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56화 (456/500)

천재 수학자의 결심 (1)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민우는 출근 준비를 위해 서둘렀다.

대강 준비를 마치고 잠시 윤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윤아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직 유치원에 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역시나 이불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어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오늘 아침은 간단히 먹어야지.’

민우는 식당으로 들어가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간단히 먹는 것은 토스트만 한 게 없다. 냉장고에서 딸기잼을 꺼냈고, 버터를 바른 빵을 맛있게 구워냈다.

구수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냄새는 잠에 취해 있던 이수빈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침대에서 뒤척거리던 그녀는 좀비처럼 나오더니 식탁에 앉았다.

“맛있겠다.”

“아침 먹을래?”

“응.”

식탁에 엎드린 이수빈을 보며 피식 웃은 민우는 빵을 몇 개 더 구웠다. 그리고 그녀가 먹을 수 있도록 우유를 같이 챙겨주었다.

그러다 보니 뭔가 볼륨이 좀 부족한 것 같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과 베이컨까지 구워냈다.

덕분에 식탁이 좀 더 풍성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간단히 찌개라도 끓여서 밥을 먹일 걸 그랬다. 요즘 체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이라 걱정되는 것도 있었다.

“좀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

“아침밥은 못 해줘도 같이는 먹어줘야지.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고. 오빠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

“이수빈 선생님. 우리 좀 솔직해집시다. 배고파서 나온 거 아닙니까?”

배시시 웃은 이수빈은 빵을 먹었다. 이상하게 자신이 구운 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 같다. 빵을 굽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요리에 정성이 들어가야 맛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닐 거다.

“어젠 어땠어? 잠들어서 이야기도 못 들었네.”

“재미있었지.”

“그게 다야?”

“뭐, 호텔 바에 내려가서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눈 게 전부라서.”

숙소까지 직접 세드릭을 데려다준 민우는 그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콜마르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는 좀 더 서로를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단 두 번의 만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민우와 세드릭이 추구하는 철학이 일치했다. 열정도 비슷했다. 다른 것은 성장환경뿐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하는 것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민우는 직감했다.

세드릭이 그저 호기심에 이끌려 한국에 방문한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 특강을 들으려면 수학을 전공해야 한다니…… 보통 인문학 쪽은 제한 없이 듣게 해주잖아요?”

“보여주고 싶은 거야. 세드릭 씨가 우리 대학에서 새롭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걸.”

“세드릭 씨가 명인대로 온다면 오빠 쪽에 더 힘이 실리겠어요.”

“그렇지. 그래도 그걸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 이번 일은 순수하게 세드릭 씨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벌인 일이니까.”

“그럼 세드릭 씨가 명인대로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에요?”

민우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 씨가 왜 은거하게 됐는지는 아직 몰라. 뭔가 사건이 있었겠지.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세드릭 씨가 다시 세상에 나오는 거야. 우리 학교의 표어처럼 세상의 빛이 되어줬으면 해.”

이수빈도 명인대 출신이라 표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진리는 나의 빛.

민우는 세드릭이 진리를 탐구하여 세상의 빛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제 그렇게 깊게 이야기했는데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못한 거예요?”

“못 들었어. 짐작 가는 건 있지만…….”

“뭔데요?”

민우는 즉답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콜마르에서 세드릭 씨가 저녁 식사에 초대해 줬다고 했었지? 그때 저녁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대뜸 세드릭 씨가 유고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유고라면, 루카치 유고요?”

“응.”

이수빈이 눈을 반짝였다. 민우가 지금까지 이뤄낸 최고의 업적을 언급한 거라면 확실히 그의 과거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떤 이야기였는데요?”

“유고를 처음 손에 넣었을 때 욕심이 나지 않았냐고 묻더라.”

민우는 그때 나눴던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주었다. 듣는 내내 이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내 과거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게 우연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세드릭 씨는 내가 공저가 아니라 편저로 책을 내는 걸 고민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어. 물론 내가 노벨상을 받긴 했지만 전혀 다른 분야의 학자이고, 거기에 유럽도 아닌 작은 나라의 학자인데…… 그게 우연일까?”

“아, 그렇다면……?”

“어쩌면 세드릭 씨는 내 상황과 반대되는 사건을 겪었을지도 모르지.”

이수빈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 추측이 가능했던 것은 세드릭이 위대한 수학자인 그레고리 페렐만의 행적을 따라 했다는 것에 있었다.

잠깐이나마 같은 연구소에서 일했던 세드릭은 페렐만의 연구물은 물론, 그의 삶에 깊이 감화되어 있었다.

민우는 그 부분에서도 힌트를 얻은 것이다.

“학계의 권력 구도나 암투 같은 것에 환멸을 느끼고 은거했다, 이게 내 추측이야.”

“그리고 오빠가 나타나 세드릭 씨에게 인상 깊은 대답을 했고요.”

“인상 깊었을까?”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먼 곳까지 왔을까요? 캠퍼스를 구경하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포장일지도 모르죠. 오히려 오빠와 일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보기 위해 온 걸지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라면 그랬을 거 같은데요.”

“콩깍지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거 벗겨진 지 오랩니다. 박 선생님.”

민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엽다며 깔깔거리고 웃는 이수빈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민우의 마음은 한결 들뜨게 됐다.

