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수학자의 결심 (2)
「안 오시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딱 맞춰서 오셨네요.」
민우가 유쾌하게 그를 맞이했다.
세드릭은 한창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덥수룩하던 머리카락과 수염을 모두 정리했으니까. 나이는 좀 들긴 했어도 수학과 교수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민우의 옆에서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만큼 세드릭은 포스가 남달랐다.
「말하지 않았소? 시간도 숫자라고.」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오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전혀. 그보다 강연 끝나고 캠퍼스를 좀 둘러볼 수 있겠소?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곳이 당신의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라고 하더군.」
민우는 세드릭을 배려해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보냈었다. 차를 타고 오며 이런저런 정보를 얻은 것 같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세드릭 씨의 체류 기간이 짧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요. 아, 소개해 드리지요. 이쪽은 명인대 수학과 교수진입니다. 실력이 좋은 분들이죠.」
「반갑소.」
뒤에서 미어캣처럼 소개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교수들이 반색했다.
정종환 학과장을 비롯해 다른 교수들도 세드릭과 인사를 나눴다. 세드릭은 딱히 그들에게 흥미를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그 부분은 예상하던 일이다. 그는 비즈니스를 하러 명인대에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민우는 소강당 뒷문 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온 세드릭은 바로 연단에 올라가지 않고 무대와 관객석을 훑어보았다. 입구는 암막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학생들은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으음.」
가벼운 탄성이 나왔다. 소강당은 만석이었다.
200석 정도의 규모니까, 수학과에 등록된 학부 및 대학원생들이 대부분 왔다고 보면 된다.
「생각보다 아담하군.」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객석이 한 곳에 집중되는 구조이고, 또 그만큼 학생들과 호응할 기회가 많으니까요.」
세드릭은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당신이라면 알 거라고 생각했소. 강연이란 그런 맛이 있어야지. 질문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제가 먼저 올라가서 세드릭 씨를 소개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시간이 되어 민우는 앞장서 무대에 올랐다. 소란스럽던 내부가 일순간에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드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도 잠시, 민우의 미성이 소강당을 울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그런데 나타난 게 세드릭 씨가 아니라 저라서 너무 서운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웃음소리가 들렸다. 민우도 웃으며 사회를 계속 이어갔다.
“그래도 이번 강연을 주최한 사람으로서 한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대학 안팎에서, 정말 많은 곳에서 강연했고 또 많은 분을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단연코 오늘은 그중 가장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곳에 모인 분들은 수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민우는 학생들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가볍고 유쾌하게 진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한때 잠시 수포자의 길을 걸은 제가 이곳에서 세드릭 씨를 소개하게 되었거든요. 운명의 장난일까요?”
이번엔 교수들도 웃었다. 세드릭은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곁을 수행하고 있던 직원이 귓속말로 통역해주자 씨익 웃었다.
“예전에 제가 소르본에서 오신 어떤 박사님과 함께 인사동에서 차를 마신 적이 있습니다. 아마 제 자서전을 읽은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때 들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네요. 그때 그 박사님은 학문을 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창한 게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노동자들이 벽돌을 나르는 것과 같다고 말이죠.”
그때 그 말을 했던 랑느 박사는 뉴턴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지식의 세계에서 한 번의 개가를 올리기 위해서는 무지의 고백을 백 번은 해야 한다고.
하나의 격언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민우는 자신만의 결론을 내렸다. 학문을 하는 것은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불과하다고.
그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람들과 그 결과에 대해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럼으로써 세상은 더욱 윤택해지는 것이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세드릭 씨는 돌연 수학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지금까지 프랑스 교외의 작은 식당에서 일을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식당이 세드릭 씨가 소유한 식당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는 소위 말하는 알바였습니다.”
그 한마디에 학생들이 깜짝 놀랐다. 비록 수상 거부를 하긴 했지만, 필즈상 수상자로 결정된 사람이 바로 세드릭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식당에서 알바를 했다니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학문이 지니는 의미가 상당히 경직되어 있다고 민우는 생각했다.
“아마 강연이 시작되면 세드릭 씨가 분명 그 말씀을 하실 겁니다. 그 식당 커피와 소시지가 정말 맛있거든요.”
잠시 세드릭이 대기하고 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그는 웃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자리를 통해 여러분들이 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학점도 중요하고 취업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수학은 우리의 일상에서 그 이상으로 가치 있고 재미있을 겁니다. 아마도요.”
마무리를 지은 민우는 한쪽으로 물러났다. 이어 세드릭이 암막에서 나타나 계단을 올랐다.
