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48화 (448/500)

Show me the money (1)

모든 일정을 마친 민우는 타치카와 교수와 함께 귀국했다. 촬영팀은 일주일 정도 더 체류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입국했다.

「이제야 끝났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뜻깊은 경험을 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박민우 선생.」

타치카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번 기회로 타치카와 교수는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학문적으로 완성된 것 같던 그도 더 발전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 연구소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대강 계획이 잡혔습니다.」

「국제 학술대회에 집중하신다고 했었죠?」

「그래야지요. 이번 순방에서 느낀 거지만 많이 배운 사람들도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더군요.」

타치카와는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쯤 되면 한국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일본인이다.

어떤 편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었다. 그쪽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강조하곤 했었다.

민우는 그런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국제 학회는 제가 경험이 많으니 도움이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준비가 되면 국내에서도 국제 규모의 학술대회를 개최하면 좋을 것 같네요.」

「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요.」

「하하하. 절반 이상은 타치카와 선생께서 해내신 일이니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민우는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은 짐을 찾은 후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공항 앞에는 셔틀버스와 택시가 줄지어 서 있었다.

「문득 든 생각인데, 제 생각에는 온라인 인프라를 활용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온라인 인프라요?」

「휴머니티 같은 비영리 교육단체 말입니다. 최근 들은 소식인데 해외 서비스도 준비한다고 하더군요. 그쪽을 이용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벌써요? 성장세가 상당히 빠르네요.」

만약 민우 혼자서 했다면 이렇게 규모를 키우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학문적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곳이라 한 번 터지기 시작한 포텐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민우를 비롯한 휴머니티의 설립인들은 물론, 등록된 학생들까지 사회공헌 활동에 발 벗고 나섰다. 그러다 보니 인력풀은 두터워졌고 강의 분야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다 보니 학문 바깥 영역에 있는 일반 취미나 교양 같은 프로그램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꽃꽂이하는 사람, 만화를 그리는 사람 등 점차 많은 사람들이 휴머니티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재능을 맘껏 뽐내고 있었다.

휴머니티의 외부 접속자들은 새롭게 생길 강의를 기다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것은 비단 한국인만이 아니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언어를 습득한 민우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휴머니티의 외국어 능력자들이 알아서 자원해준 덕에 외국어 자막과 음성 서비스가 가능했다.

덕분에 해외에서도 조금씩 반응이 오는 추세다.

‘모두가 주인’이라는 의식이 휴머니티가 가진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였다.

휴머니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앱은 벌써 앱스토어에서 100만 이상의 다운로드수를 확보한 상황이다.

「이제는 가만히 둬도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가 갖춰졌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되네요.」

「저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거 같습니다. 저도 연구실에서 열심히 해봐야겠어요. 그럼 나중에 신세 좀 지겠습니다.」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두 사람은 게이트를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타치카와는 바로 집으로 돌아갔고, 민우는 따로 택시를 잡아 목적지를 말했다.

“명인대학교 대학본부로 가주세요.”

“어? 박민우 교수님 아니십니까?”

택시기사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예. 맞습니다.”

“TV에서만 보던 분을 이렇게 뵙게 되네요! 하하하. 오늘은 운수가 좋은 모양입니다. 제 아들이 교수님 팬이거든요.”

“아, 그래요?”

“나중에 대학원 가서 자기도 교수가 되고 싶다지 뭡니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리고는 있는데, 막무가내여서요.”

생각보다 이런 이야기는 자주 듣는다.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닮고 싶은 건 사람이라면 당연히 품는 감정이니까.

“응원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나중에 저보다 훌륭한 학자가 될 수도 있는 건데요.”

“그래야죠. 그래서 이렇게 휴일에도 나와서 손님을 받고 있네요.”

민우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평소 비상약처럼 들고 다니는 자서전 <프로페서>였다.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낸 다음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아드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어? 문희원입니다.”

정성 들여 사인한 민우가 책을 택시기사에게 건넸다. 택시기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드님께 이것 좀 전해주세요. 나중에 시간 되면 연구실로 한번 놀러 오라고 해주시고요. 명함도 넣었습니다.”

“아아…… 이것 참……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하하하. 아들놈이 정말 좋아하겠어요!”

택시기사는 마치 자신이 선물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분명 그는 집에서 좋은 아버지이자 남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목적지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택시가 경쾌하게 출발했다.

아직 저녁이 되려면 시간이 남았다. 짐이 좀 걸리적거리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서지훈 총장을 만나고 싶었다.

‘아, 참. 수빈이한테 전화해야지.’

민우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이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대학본부 근처 주차장에 도착하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수빈과 딸 윤아가 손을 흔들었다. 전화를 받은 이수빈은 굳이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

민우는 달려오는 윤아를 두 팔로 안아 들어 올렸다.

예전보다 훨씬 무거워졌지만, 여전히 민우의 눈에는 아기였다.

“다녀왔습니다.”

“그런 인사는 집에서 좀 하면 안 돼요? 무슨 유럽까지 간 사람이 쉬지도 않고 출근을 해요?”

이수빈은 참 못 말리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홰홰 저었다.

그럴 만도 했다.

민우는 느낌이 오면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면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챙겨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민우의 건강이 걱정되었을 뿐이다.

