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54화 (454/500)

선배가 까라면 까야지 (1)

마이크를 쥐고 무대에 선 것은 지음사의 송승현 이사였다. 그녀는 ‘박민우상’ 제정 초기부터 지금까지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송승현입니다.”

담백하게 인사를 시작한 송승현이 프리젠터를 꾹 눌렀다. 뒤쪽에 펼쳐진 스크린에 화면이 출력되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황금빛 트로피가 위용을 드러내었다.

황금빛 여신상이었다.

여신은 깃이 달린 투구와 망토 같은 느낌의 겉옷을 걸치고 있었고, 여신의 오른쪽 어깨엔 올빼미가 올라타 있었다.

“뒤에 보시는 트로피는 이번 리뉴얼되는 박민우상에서 수상자들에게 드리는 기념품입니다. 지혜와 기술의 여신 미네르바를 본떠 만든 트로피죠. 이는 박민우상이 내포한,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의 보존과 발전이라는 테마를 상징합니다. 수상자는 이 트로피와 함께 별도의 메달을 받게 되며, 10억 원의 연구지원금이 지급됩니다.”

셔터음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기자들이 분주해졌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송승현 이사에게는 조금의 부담감도 주지 못했다.

“즉, 지음미래재단에서 제정한 ‘박민우상’은 인류의 지혜와 지식을 계승하고 발전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류의 평화와 발전이라는 대명제에 민우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 사업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목표를 향해 한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웅장하게 했다.

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상이 제정되는 것을 경험하는 주인공이 몇 명이나 될까. 그것도 한창 활동하는 젊은 시절에 말이다.

민우는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새롭게 바뀌는 박민우상은 이번 겨울에 열립니다. 물리, 화학, 의학, 문학, 수학 등 총 다섯 가지 분야이며, 추후 필요에 따라 분야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기존 박민우 문학상은 따로 분리되어 ‘지음번역상’으로 개정됩니다. 수상자는 지음미래재단의 선정위원회에서 결정하며, 그 과정은 철저히 기밀로 취급됩니다.”

그 이후로 문학상의 규정이 나열되었다. 약 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브리핑이 끝났다.

송승현 이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브리핑이 끝났으니 질의응답이 이어질 차례다.

민우와 제임스 사장에게도 마이크가 쥐어졌다.

전 세계의 주요 언론사들이 앞다투어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굴지의 출판그룹의 대표를 맡은 제임스에게도 질문이 많이 쏠릴 것이다.

그것을 인지했는지, 가장 먼저 발언권을 얻은 것은 미국 유력 일간지의 기자였다.

「먼저 제임스 씨에게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박민우상’은 노벨상과 겹치는 부문이 많습니다. 경쟁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요?」

「하하하. 무슨 사업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입니까? 상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불운하게도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경쟁과 다툼을 선물했지요. 사람들은 칭찬에 인색하고, 서로를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의 관계가 사막처럼 삭막해질 때 등장한 ‘박민우상’은 갈증을 해소하는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민우는 제임스의 언변에 감탄했다. 적절한 비유와 위트가 섞인 대답이었다.

이어지는 질문 찬스는 한국인 기자에게 돌아갔다.

「아무래도 대중의 관심은 우리 대한민국에서 세계적인 학술상을 집행하게 되었다는 것인데요. 그분들을 대표해서 먼저 축하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상이 제정될 때 사람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은 과연 누가 첫 수상의 영예를 얻느냐인데요.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첫 수상자는 결정되었는지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민우는 웃으며 송승현 이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다.

「아까 송 이사님이 말씀하셨듯이 수상자는 위원회에서 선정하고, 또 과정은 기밀입니다. 설령 수상자가 선정되었다고 해도 여기에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네요.」

「최근 들어온 소식으로는 은둔 중이던 프랑스의 수학자 세드릭 씨가 명인대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10년 만에 학계로 복귀하는 상황이라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새롭게 개편되는 박민우상과 연관이 있을까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사전에 예상했던 질문이었기 때문에 민우는 차분히 답변을 이어갔다.

「만약 연관이 있었다면 대대적으로 세드릭 씨의 강연을 홍보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강연은 명인대 수학과에서 비공개로 열리는 특강이고, 박민우상과는 전혀 무관함을 밝힙니다.」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로도 여러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이제 행사가 마무리될 무렵, 한 일본인 기자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획득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일본의 유명 일간지에서 나온 그 기자는 민우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극우세력을 위한 기사를 적극적으로 쓰는 인사였다.

「박민우 교수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예. 하시죠.」

민우는 친절히 일본어로 대답해 주었다. 발언권을 잡은 기자는 일전 하네다 공항에서의 굴욕이 떠올랐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고는 질문을 이어갔다.