“헐 대박!”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우와아아!”
곳곳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쏟아졌다.
한때 학계에서 종적을 완전히 감췄던 천재 수학자가 한국, 그것도 명인대에서 처음으로 활동을 재개하는 순간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 기념비적인 순간을 남기기 위해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한발 빠르게 SNS에 포스팅을 올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수학과 교수들도 마치 아이돌을 만난 것처럼 세드릭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아주 환상적인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프로페서.」
민우는 손을 흔들며 화답하며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는 세드릭의 차례였다.
생각보다 세드릭은 들뜨지 않았다. 두어 개 정도 다운시킨 정중한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야 할까요? 반갑습니다. 명인대의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프랑스 시골의 작은 식당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세드릭이라고 합니다. 특기는 요리죠. 돼지고기를 이용한 요리는 아마 저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다시금 환호했다. 통역기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드릭의 이야기는 잘 전달되었다.
「올라오기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박민우 교수께서 아주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네요. 덕분에 길이 보였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들도 박민우 교수와 같은 분이 이 대학에 있는 걸 감사해야 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동의를 뜻하는 박수 소리가 소강당을 가득 채웠다. 수학과 교수들도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세드릭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소강당에 앉은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드릭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과학자, 특히 그중 수학자는 융통성이 없고 재미가 없다는 편견을 대번에 깼다.
그는 어려운 수학적 개념이나 풀이를 논하지 않았다. 민우가 말했던 ‘일상’을 키워드로 수학자의 자세와 본분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 그가 강조한 것은 순수한 열정이었다.
이번 강연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수학을 대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역사에 남는 쾌거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라고.
그는 자존심 강한 프랑스 사람이었다. 자신을 천재라고 칭하는 것에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진솔하게 전해졌다.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강연은 질의응답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재미있는 건 명인대 수학과 교수들도 그에게 질문했다는 것이다.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며 고충을 토로하는 모 교수에게 세드릭은 웃으며 나중에 한번 같이 풀어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고, 커다란 칠판을 준비해 달라는 유머를 날렸다.
그 와중에 페렐만에 관한 이야기도 잠깐 나왔다.
그는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다소 고민했지만, 결국 그는 페렐만과 함께 일했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역시 내 추측이 맞았어.’
‘한때 존경했던 수학자’ 정도로 포장된 페렐만과의 이야기를 들은 민우는 오전에 이수빈에게 말했던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페렐만 씨가 당했던 것과 비슷한 사건이 세드릭 씨에게도 있었던 게 분명해. 누군가 아이디어를 훔쳤거나 학계의 연줄을 이용해 깎아내리려고 했겠지.’
학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혹자는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평생 추구해야 하는 신념에 관한 문제다. 그것이 부정되었을 때, 혹은 타인에 의해 더럽혀졌을 때는 그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것 자체의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니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은거하게 된 것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멋진 강연이었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무대 아래로 내려온 세드릭을 민우가 맞았다.
「아니오. 나에게도 아주 좋은 경험이었소.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 번도 기자놈들과 마주치지 않았거든. 그리고 수학과 교수들하고 회합도 없고 말이지.」
그만큼 민우가 신경을 썼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가 알아주니 더욱 보람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죠. 이제 캠퍼스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실까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소.」
그때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이수빈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는 그녀를 닮은 아름다운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싱긋 웃은 이수빈이 세드릭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환영합니다. 세드릭 씨. 인사가 늦었죠?」
「당신은?」
「제 와이프입니다. 이곳에서 같이 교수로 일하고 있어요.」
「이수빈입니다. 반가워요.」
「오, 고맙소. 꽃다발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그가 마음에 들어 하자 보람찬 표정을 지은 이수빈이 물었다.
「꽃을 좋아하시나 봐요?」
「사람하곤 달리 꽃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세드릭은 꽃향기를 맡아보았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민우는 세드릭이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한편으로는 이수빈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줘서 고마웠다.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이수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수빈이 정신 차리라며 등을 툭 쳤다.
깜짝 놀란 민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밖을 가리켰다.
「자, 슬슬 가보실까요? 이수빈 선생이 왔으니 든든하네요. 이 선생은 학사부터 석사, 박사를 모두 명인대에서 마쳤거든요. 캠퍼스는 저보다 잘 알 겁니다.」
「좋소. 갑시다!」
세 사람이 소강당을 나섰다.
한편 이 장면을 보던 수학과 교수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발 민우가 세드릭을 잘 설득해서 티타임 정도라도 할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