“빨리 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많아서 그래. 안 그러면 잠 못 잘 거 같아서.”

“어휴, 오빠를 누가 말릴까.”

“미안.”

“그래도 바람피우는 것보단 낫겠죠?”

“그걸 말이라고 하냐?”

캐리어를 받아든 이수빈은 자신의 차로 짐을 옮겨 실었다. 그리고 윤아의 손을 잡았다.

“윤아 데리고 오빠 연구실에 가 있을 테니까 볼일 다 보면 연락해요.”

“알았어.”

가족들과 헤어진 민우는 바로 총장실로 올라왔다. 미리 찾아온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서지훈 총장은 볼일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한 몇 달 쉬다 온 것 같은 느낌이네요.”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는 증거겠지. 앉아라. 뭐 마실래?”

“시원한 거요.”

서지훈 총장은 비서에게 음료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뒤 민우와 자리에 앉았다.

우선 민우는 소르본의 미셸과 셀린느가 교환교수직을 수락했다는 것, 그리고 이후 상황을 봐서 정교수로 임용하는 것에 동의했다는 말을 전했다.

“오, 잘됐구나. 랑느 박사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꽤 서운해하셨겠는데?”

“소르본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간다고 뭐라고 하셨어요.”

“하하하! 하긴 그렇겠지. 박사님의 수제자들이니까.”

“셀린느 씨는 괜찮은데 미셸 씨가 좀 걱정입니다. 가족들하고 같이 들어온다고 해서요.”

“음.”

민우는 미셸의 부인이 현재 임신 중이라는 것과 국내에서 출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전했다. 서지훈 총장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건 대학 차원에서 도움을 줘야 할 것 같구나. 우리 대학을 위해 어려운 선택을 한 거니까. 이 일은 내가 직접 챙기마.”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으로 오겠다고 결심했다고? 박민우. 너 생각보다 신뢰를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요. 아마 저를 못 믿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선생님뿐일 겁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이수빈 선생도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일걸? 귀국하자마자 바로 회사로 오는 사람이 남편인데.”

반박할 수 없는 한마디에 민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민우에게는 아직 꺼내지 않은 비장의 카드가 한 장 남았다.

바로 세드릭.

민우는 천재 수학자와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풀었다. 콜마르에서 있었던 일까지 전부.

“드디어 한 건 했구나.”

“해낸 건 아니죠. 결국 초빙 제안은 거절하셨으니까요.”

“교무처장으로서의 박민우라면 해낸 게 아니지만, 인간 박민우로서는 크게 해낸 거 아닌가?”

“그런가요?”

서지훈 총장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학문적으로, 그리고 성품으로 신뢰를 주기는 대단히 힘든 일이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거든. 운도 많이 필요한 일이고…… 그런데 넌 해냈잖아? 그러니 한 건 했다는 표현이 지나친 건 아니지.”

“선생님께 칭찬을 듣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아, 눈물 나려고 하네.”

“이 정도 했으면 당연히 칭찬 들어야지.”

씨익 웃은 서지훈 교수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초청할지는 생각해 봤어?”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공식 서한을 보내 대학으로 초청하는 겁니다. 이건 세드릭 씨도 동의한 일이니 별다른 문제는 없겠죠. 우리 명인대의 위상을 보여줄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롭게 하려는 협회에도 큰 힘이 실릴 거고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한 이후, 명인대는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대학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저히 은거하던 천재 수학자의 강연을 따낸다면 단번에 이슈가 될 것이다. 한국은 수학에 관심이 많은 나라니까.

하지만 민우는 과연 그것이 최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두 번째는 뭔데?”

“세드릭 씨를 초청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우리 명인대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는 겁니다.”

“온라인이라…….”

팔짱을 낀 서지훈 총장이 생각에 잠겼다. 민우가 왜 그런 고민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세드릭 씨의 부담을 줄여주려는 건가?”

“은거한 지 십 년이 넘은 분입니다. 매스컴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니까 그 정도는 배려해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우리 대학으로 초청하는 건 우리의 욕심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본다면 두 번째 계획이 적절하겠지. 세드릭 씨를 우리 대학으로 모셔오는 거 포기한 거 아니잖아?”

“그렇죠.”

민우는 세드릭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계속 문을 두드려볼 생각이었다.

“그럼 두 번째 방법으로 가지. 우리 영상팀을 현지에 보내야겠어. 오더는 내가 직접 할 테니, 세드릭 씨에게 협조해 줄 수 있냐고 연락해 봐.”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해 볼게요.”

“그런데 정연주 이사장은 왜 파리로 간 거야? 만났었다며.”

“그게…… 랑느 박사님을 스카웃하려고 간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됐는지는 아직 못 들었어요.”

“뭐?”

눈을 깜빡거린 서지훈 총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순둥순둥하던 친구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박민우. 좀 더 분발해야겠어. 이러다 뒤처지면 곤란하다고.”

“갑자기 피곤해지네요. 아, 그냥 내일 올 걸 그랬네.”

“하하하. 어서 가서 쉬어라. 다음 주 회의 때 보고할 자료 잘 준비하고.”

“옙.”

꾸벅 인사한 민우는 총장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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