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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455화 (455/500)

선배가 까라면 까야지 (2)

서울 외곽에 위치한 백현대학교.

대부분의 서울 소재 대학이 그렇듯이 캠퍼스는 그리 크지 않지만 내실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그리고 오늘 민우가 들르기로 마음먹은 곳이기도 했다.

레아가 물었다.

“도착했습니다. 저 앞에서 내려드릴까요?”

“예. 그렇게 해주세요.”

정문을 통과해 차에서 내린 민우는 바로 인문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르는 이곳에는 선배이자 매형인 최민식이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연구실 앞에 도착한 민우는 가볍게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고, 민우는 얌전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 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바로 오느라 조금 서둘렀어요. 제가 방해했나요?”

“아냐. 우리도 지금 막 이야기 끝냈다.”

연구실엔 백현대 국문과 학생회 임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민우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마치 연예인을 본 것처럼 눈이 초롱초롱했다.

그냥 손님이라서 인사한 게 아니라 민우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것이었다. 국문학 전공자 중 민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자, 그럼 손님 오셨으니 오늘은 이만들 가보고 정해진 대로 준비 잘해놔라.”

“예.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했다.”

학생들이 나가자 두 사람은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우는 책상에 놓여 있는 유인물을 살펴보았다.

벌교와 장흥, 그리고 강진을 잇는 코스가 그려진 계획표였다.

위 세 지역은 대표적인 문학답사 코스다. 여기에 해남까지 들르면 문학사적으로 완벽한 코스가 그려진다. 볼 것도 많지만 먹을 것도 상당히 많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이야. 벌써 문학답사 시즌이네요.”

“중간고사 끝났으니 한번 다녀와야지. 마침 날씨도 좋고 하니까. 너희는 안 가냐?”

“가긴 하는데 이번에는 참석 못 할 거 같아요. 일이 좀 많아서요.”

“하긴, 공사다망하신 교무처장님이신데.”

“진섭이는 그러다가 공사가 다 망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최민식은 껄껄 웃었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때 자신에게 논문 쓰는 법을 배우던 학생이 명문대 처장급 교수가 되었으니까.

“갑자기 보자고 해서 좀 걱정하긴 했는데. 무슨 일 있는 거냐?”

“음, 좀 일이 생기긴 했습니다.”

“명인대가 좀 소란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많이 심각한가 보네.”

팔짱을 낀 최민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후배인 민우와 선배인 서지훈 총장을 응원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채널을 열어두고 돌아가는 상황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가 찾아온 것은 명인대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일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그럼?”

“형님께 좀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내가 관계된 일이야?”

“송승현 이사님이 형님 안부 물으셨어요. 얼마 전에 지음사에서 설명회 있었던 그날요.”

“이런!”

최민식은 이마를 탁 쳤다. 지음사 이사가 안부를 묻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저하고 단행본 하나 공저 좀 해달라고 하시는데 괜찮으세요?”

“괜찮고 안 괜찮고가 어딨어? 선배가 까라면 까야지.”

“역시 그렇죠?”

“난 그렇다 쳐도 넌 괜찮냐? 얼마 전엔 유럽도 다녀오고 바빴잖아.”

“그래서 저도 웬만하면 거절하려고 했는데…….”

“했는데?”

이걸 이야기해도 될까 잠시 고민했던 민우는 그냥 눈 딱 감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서지훈 선생님 뵈려고 총장실에 갔는데 원고 쓰고 계시더라고요. 엄청 피곤해하시면서요.”

“총장실에서 원고를 쓰신다고? 왜? 요즘 강의도 안 하실 텐데.”

“송 이사님 오더죠 뭐.”

“아…….”

이렇게 된다면 거절할 명분이 사라진다. 하늘 같은 선배도 총장실에서 반강제로 원고를 쓰고 있는데 후배들이 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게 바로 학연의 무서움이다.

“어쩔 수 없네. 진행해야겠어. 테마는 뭘로 하래?”

“정해진 건 없습니다. 우리가 정하라고 하셨어요.”

“으음.”

최민식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정교수가 됐다고 나태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강사 시절보다 열심히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최근 연구 동향을 모두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우리가 공저한 책은 신화학 쪽인데, 그쪽 분야는 이미 네가 몇 년 전에 캠벨 씨하고 다 해 먹었으니 따로 쓰는 건 의미가 없을 거 같고.”

“아하하하…… 죄송합니다.”

“네가 잘난 건데 뭐가 죄송해? 세계적인 학자와 공동연구를 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왠지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IAHS에서 캠벨 박사와 인연을 맺은 민우는 그와 신화학에 관한 공동연구를 진행했고, 세계적인 명저를 써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후의 신화학 연구는 민우와 캠벨 박사의 연구의 연장선상으로 진행될 뿐, 뭔가 새로운 게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분야에 대한 연구는 크게 의미가 없다.

이미 완성된 분야였으니까.

최민식은 계속 고민했지만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좀 더 고민해봐야겠는데. 넌 어떤 게 좋을 거 같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논문집을 내자니 양심에 찔리고. 그렇다고 새로운 걸 쓰기에는 부담이 크고.”

“딱 한 달만 더 고민해보고 결정하자. 일단 지음사 가서 계약은 하고.”

“그러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송 선배한테 연락은 네가 할 거지?”

“제가 하겠습니다. 다음 주 정도에 시간 괜찮으세요? 그때 같이 저녁이라도 드시죠.”

“오케이.”

