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검은색 픽업트럭이 별장으로 다가왔다. 공터에 조용히 멈춰 서더니 문이 열렸다.
민우는 이미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민우에게 검은 봉투를 건넸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준비해 봤어요.」
「고마워요.」
조슈아가 씨익 웃었다.
봉지 안에 든 것은 수제 목각인형이었다. 색도 예쁘게 입혀졌는데,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이수빈에게 딱 맞겠다 싶었다.
민우가 말했다.
「어차피 내일 런던 시내로 나갈 건데 굳이 여기까지 오고 그래요? 밤이라 운전 위험할 텐데.」
「내일 민우 씨 보려고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릴 텐데 그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난 깔려 죽는 건 딱 질색이라서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진심입니다! 프랑스에서는 팬 미팅을 하지 않았지만, 영국에서는 하게 되었다는 게 그 증거죠.」
민우는 번역가로서 영국 출판 시장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영국 출판협회에서는 민우를 따로 초청해 자리를 마련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대학에서 강연도 해야 했고, 서점에서 사인회도 해야 했다.
민우가 입국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슈아는 바로 연락해서 이곳까지 차를 몰고 왔다. 아마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겠더군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어서요.」
「무슨 이야기요?」
「민우 씨만 따로 입국했다는 소식이요. 프랑스에서 이틀 정도 더 머물렀다던데, 사실일까요?」
민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혹시 조슈아는 가디언지가 아니라 영국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건 아닐까?
「그건 어디에서 들었어요?」
「그냥 지나가다 들었어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프랑스에서 뭘 하신 겁니까? 내가 아는 프로페서라면 별일 아닌 걸로 일정을 바꾸진 않았을 텐데…….」
마이크만 없었을 뿐이지 마치 인터뷰하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세계적인 언론사의 기자다웠다.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조슈아가 건넨 검은 봉투가 왠지 무겁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으니까.
「콜마르에서 누굴 좀 만났어요. 시간이 늦어서 하룻밤 신세 지느라 일정이 좀 더 늦춰졌고.」
「콜마르까지요? 역시 프로페서. 세계 각지에 애인이 있다는 소문은 거짓말이 아니었군요. 프랑스 여자들이 화끈하긴 하죠.」
「하아…… 그랬다면 이런 선물을 부탁하지도 않았겠죠?」
민우는 손에 든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이수빈에게 선물할 만한 게 없을까, 먼저 의논한 것은 민우였다. 조슈아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그냥 제 입장에서 뭔가 느낌이 와서 말이죠. 청문대의 정연주 이사장도 같은 시기에 프랑스로 입국했고.」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소르본 친구들이 이야기해줬죠. 혹할 만한 조건으로 교수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한국의 미녀가 있다고.」
「음.」
정연주가 얼마나 설득에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딱히 그녀에게 연락해보지 않았으니까.
아마 한국에 돌아가서 만난다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새교육협의회’ 일도 있고, 그녀와 만날 일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교수 영입을 경쟁적으로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영국으로 오는 길에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만약 욕심을 부려 영입에만 몰두했다면 세드릭을 명인대로 초청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는 명인대라는 이름이 아니라 박민우라는 사람을 본 거니까.
그래서 민우는 앞으로 이런 일이 있더라도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처하기로 했다.
「콜마르에서 누굴 좀 만났어요. 친구 추천으로요.」
「그곳에 유명한 인문학자가 있었던가요?」
「인문학자는 아닙니다. 다른 분야 사람이에요.」
그 말에 조슈아가 흥미를 보였다.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아직 확정된 게 없어서 말이죠.」
「좋습니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제가 가장 먼저 접하면 좋을 것 같네요.」
「뭔가 뇌물 받는 느낌이 이런 걸까요.」
「하하하! 뇌물은 아닙니다. 그 봉지에 든 건 비매품이거든요.」
「비매품이요?」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너무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정이 없어 보이잖아요?」
이런 손재주도 있었구나. 그렇게 감탄한 민우가 다시 봉지 안에 든 목각인형을 바라보았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 같은 겁니다. 내가 태어난 곳에선 집에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럼 제 것도 하나 만들어주시지.」
「프로페서에겐 낭비죠. 당신은 최고의 행운을 타고 난 사람이니까.」
씨익 웃은 조슈아가 차에 올랐다. 곧 시동이 걸렸고, 창문 너머로 손을 한 번 흔들더니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 * *
다음 날, 민우는 제작팀과 함께 런던 시내로 움직였다.
