도 하죠.」

「표어가 정확히는 무엇이오?」

「진리는 나의 빛.」

세드릭의 눈이 반짝였다. 다소 혼탁했던 그의 눈빛이 총명함을 되찾았다. 혼란스럽던 그의 내면이 안정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아까 유고를 읽으며 정말 신비한 경험을 했소. 읽다 보니 뭔가 달라지더군. 내가 아는 <존재와 영혼의 형식>이 아니라 마치 다른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자세히 여쭤봐도 됩니까?」

「그럴 필요는 없소. 결국 책은 딱 하나의 질문만을 남겼거든. 나의 연구가 충분한가?」

민우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세드릭이 재차 말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내가 했던 행동을 반추해 보았소. 내가 학계를 떠난 것이 과연 정당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더군. 내가 대학에 첫발을 내디딜 때 다짐했던 것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지.」

민우는 그 이유를 안다. 루카치의 유고 속에 남아 있던 신비로운 힘 때문이다.

예상이 들어맞았다.

세드릭은 자신이 은거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나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우리의 연구가 정당한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후대가 평가해줄 겁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치열하게 연구하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세드릭은 다소 체념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뭔가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새로운 경험의 연속인 것 같군. 운명이라는 말을 싫어했는데 이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소.」

「이곳에 오신 것도, 그리고 유고를 선택하신 것도 다 세드릭 씨가 한 일입니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세드릭 씨가 앞으로 하게 될 일도 자연스럽게 운명이 되겠죠.」

고개를 끄덕거린 세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가 이렇게 말했다.

「명인대 총장을 만나고 싶은데 주선해 줄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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