최민식의 허락을 받은 민우는 마음을 놓았다. 작은 언덕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 * *

“선생님.”

“어?”

민우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날이 좋아 연구실 출입문을 열어두었는데 그 사이로 이소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웬일이야? 요즘 정신없을 텐데.”

이소윤은 본과 4학년이다. 병원에서 실습도 하고 있고, 겨울에 있을 의사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중이라 민우만큼 바빴다.

의사 국가고시 합격률은 보통 95퍼센트를 오간다.

혹시라도 합격하지 못하면 국내 최고 의학부라는 명예가 있기에 상당한 곤욕을 치르게 된다.

물론 이소윤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합격하겠지만 그녀는 방심하지 않고 철저히 준비했다.

“바쁘긴 해도 가끔 인사는 드려야죠. 요즘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서요. 지금 이수빈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오는 길이에요.”

“뭔가 요즘 앞뒤가 바뀐 거 같다? 예전에는 나한테 먼저 오더니.”

“맛있는 거 얻어먹으려면 어쩔 수 없어요.”

“하긴.”

이소윤이 잠시 방황할 때를 기점으로 이수빈은 이소윤에게 매번 밑반찬을 챙겨주고 있었다.

자취하는 입장에서 이소윤은 큰 도움을 받았고, 이수빈을 친언니처럼 잘 따랐다.

물론 도움을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이소윤이 해결해 주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좋은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요즘 별일은 없고?”

“예. 딱히.”

“양 선생은 잘 있지?”

뜬금없이 양지모의 안부를 묻자 살짝 당황한 이소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약간 볼이 빨개진 걸 보니,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진척이 있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봄이 찾아오면 이곳저곳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말고도 정연주와 유진태 실장의 일도 있으니까.

“선생님이 요즘 너무 바쁘셔서 술친구가 없어졌다고 투덜거려요. 다음에 시간 좀 내주셔야 할 거 같아요.”

“그래? 시험 합격하면 축하주 사라. 그때 모이면 되겠네.”

“그럴게요.”

민우는 이소윤에게 자리를 권했다. 때마침 중간고사 성적 입력을 마친 터라 시간이 비었다. 커피 메이커에서 데워진 커피를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이번에 수학과에서 특강 열린다면서요? 선생님이 엄청난 분을 초청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소문이 거기까지 갔어?”

세드릭은 내일 한국에 입국한다. 하루 쉰 다음 명인대 수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연다.

그에게 취재진이 붙지 않도록 대학에서 특별히 움직일 계획이다. 보통 초청 인사는 대학에서 맞이하지만, 민우는 본인이 차량을 직접 끌고 마중을 나갈 계획이다.

그 계획을 들은 수학과 학과장은 의전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지만 민우는 개의치 않았다.

세드릭을 명인대로 데려오려는 목표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그게…… 수학 좋아하는 후배들이 물어보더라고요. 자기도 꼭 듣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냐고요.”

“아, 로비하러 온 거냐.”

“로비까지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수학과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강의라 좀 어렵겠는데?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언제든 세드릭 씨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언제든 들을 수 있게요?”

“그래.”

민우의 의도를 짐작한 이소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들의 부탁을 들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해줄 말이 생겨서 다행이었다.

* * *

민우는 미리 체크한 게이트에서 세드릭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미 그가 탄 항공기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짐을 찾고 나오기까지는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민우는 차분히 기다렸다.

혹시나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기자들이 있을 수 있어 긴 코트를 걸치고 모자까지 눌러썼다.

특종을 노린 기자들이 계속해서 민우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세드릭을 언론에 노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의 청도 이번엔 들어주지 않았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그때 게이트가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외국인들이었다. 그중 이목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어? 뭔가 낯이 익은데?’

훤칠한 외국인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의 외모와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같은 청안이긴 했지만 수염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외국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게도 외국인은 씨익 웃어 보이더니 방향을 바꿔 민우 쪽으로 다가왔다.

「프로페서?」

「아, 혹시…….」

「못 알아봤소? 이거 서운하군.」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그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바로 민우가 기다리던 사람, 세드릭이었다.

「프랑스에서 봤던 모습과 너무 다르잖아요. 수염은 아예 밀어버리신 겁니까? 머리까지 하셨네.」

「이게 원래 내 모습이거든.」

「그럼 좀 말씀해 주시지.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

「뭐, 어쨌든 서로 알아봤으면 그만 아니오?」

민우는 사전에 어떤 복식을 하고 마중을 나갈지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세드릭이 민우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이 피곤하시죠?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따로 식사는 안 하셔도 됩니까?」

「기내식은 엉망이었지만 배는 부르오. 자, 갑시다.」

민우는 주차장으로 함께 이동했다. 차에 타기 전 세드릭이 주변을 둘러보자, 운전석에 착석한 민우가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기자들은 없습니다. 오늘 일정은 공개하지 않았거든요.」

「그게 아니라 운전기사가 따로 없나 싶어서.」

「오늘은 저 혼자 왔습니다. 사람이 많아 봐야 좋을 거 없잖아요.」

그 말에 세드릭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대학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한국은 상급자 의전에 꽤 신경 쓴다고 들었지. 오기 전에 공부를 좀 해놨소.」

「세드릭 씨가 곤란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마중을 나오면 세드릭 씨와 한두 시간이라도 더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겸사겸사 좋은 일이죠.」

「하하하. 생각보다 경제적인 사람이었군.」

세드릭은 열었던 뒷좌석 문을 다시 닫고는 조수석에 탑승했다. 민우는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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