촬영장소로 정해진 곳은 과거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시상식이 열렸던 곳이었다.
최근엔 시상식 무대로 활용되지는 않지만, 예전에 민우가 상을 받았을 때 실제 배경이 되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정현 감독은 촬영장소로 이곳을 택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오늘 스케줄도 많으신데.」
한정현 감독이 말했다.
「아닙니다. 일정을 바꾼 건 저였잖아요. 양해해 주신 게 있는데 나머지는 제작팀 스케줄에 맞춰야죠.」
「그래도 사인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강연까지 하시려면 힘들 텐데요.」
「괜찮아요. 나름 재미있거든요.」
민우는 웃으며 한정현 감독을 안심시켰다.
한정현 감독이 그렇게 말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민우는 프랑스에 먼저 들렀다.
영국 국민들이 다소 실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식으로 따진다면, 해외 스타가 일본에 먼저 들렀다 한국으로 입국하는 것과 비슷하니까.
제일 먼저 와 주었으면 하는 것은 팬들의 당연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국 대중들의 눈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그만큼 민우에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우는 쿨하게 생각했다.
「강연 내용은 이미 정해두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해볼 생각이에요.」
「어떤 내용입니까?」
「영문학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영국 사람들의 자부심을 살려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죠. 프랑스에서는 좀 제 이야기만 했으니까.」
「왠지 졸릴 거 같은데요.」
두 사람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조연출을 포함한 스태프들은 이미 사전에 도착해 소품을 꾸미는 등 준비에 한창이었다.
민우는 실제 수상자였기 때문에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조언을 해줄 수 있었다. 물론 한정현 감독은 조언이 없어도 잘해 낼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민우 덕분에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형.」
무대를 둘러보던 허윤이 다가왔다.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안 돼.」
「아니 뭐 듣지도 않고 거절을 하고 그래요?」
허윤이 심술을 부렸다. 민우는 팔짱을 끼며 웃었다.
「질문이야 뻔하잖아. 내가 상을 받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물어보려는 거 아냐?」
「헐. 어떻게 알았어요?」
「계속 무대 위에서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니는데 그걸 모르겠어?」
허윤은 입맛을 다셨다. 민우는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너무 막연하네요. 이렇게 큰 무대에서 상을 받는 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안 와요.」
「너도 연기대상 같은 건 받았었잖아.」
「그거랑은 차원이 다르죠. 맨부커는 세계적인 상 아닙니까?」
「다 똑같아.」
「네?」
허윤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민우는 앞에 놓은 의자에 두 팔을 올렸다. 살짝 엎드린 자세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아른거리던 환영이 점점 선명해지더니, 마치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모든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민우는 그때 그 감정을 이야기했다.
「어떤 상을 받는 게 중요한 건 아니야. 상에 걸린 권위 때문에 사람들은 상 자체만 보지만,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지.」
「그게 뭔데요?」
「내 노력이 결실을 얻었다는 것.」
눈을 깜빡이던 허윤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민우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상을 받아서 기쁜 게 아니라 내 노력이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뻤어. 그간 고생했던 것 하나하나가 즐거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지.」
민우는 의자에서 손을 떼고 다시 허리를 폈다. 그리고 허윤을 바라보았다.
「전에 한정현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 배우는 배역을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역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알려줄 수 없는 거야. 네 질문에 답을 준다면 당장은 쉽게 연기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겠어?」
「아…….」
허윤의 눈빛이 침착해졌다. 놀라움은 어느새 사라졌다. 민우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형을 무작정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저 자신이 배역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거군요.」
「그래. 그러니까 잘 고민해봐. 너라면 저 무대에 섰을 때 어떤 감정이 들지.」
허윤은 어느새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
곧 촬영이 시작되었다. 민우는 무대에 선 배우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