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51화 (451/500)

Show me the money (4)

민우와 서지훈 총장이 도착한 곳은 강남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발렛 직원이 친절하게 차 키를 받아갔다.

민우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되어 있는 식당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재단 이사국에서 뵐 줄 알았는데요. 좀 부담스럽네요.”

“원래 단백질을 씹으면서 이야기를 나눠야 서로 호감이 높아지는 법이야. 그래서 파스타보단 스테이크지. 소개팅 필수 지식이라면서?”

“이건 소개팅이 아니잖습니까.”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식 웃은 서지훈 총장은 민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단정히 차려입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오후였지만, 손님들이 꽤 많이 들어와 있는 듯했다.

방으로 안내받은 민우는 깜짝 놀랐다.

“……의원님?”

“오, 박 교수님. 이제야 오셨군요. 하하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에는 이태하 이사장은 물론, 김강현 의원도 자리하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민우는 들어가지 못하고 문을 잡기만 했다.

“왜 그러고 있나? 어서 들어오지 않고선.”

이태하 이사장이 한마디 하자 민우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말석에 앉았다.

민우는 서지훈 총장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김강현 의원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지금까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사전에 언질을 받았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날 데려오신 거였나?’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일이 조금 복잡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강현 의원과는 단순히 당원과 자문위원의 관계가 아니다. 후에 대선에 출마하게 되면 캠프에 합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시간강사법과 관련한 여러 정책적 이슈도 그가 관여하는 상황.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이태하 이사장과 합석을 하게 된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서지훈 선생님이 총장협의회를 뒤집은 일은 이미 이사장님 귀에도 들어갔을 거야.’

그렇다면 과연 오늘 이 자리는 어떤 의미가 될까. 재단전입금을 늘려달라는 요청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부담스러운 자리니까 다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하면서 방을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의원님께서 계실 줄은 몰랐네요.”

민우는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말했다. 서지훈 총장이 술을 따르려 했으나, 술잔을 건네받은 김강현 의원이 민우에게 직접 술을 따랐다.

민우는 바르게 앉아 공손히 술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습니까. 지나가던 길에 들른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아, 편히 앉아요. 우리 당의 자문위원이신 분인데.”

“괜찮습니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민우는 센스 있게 술병을 돌려받아 김강현 의원의 잔을 채웠다. 이태하 이사장의 잔을 살펴보았는데, 아직 술이 남아 있었다.

이태하 이사장은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민우와 서지훈 총장이 온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처장급 회의에서 결의된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거다.

“그래서.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한 게야?”

“요즘 대학 돌아가는 이야기를 좀 드리려고요. 이렇게 찾아뵙지 않으면 제 임기가 끝날 때까지 부르시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대학에 너무 문제가 많다 보니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그랬다네.”

“그러셨습니까? 다행이군요. 그나마 관심을 가져주셔서요.”

서지훈 총장은 선 넘는 발언을 했지만, 이태하 이사장은 딱히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총장으로 임명되고 아예 포기한 걸까?

민우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지훈 총장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근 박 교수가 좋은 소식을 연이어 가져오고 있습니다. 타치카와 유지 교수를 역사학과로 데려왔고, 소르본의 유명한 젊은이들을 초빙했지요. 거기에 세기의 천재 수학자로 알려진 세드릭 씨를 초청하는 것에 성공해 수학과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음, 그 이야기들은 나도 들었네.”

“소감이 너무 간단하신 거 아닙니까?”

서지훈 총장이 그렇게 지적하자 이태하 이사장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어 산적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씹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이야기하려는 건 그게 아니지 않나? 본론으로 들어가지.”

“손님이 계시니 이따 하겠습니다.”

“괜찮네. 김 의원은 우리 대학 동문이자 내 후배야. 그리고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주고 있는데 이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지.”

“그렇습니까.”

김강현 의원이 명인대 출신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태하 이사장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단순한 선후배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오늘 처장급 회의에서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았습니다. 내후년까지 공격적으로 교수들을 영입할 계획입니다. 추가 예산이 100억 정도 필요한데, 재단전입금을 증액해 주셨으면 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평온한 반응이다. 차분히 젓가락을 내려놓은 이태하 이사장이 물었다.

“이름 있는 교수들을 모셔오는 것은 좋아. 하지만 교수 증원엔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네. 자네들이 증원하려는 이유는 무엇이지?”

“교육 환경을 보다 개선시키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충분한데 뭘? 명인대는 최고의 대학이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이미 뛰어난 인재들이 가득한데 무엇을 더 늘린단 말인가? 중복투자가 될까 우려되는군.”

보다 못한 민우가 끼어들었다.

“국내 최고일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최고는 아니잖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민우에게 집중되었다. 민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명인대 학생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사장님께서 말씀하셨듯 우리 대학은 최고의 대학이니까요.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투자는 끝이 없어야죠.”

“쯧,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군. 그건 이상론일 뿐일세.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은 기업과 다를 게 없지. 땅 파서 장사할 수는 없네. 자본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적어도 이명인 선생님이라면 그런 마음으로 명인대를 설립하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뭐라고?”

