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 me the money (3)
그로부터 며칠 후, 명인대 회의실에서 처장급 회의가 열렸다.
예전처럼 긴장감이 느껴지거나 하지 않았다. 이미 갑론을박을 벌였던 새로운 정책도 궤도에 진입한 상황이라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민우가 회의실로 들어오자 먼저 자리해 있던 김명현 실장이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박 교수님. 요즘 통 바쁘셔서 뵙지를 못했네요.”
민우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게요. 이제는 좀 덜 바빴으면 좋겠는데.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제 쪽에선 없었습니다. 하지만 박 교수님께서 이번에 유럽 순방에서 크게 한 건 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수학과에서 세드릭을 초청하기로 한 소문이 벌써 돌고 있는 모양이다. 민우는 웃으며 별일 아니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일찍 도착한 덕에 아직 회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김명현 실장은 좀 더 과감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 박두진 학장이라도 있었더라면 악수도 하지 못했을 거다.
“처음엔 박 교수님이 교무처장직에 오른 것에 불만을 품은 분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 불만이 쏙 들어가게 생겼더군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어요. 세드릭 씨를 완전히 우리 대학으로 초빙한 건 아니라서. 게다가 청문대가 워낙 잘하고 있어요. 이번에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 주요국에서 인재를 쓸어간 모양이더군요.”
“제가 보기에 지금 청문대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박 교수님뿐입니다.”
민우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이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건 기적 아닐까?
새로운 정책이 자리를 잡아갈수록 김명현은 기존에 보였던 비판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 협력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민우가 내놓은 정책은 시대를 앞서간 회심의 한 수였다.
덕분에 명인대에 학문적 경쟁력이 갖춰진 것은 물론, 나아가서는 학계가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는 체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시간강사에 대한 인식도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었던 그들은, 이제 명인대와 청문대를 시작으로 자신의 원하는 곳에 정착해 마음껏 연구와 강의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김명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민우의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대단하다고.
그때 문이 열리더니 회의실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의 시작 시각이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김명현이 조용히 말했다.
“밀린 이야기는 오늘 밤에 나누시죠. 시간 괜찮으십니까?”
“좋습니다. 일전에 갔던 거기서 칵테일이나 한잔하시죠.”
살짝 고개를 숙인 김명현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처장급 교수들이 모두 자리를 채우고, 이어 서지훈 총장도 회의실로 입장했다. 조금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상석에 앉은 서지훈 총장이 마이크를 가까이 댔다.
“이렇게 모인 건 오랜만인 것 같군요.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가벼운 이야기만 몇 가지 하고 빨리 끝내도록 하지요. 오늘 이사장님을 좀 뵈러 가야 해서 말이죠.”
그는 아직 추가 예산에 관한 안건이 논의되지도 않았는데 이사장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절묘한 화법에 민우는 감탄했다.
서지훈 총장의 말이 계속되었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께 한마디 전하겠습니다. 오늘 논의할 내용과 좀 연관이 되어있다고 생각해서 말이죠. 아마 다들 들으셨을 겁니다. 이번에 유럽 순방을 다녀온 박민우 처장이 소르본 출신 교수 두 분을 섭외했습니다. 두 분 다 인문학 분야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둔 분으로, 다음 학기부터 우리 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모인 교수들의 시선이 일순 민우 쪽으로 집중되었다. 호의적인 시선도 있었고, 우려스러운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호의적인 시선이 훨씬 많았다. 민우는 티 내지 않고 덤덤히 서지훈 총장의 말을 경청했다.
“게다가 박 처장은 천재 수학자로 알려진 세드릭 씨의 특강을 성사시키기도 했지요. 그는 정말 특별한 사람입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세상에 나오길 꺼렸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이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세를 떠난 천재 수학자가 머나먼 동양에서 온 학자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 말이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민우는 서지훈 총장이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칭찬할 줄은 몰랐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요컨대 인재를 포섭할 때도 진실하게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처장급 교수라면, 특히 단과대의 학장이라면 이 점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교수 임용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이니 말이지요.”
마지막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서지훈 총장은 잔소리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을 격려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 안건으로 들어갑시다. 박 처장, 시작하십시오.”
“예.”
민우는 미리 준비한 인쇄물을 펼쳤고, 마이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번 소르본에서 데려온 교수님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 명인대에서는 내년까지 최대 30명의 신규 교수자원을 스카웃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30명이나요?”
“허…….”
교수들이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으로 ‘스카웃’이라고 한다면 공개 교수채용과는 다른 특별 채용을 말하는 것이다.
공개 채용에서도 교수를 뽑고, 특별 채용에서도 교수를 뽑겠다는 말이었다.
규모가 큰 대학에서도 신규 교원을 충원할 때 10명 이상 충원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공고에 나온 정원이 그 이상이라고 해도 실제로 채용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우는 특별 채용만으로 30명이나 되는 교수들을 데려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스카웃이라면 직급이 있는 교수들을 데려오는 것일 텐데, 재정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특히 저명한 외국인 학자라면 프리미엄이 더 붙을 텐데요.”
