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49화 (449/500)

Show me the money (2)

세드릭을 초청할 준비를 모두 마친 민우는 그에게 정중히 메일을 보냈다.

이번 초청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민우는 그에게 보내는 메일에서 온라인 강연을 제안했다. 매스컴을 부담스러워하는 세드릭을 위한 배려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온 답장은 의외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 당신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나는 당신이 있는 캠퍼스를 둘러보고 싶소. 왠지 특별한 게 있을 것 같거든. 매스컴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을 무서워하지는 않는다오. 나는 겁쟁이가 아니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소.

결국 세드릭은 온라인 강연이 아니라 직접 와서 연단에 서겠다고 말했다.

민우는 그 사실을 바로 서지훈 총장에게 알렸고, 서지훈 총장은 명인대 수학과 교수들을 불러 세드릭의 특강을 열게 되었다고 전했다.

당연히 수학과 교수들은 난리가 났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군요. 세드릭 그 사람이 우리 대학에 강연을 나오다니…….”

수학과 학과장의 한마디에 민우가 물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입니까?”

학과장도 명인대에서 교수를 할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어떤 규격 외의 존재를 본 것 같았다.

“당연하지요!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문학계에서 박 교수님의 특강을 성사시킨 것과 비슷한 의미가 될 겁니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지요. 세드릭 씨는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으니까요.”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확 와닿는데요.”

“하하하하.”

수학과 교수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고 있는 공과대학과는 달리 기초학문인 수학과는 최근에 별다른 투자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세드릭을 초청하게 되어 투자 그 이상의 성과를 얻게 되었다.

“세드릭 씨는 외부와의 접촉을 꺼려합니다. 준비는 수학과에서 해주시되 연락은 저를 통해서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민우가 당부했고, 수학과 교수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과장이 물었다.

“강연 범위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대강당을 활용한다면 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데, 수학과 단일 행사로 하기에는 조금 아까운 느낌입니다.”

“글쎄요.”

민우가 턱을 어루만졌고, 서지훈 총장은 먼저 나서서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민우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저는 대강당 말고 소강당에서 해보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명인대 소강당이라면 20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무대다.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있어 집중도가 높다는 특징이 있다.

뜻밖의 기회를 잘 살려보려고 했던 수학과 교수들에게는 다소 의아한 한마디였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학과장이 조심스레 물었고, 민우가 대답했다.

“이번 행사는 명인대 수학과만의 행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강당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다른 학생들이나 외부 초청 인사를 모셔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이슈가 되고 할 텐데요.”

“아뇨. 오히려 그래서는 프리미엄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올 수 있다면 그만큼 평범해지겠죠.”

서지훈 총장은 민우와 같은 의견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오히려 명인대 수학과 학생들만 들을 수 있는 강연이라면 정말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겁니다. 수학계의 반응도 더 특별해질 거고요. 명인대 수학과이기 때문에 세드릭 씨 같은 세계적인 수학자의 강연을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물론 저는 중개자의 입장에서 의견만 드리는 거고, 결정은 교수님들께서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으음…….”

교수들이 하나둘 의견을 논하기 시작했다. 반반 정도였던 의견은, 수학과 학과장이 민우의 의견을 지지하기 시작하자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그럼 학과 자체 행사로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박 교수님도 계산하신 바가 있으시겠지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드릭 씨도 기뻐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학과 교수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들도 기초학문을 하는 학자였다. 학생들만큼 세드릭의 강연이 기대될 것이다.

그래서 민우가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까지 수학과가 다른 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사회적 분위기도 기초학문보다는 응용학문에 많이 쏠려 있고요. 이번 기회로 우리 수학과에 좋은 소식이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저도 교무처장으로서 실책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 많이 쓰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박 교수님이 계시니 정말 든든하네요!”

수학과 교수들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들보다 한참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민우는 교수들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서지훈 총장은 수학과 교수들이 나가고 민우와 독대하게 되자 그 부분을 언급했다.

“이제 아주 능수능란한데? 나이 많은 교수들도 잘 구워삶고 말이다.”

“곧 처장급 회의하잖아요. 기초학문 쪽 민심도 잘 얻어 놔야죠. 그리고 기초학문을 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말이 잘 통하네요.”

“내 자리가 점점 위험해지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연임하셔야죠?”

민우는 진심이었다. 언젠가 명인대 총장 자리에 오르기야 하겠지만, 서지훈 총장의 자리를 뺏으면서까지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총장 임기는 4년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민우는 4년 정도로 명인대가 완전히 체질을 바꾸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람도 변하기 쉽지 않은데, 여러 사람들이 모인 대학은 더욱 어려울 테니까.

성공적으로 세대교체를 하기 위해서는 서지훈 총장의 경험과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연임 안 할 거야. 딱 임기만 채우고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야지. 벌써부터 강의 못 해서 몸이 근질근질거린단 말이야.”

“진심이세요?”

“내가 뭐 하러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서지훈 총장은 피식 웃어넘겼다. 저 반응을 보니 그냥 해본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민우는 서지훈 총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단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된다.