이수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세드릭의 방한은 터닝 포인트가 될 가능성이 큰 거니까.

민우는 이수빈의 평론가적 직감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 * *

명인대에 도착한 민우는 바로 교무처 사무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번 특강 준비를 맡은 직원이 처장실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처장님.”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요.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왔습니다.”

민우는 직원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장 외투를 벗으며 보고를 들었다.

“전산팀에서 학번 확인 시스템 설치 완료했고 이상 없다는 보고 받았습니다. 만약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수동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노트북 두 대를 비치해 두었습니다.”

“잘하셨네요.”

이번 특강의 수강 자격은 수학이 주전공이거나 복수전공인 학생으로 한정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소강당에 들어가기 전에 학생증을 제출해야 한다.

이러한 규칙 때문에 여러 학과에서 아쉬운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전에 이소윤이 찾아와 부탁했던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이다.

바로 수학의 특수성 때문이다.

수학은 인접 학문이 상당히 많은 과목 중 하나다. 물리와 화학은 물론 각종 응용과학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학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우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런데 학생증을 빌려서 대리 참석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그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사진과 실물을 일일이 대조해볼 수도 없는 거고, 대조한다고 해도 일이 쉽지 않을 겁니다. 요즘은 사진과 실물이 많이 다르잖아요. 저도 많이 달라서.”

민우가 농담 식으로 이야기하자 직원이 긴장을 풀며 웃었다.

“그럼 학생증 체크만 하고 입실시키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아, 그리고 세드릭 씨는 조금 늦을 수도 있습니다.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황이고 원래 좀 늦게 일어나는 분이거든요.”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잘 부탁합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보고하시고요.”

직원이 정중히 인사한 뒤 처장실을 나섰다.

이제야 한숨 돌리고 자리에 앉은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특강 시간은 오후 2시. 숙소에서 이곳까지 오는 거리를 계산한다면 슬슬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깨우는 게 쉽지 않을 거 같은데.’

민우는 핸드폰을 들어 세드릭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음이 가다가 겨우 통화가 연결되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세드릭 씨.”

― 후우…… 설마 지금이 아침이라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한 건 아니시겠지.

“하하하. 말씀하시는 거 보니 잠은 다 깨신 모양이네요. 아침 맞습니다. 좋은 아침이군요.”

― 깰 것도 없소. 잠을 별로 못 잤거든.

핸드폰 너머의 세드릭은 무척 피곤한 목소리였다.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을 테니 그럴 만했다.

“강연 시간을 조금 늦출까요? 한두 시간 순연하는 건 괜찮습니다. 미리 공지해 놨거든요.”

― 당신은 역시나 철저한 사람이군.

“예전엔 안 그랬는데 보직 맡은 이후로는 그렇게 되더군요.”

― 시간도 숫자요.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수학자의 말을 누가 귀 기울여 듣겠소?

타당한 말이었다. 그래서 민우는 더 이상 그에게 권유하지 않았다.

― 곧 준비하고 출발하겠소.

“1층 로비에서 명인대 직원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그 차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제가 가고 싶었지만 현장 지휘를 해야 해서요.”

― 어차피 차에서 푹 잘 거요. 괜히 와봐야 운전만 하고 심심하겠지.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 고맙소.

전화를 끊은 민우는 내선 전화를 들었다. 이번에는 수학과 학과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 * *

오후 2시가 되기 10분 전, 서지훈 총장이 소강당에 나타났다. 한쪽에서 수학과 학과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민우가 서둘러 뛰어왔다.

“총장님.”

“준비는 어떻습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서지훈 총장은 부드러운 어조로 존대를 했다. 민우가 보고했다.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세드릭 씨만 도착하면 됩니다.”

“고생했습니다. 역시 박 처장에게 일을 맡기니 마음이 편하군요!”

민우는 하마터면 ‘예?’라고 되물을 뻔했다.

전에 칭찬 듣기 힘들다고 총장실에서 투덜거렸던 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 분명했다. 이렇게 은근히 비꼬면서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때 수학과 학과장이 직원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직원이 강당 내부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VIP석에 자리를 하나 더 늘렸다.

사실 오늘 서지훈 총장은 특강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총장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수학과 학과장이 권했으나 서지훈 총장은 정중히 사양했다.

“그럴 순 없죠. 원칙은 지켜야지.”

“예? 무슨 원칙 말입니까?”

“저는 수학과가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 학과장님처럼 수학과 교수도 아니고, 여기 박 처장처럼 특강을 기획한 사람도 아니지요. 잠시 둘러보러 온 겁니다. 행사 끝까지 잘 마무리해주세요.”

서지훈 총장이 돌아서 그곳을 나갔다.

어버버한 표정을 짓던 수학과 학과장이 민우를 돌아보았다. 이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국문학 전공하신 분들 중에 숫자를 보면 멀미하시는 분들이 꽤 많거든요.”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총장님께선 자연과학에도 상당히 관심이 깊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 총장님이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일반론에 가깝죠.”

소소한 복수로 서지훈 총장을 수포자로 만들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역시나 안팎으로 신뢰가 두터운 사람이었다.

바로 그때, 복도 한쪽에서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후줄근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사내.

바로 세드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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