잠잠하던 이태하의 표정에 파문이 일었다. 민우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이명인은 이태하 이사장의 부친이다. 그리고 지금의 명인대를 만든 설립자이기도 했다.

민우는 바로 그 이름을 거론한 것이다. 남도 아닌 아들의 앞에서.

하지만 민우는 당당했다.

“저는 이명인 장학생으로 박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이명인 선생님의 교육철학에 깊은 감동을 받았었죠. 누구나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이명인 선생님께서 학교를 세우면서 한 말씀입니다.”

“자네…….”

“그런데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그 아드님께서 자본을 논하며 기업화를 논하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명인 장학생으로서 부끄러운 기분입니다.”

이태하 이사장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술기운 때문도 있겠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큰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를 친 남자가 있었다. 바로 김강현 의원이었다.

“하하하! 이것 참 걸작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선배님? 올해 갓 들어온 신임 교수가 이렇게 당찰 줄이야. 정말 물건은 물건입니다.”

“자네는 가만히 있게.”

“가만히 있고 싶지만 그래도 한 말씀 올려야겠습니다. 얼마 전 청문대 정연주 이사장을 만났는데요. 그때 이야기를 들었는데, 청문대에서는 벌써 두 자릿수의 교수 증원이 이뤄진 것 같더군요. 모두 외국계 교수들입니다. 이대로라면 명인대가 경쟁에서 밀리지 않겠습니까? 대한그룹도 투자금을 늘릴 게 분명한데 말이죠.”

이태하 이사장에게는 듣기 싫은 잔소리였다. 잠자코 있던 서지훈 총장이 나섰다.

“적어도 박 교수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비단 이명인 장학생이라서가 아니라, 중동의 석유자본을 끌어와 우리 공대를 활성화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요.”

“흐음.”

이태하 이사장의 노기가 조금 수그러졌다. 사실이었으니까. 서지훈 총장은 상대방이 할 말 없게 만드는 것에 도가 터 있었다.

“앞으로 별문제 없이 협력사업이 진행된다면 투자금만 수천억 규모에 달할 겁니다. 연구도 잘될 거고, 연구자원들도 먹고 살 수 있게 되겠죠. 그런데 고작 전입금 백억을 증액하는 것에 이렇게 보수적이셔야 되겠습니까? 단순히 교환비로만 따져봐도 박 교수가 해낸 것이 훨씬 큰데 말이죠.”

“알겠네! 자네들의 뜻은 잘 알겠어. 생각할 시간을 좀 주게. 한두 푼도 아니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야.”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사실 명인대 재단에서 100억을 출자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태하 이사장의 마음가짐이었다.

물론 전입금을 증액하는 것이 쉽게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던 민우와 서지훈 총장은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압박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계획이 성공한 것 같다. 민우는 은밀히 웃으며 서지훈 총장과 긍정적인 눈빛을 교환했다.

다시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박 교수님. 슬슬 당 회합에도 나오셔야지요? 유럽 일정이 있으시다고 해서 뒤로 미루고 있었습니다.”

“아, 그렇죠. 나가야지요. 언제입니까?”

“다음 주 수요일 저녁입니다. 당 대표님과 교육분과 위원들이 모일 겁니다. 대학 교육에 관한 토론이 있을 예정인데, 여기에 자문위원으로 참석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대답을 들은 김강현 의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꿍꿍이라도 있는 걸까?

민우는 술병을 들고, 어느새 비어 있는 김강현 의원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 * *

며칠 후 서지훈 총장에게 전화가 왔다. 기다리고 있던 전화라 민우는 재빨리 받았다.

“네, 선생님.”

― 지금 이사장님께 연락 왔다. 전입금 늘리는 방향으로 하겠다고 하시는구나.

“정말요? 잘됐네요!”

― 그렇게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야. 우리가 제시한 금액에서 많이 깎였거든.

“얼마나 깎였어요?”

― 50억.

당초 민우와 서지훈 총장은 내년까지 재단전입금 규모를 100억 이상 늘려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그 절반 규모인 50억이었다.

“많이 깎였네요.”

민우는 아쉬우면서도,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예 못 받는 것보단 낫네요. 50억이라면 좀 계획에 차질이 있겠지만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 그렇긴 하지. 성과를 보고 단계적으로 증액해 주시겠다곤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재단 사람들은 돈 관련해서 믿을 수가 없잖냐. 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알겠습니다. 그럼 증액 규모에 맞게 영입 후보들 다시 정리해 볼게요.”

전화를 끊은 민우는 바로 엑셀 파일을 열었다. 비밀번호가 걸린 파일이었다. 그리고 그 안엔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소속 대학 등이 적혀 있었다.

이 리스트는 민우가 몇 달에 걸쳐 만든 교수 영입 리스트였다.

‘예산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위축될 거 없어. 초반에 대어를 잡고, 그 성과로 증액을 요구하는 게 맞아.’

민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했다. 세드릭이라는 최종 보스도 쓰러트린 민우였다. 이제 거리낄 게 없었다.

어느덧 민우는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강의실에서 강의하거나 학회에 참석하거나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는 것 정도가 일하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 즐거움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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