「이미 세계에는 권위 있는 상들이 즐비합니다. 후발주자인 박민우상이 쟁쟁한 학술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요. 일각에서는 노벨상과 필즈상을 적당히 베낀 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박 교수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기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국제관계를 떠나서 인터뷰 대상에 대한 예의가 전혀 없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이해한 한국인 기자들이 동료 기자들에게 그 말을 전했고, 프레스룸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고성이 오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민우는 여유롭게 웃으며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좋은 질문을 주셨네요. 아마 여기 계신 분들도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보셨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상의 권위를 결정하는 것은 수상위원회의 역할이 아니라고 말이죠. 수상자들의 연구 결과가 인류 문명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느냐에 따라 상의 권위가 결정되는 겁니다. 일본이 전통적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것은 일본 학자들이 그만한 가치의 연구를 성공시켰기 때문일 겁니다. 아닙니까?」

뜻밖의 칭찬이 나오자 질문을 한 일본인 기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네다 공항 굴욕 사건 이후로 일본 매스컴은 민우의 허물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과민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민우는 젠틀했다.

혈기 넘치는 30대 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인생 3회차 정도 되는 여유와 품격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인류라는 공통분모로 살펴본다면, 우리는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선정위원회에서도 국가와 인종을 따지지 않고 공정히 심사하여 수상자를 결정할 겁니다.」

「그 말씀은, 일본인 중에서도 수상자가 나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까?」

「물론이죠. 제가 아는 일본인분들 중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최근에 명인대로 적을 옮기신 타치카와 교수님을 들 수 있겠군요. 역사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기준을 가진 분입니다.」

일본 기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타치카와 교수가 망명하듯 일본에서 빠져나온 직후, 일본 언론은 그를 지탄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런 상황에서 타치카와 교수의 이름이 나오니 불쾌했던 것이다.

그만큼 작금의 일본 언론은 감정적이었으며, 참과 거짓을 구분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민우는 터지기 직전의 화산 한가운데에 커다란 쐐기를 박았다.

「만약 일본인 중에서 첫 수상자가 나오면 어떨까요? 재미있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이겠지?」

일본인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민우는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씨익 웃었다.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민우의 말이 결정적인 힌트였다는 것을.

* * *

“수고 많으셨습니다.”

“민우 씨도요.”

민우와 송승현 이사는 주차장에 내려와 차에 올랐다. 송승현 이사는 가는 길에 태워다주겠다고 말했다. 민우는 뭔가 불안했지만, 사양할 수는 없었다.

조수석에 오른 민우는 안전벨트를 맸다.

곧 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씨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오늘 저녁은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제임스 사장은 미국과 영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 건너온 기자들을 위해 따로 만찬 자리를 준비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송승현 이사와 따로 먹었다.

“예전 디렉터 시절부터 유명했어요. 미국식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그 정도는 해야 따르는 사람이 많은 법이죠.”

“그러게요. 많이 배웠네요.”

“혹시 나랑 저녁 먹었다고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에이, 설마요. 하늘 같은 선배님께 어떻게 그럽니까?”

“우리 바깥 양반한테 부림당하고 있으니 나한테 불만을 가진다고 이상할 건 없죠.”

“하하하…….”

잠시 대화가 끊겼다.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이수빈에게 톡을 보냈다. 저녁 먹고 이제 들어가고 있다고 말이다.

“요즘 최민식 선생은 어떻게 지낸대요?”

“강의하랴 연구하랴 바쁘시죠. 저도 얼굴 별로 못 봅니다. 톡으로는 연락 자주 하긴 하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그냥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민우와 최민식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명인대 국문과 출신이라면 말이다.

일명 ‘서자의 난’은 명인대 국문과에서 전설이 되었다.

민우가 타대생으로서의 차별을 이겨내고 실력으로 인정을 받았던 그 감동적인 이야기는 마치 미국의 ‘남북전쟁’과 비견될 정도였다.

노예로 취급되던 타대생들이 그 일을 계기로 자유를 얻었으니까.

만약 그때 캠벨의 이론을 찾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힘들어서 끝내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최민식은 대학 선배이자 매형이기도 했다. 만약 그때 포기하고 좌절했다면 자신의 누나와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일이 있었네요. 어떻게 일이 잘 풀려서 이사님께 출판기획서 가져갔던 일도 있었고요.”

“그때 일은 미안해요. 내가 너무 몰아붙였죠?”

“아닙니다. 자격이 없었다는 말은 사실이었는데요 뭐. 그리고 만약 이사님이 그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기억나네요. 내가 인문학이란 무엇인지 물었었죠?”

“예.”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을 건네며 시작된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민우는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럼 나한테 빚진 거나 다를 바 없겠네요.”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런 거겠죠?”

“그럼 이번 기회에 좀 갚는 건 어때요?”

차에 타기 전에 엄습했던 불길한 느낌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침 차가 신호등에 걸렸다. 민우는 내릴까 말까 고민했다.

“<신화와 인간: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책이 발간된 지도 벌써 오래 지났어요. 두 사람의 공저를 기다리는 팬들이 은근히 많더라고요.”

그리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아…… 그래서 민식이 형 안부 물으신 거군요. 그리고 굳이 저를 집까지 태워다주시는 거고.”

“빌드업 괜찮았나요?”

이 정도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지훈 총장이 왜 총장실에서 원고 집필에 절어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한숨을 내쉰 민우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응시했다.

오늘따라 유독 달이 밝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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