어떤 교수가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했다. 민우가 바로 답했다.
“맞습니다. 단순 계산으로 매년 80억 정도의 추가 예산이 소요됩니다. 실제로 계산하면 90억, 혹은 100억까지 올라갈 수도 있겠죠. 워낙 분야마다 몸값이 달라서 정확히 측정하긴 어렵습니다.”
“100억…… 그건 무리입니다!”
다소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의문을 제기한 교수는 점잖게 헛기침하며 반박에 나섰다.
“가뜩이나 새로운 정책으로 예산 집행이 어려운 상황인데 여기에서 100억이나 되는 돈을 더 끌어온다고요? 그 돈은 어디서 확보하실 계획입니까? 또 학생들의 등록금을 올릴 생각은 아니시겠죠?”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지금 명인대는 크고 작은 개혁을 성공시키며 호평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등록금을 올려버리면 그 호평이 순식간에 비난으로 바뀔 것이다.
민우는 차분히 대응에 나섰다.
“시간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예산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으로 예산 부족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카웃 건은 다르죠. 완전히 새로운 예산이 필요합니다. 물론 저는 등록금이나 입학금을 인상하는 방식으로 예산을 확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재원을 끌어오는 방법도 고려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예산은 어디에서 마련할 계획이십니까? 땅이라도 파시게요?”
불만이라기보다는 다들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처장이 또 뭔가 사고를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말해도 괜찮을까. 서지훈 총장과 눈빛을 한 번 교환한 민우가 핵심을 짚었다.
“재단 이사회에 정식으로 전입금 증액을 요구할 계획입니다.”
“전입금이요?”
“이사장님께 전입금을 늘려달라고 청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허허…….”
장내가 순식간에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베테랑 교수들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처장급 회의에서 재단전입금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던 게 대체 언제 적 일이었는지.
그만큼 새로우면서도 불안한 일이었다.
“혹시 그래서 아까 총장께서 오늘 이사장님을 뵈러 간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어느 노교수가 물었고, 서지훈 총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런 건 아닙니다. 개인적인 용무로 뵈려던 거였는데, 오늘 안건이 확정되면 같이 보고드릴 생각이었지요.”
“이것 참 난처하군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10억도 아니고 100억 증액이 가능한 일일까요?”
“지금도 많이 들어오는 상황인데 증액을 요구하면 이사회에서 불쾌해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서로 웅성거리는 소리만 더욱 심해질 뿐, 유익한 의견이 모이거나 하지 않았다.
민우는 그 입장을 이해했다. 여기에서 찬성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니까.
정확히 누구라고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자리에도 재단 이사회 쪽 교수들이 출석해 있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이사장의 귀에 들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 상황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어차피 민우와 서지훈 총장은 자리까지 건 상황이라 눈치를 보지 않았지만, 다른 교수들은 생계가 걸린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서지훈 총장이 나섰다.
“음…… 저는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들한테요.”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서지훈 총장이 말을 이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여러분들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이런 안건을 발의해야 하는 박 처장도 상당히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의 한참 후배뻘 되는 처장이 자리를 걸고 발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학을 좀 더 나은 대학으로 만들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조용한 일침에 교수들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지훈 총장이 이어 말했다.
“교수협의회에서 머리띠 둘러메고 단체 농성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운영 회의에서는 좀 솔직해져도 되지 않을까요? 무엇이 두려우신 겁니까? 어차피 보고는 제가 하는 겁니다. 책임도 제가 집니다. 여러분들은 의견만 내십시오.”
“…….”
누가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김종필 학장이 손을 들었다.
“김종필 학장. 말씀하십시오.”
“아까 박 처장께서 외부 재원은 끌어오지 않을 거라고 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공대처럼 외부 투자를 받으면 숨통이 금방 트일 텐데요.”
“외부 재원이 생기게 되면 재단은 지갑을 다시 닫을 겁니다. 이번 일은 표면적으로 추가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재단전입금을 증액하기 위함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역시 그렇군요. 그런 이유라면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요.”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교수협의회에서도 의견을 모아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운영 회의 안건과 함께 간다면 효과가 더 좋을 것 같습니다만.”
동의하는 의견이 하나둘 이어졌다. 특별히 반대하는 의견은 없었다. 곧 표결이 이어졌고, 민우의 의제는 가뿐히 가결되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잘 알았으니 오늘 이사장님께 바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바로 공지하지요. 그럼 오늘 회의는 이쯤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길어졌군요. 다들 수고했습니다.”
서지훈 총장이 폐회를 선언했다. 서지훈 총장은 일어나며 민우에게 말했다.
“박 처장. 잠깐 나 좀 봅시다.”
“네.”
민우는 서지훈 총장을 따라나섰다. 서지훈 총장은 별다른 말 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다.
“어디 가시게요?”
“어디 가긴. 이사장님 뵈러 가야지.”
“……설마 저도요?”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조용히 안으로 걸어 들어간 서지훈 총장은 안 들어오고 뭐 하냐며 손짓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 약속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한숨을 내쉰 민우는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