만약 자신이 총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가장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일까? 학생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떠들 수 있는 강의실의 풍경일 것이다.

그래서 민우는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잘 풀리고 있으니, 이번 회의 결과를 들고 이사장님을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재단전입금 때문에요?”

“그래. 이제 명분이 바로 섰으니까. 분위기도 나쁘지 않잖아? 무엇보다도 예산 증액이 필요한데 재단전입금을 늘리지 못하면 등록금이 올라가게 될 거야. 그러면 학생들의 부담이 커져.”

“그렇긴 하죠.”

서지훈 총장은 명인대 재단 자체의 투자금 규모를 늘리기 위해 지금까지 외부 투자에 대해 인색하게 반응했었다. 외부에서 돈이 들어오게 되면, 재단에서 지원금을 늘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새로운 정책도 자리를 잡았고 국내외의 명사들을 초청하는 상황이 되자 추가 예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재단전입금 액수를 늘리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럼 결론은 이번 처장급 회의에서 나오겠네요. 재단에 추가 전입금을 요구하는 건 곤란하다고 말하는 교수들은 없겠죠?”

“재단 쪽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학교나 교수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니 대부분 찬성해 줄 거야. 문제는 이사장님이 오케이를 해주시냐는 거지.”

“알겠습니다. 의제 준비 잘해보겠습니다.”

“성대영 과장하고 잘 이야기하면서 준비해 봐. 아무래도 예산에 대한 건 재무과장이 잘 알 테니까.”

“네.”

연구실로 돌아온 민우는 내선으로 성대영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안녕하십니까.”

뜻밖의 사람이 연구실에 찾아왔다. 민우는 의외이면서도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연구실을 노크한 것은 유진태 실장이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아, 혹시 연주가 왔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일전에 파리에 갔을 때 인사를 못 드려서요.”

“예?”

“소르본에서 아가씨와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실은 그때 제가 아가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겸사겸사 박 교수님 강연도 들었고요.”

“아. 그랬군요. 그런데 좀 의외네요. 보통 연주는 외국에 나갈 때 다른 수행비서를 데려가지 않나요?”

“저도 의외였습니다. 하지만 나쁘지 않더군요. 마치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습니다.”

그 말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민우는 직감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의미심장하게 웃은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박 교수님께서 궁금하실 것 같은 이야기를 들고 왔습니다. 요즘 아가씨께서 너무 바쁘셔서 따로 말씀을 안 드렸을 것 같아서요.”

“어떤 일입니까?”

“피에르 랑느 박사 초빙 건입니다.”

민우가 흥미롭게 웃었다. 확실히 유진태의 말처럼 연주와 그 이후로 연락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거 막 말씀하고 다니셔도 되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저는 아가씨의 사람이기도 하지만, 박 교수님의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그럼 듣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랑느 박사께서는 아가씨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민우도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랑느 박사는 소르본의 상징과도 같았으니까. 이어서 유진태는 거절 사유를 말해주었다.

“랑느 박사께서는 자신의 심장과 영혼이 소르본에 있다며 거절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는 권유할 수 없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도 다른 분들은 많이 데려왔죠? UPMC에도 들렀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열 분 정도 초빙에 성공했습니다. 가만 보면 아가씨도 사업 수완이 뛰어나십니다. 오히려 요즘은 제가 배우고 있네요.”

“참, 마냥 기뻐할 수도 없고…….”

민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물량 싸움에서는 정연주에게 이길 수 없다고 인정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자극이 되기도 했다. 누가 보더라도 정연주는 좋은 경쟁자였다.

“괜찮으시면 고민 상담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고민 상담이요? 어떤 건데요?”

“요즘 아가씨와의 관계가 조금 미묘해졌습니다. 예전하곤 좀 다르다고 할까요.”

“자세히 이야기해보세요.”

“원래는 식사를 따로 했는데 요즘은 점심도 저녁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카페도 가고 말이죠. 아가씨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긴 했는데, 조금 적응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 이러시는 걸까요?”

민우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실장님 너무하시네.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예?”

“데이트하는 거잖아요. 누가 보더라도.”

잠시 멍하니 있던 유진태가 화들짝 놀라더니 얼굴이 시뻘게졌다. 똑 부러지는 비서였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더니.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예전에 연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 보려고 한다고요. 그러면 답 나온 거 아닙니까?”

“음…….”

“지금처럼만 하세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레 더 가까워질 겁니다.”

하지만 유진태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자신감이 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아가씨와 더 가까워지게 된다면 저는 많은 분들께 비난을 받을 겁니다. 비서로서 최악이라고 말이죠.”

“글쎄요.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요?”

“대한그룹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회장님께서도 아가씨를 무척이나 아끼고 계시고 말이죠.”

“연주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고 있어요. 이 상황에서 유 실장님이 그런 일로 고민한다면 연주의 마음을 배신하는 게 아닐까요?”

민우의 말에 유진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결국 용기가 없는 건 저였군요.”

“자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연주한테 가보세요. 달달한 케이크라도 하나 사서 말이죠.”

민우는 유진태의 등을 떠밀며 밖으로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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