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46화 (446/500)

제2의 페렐만 (5)

「사실 나는 당신의 저서를 읽은 적이 있소.」

뜻밖의 한마디가 세드릭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민우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지?」

「연구실을 둘러보는 도중에 책이 보이더군요. <존재와 영혼의 형식> 말이죠. 조금 놀랐습니다. 수학을 연구하는 분의 서재에 그 책이 꽂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민우의 말에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조금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민우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당신은 평범한 식당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저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으음, 맞소. 그 책뿐만 아니라 당신이 낸 다른 책들도 읽었었지. 책장을 봤다면 짐작했겠지만 나는 다른 분야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든.」

「확실히 그러신 것 같더군요.」

「나쁜 의도로 속이려는 것은 아니었으니, 혹시라도 마음이 언짢았다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그럼 하나 물어봐도 되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동생 레이첼이 커피를 내왔다. 아까 식당에서 마셨던 것과 같은 원두로 만든 것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민우는 세드릭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그냥 하나 물어본다고 말했지만, 지금 나오는 질문은 상당히 중요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세드릭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방금 우리가 이야기 나눈 <존재와 영혼의 형식>이라는 책에 대해선데…… 내가 알기로 당신은 루카치의 유고를 도서관에서 우연히 얻었소. 그리고 뒤를 이어 쓰기로 결심했지.」

「맞습니다.」

집필 동기는 <존재와 영혼의 형식> 머리말 부분에 상세히 적혀 있다.

설령 책을 보지 않았더라도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유고를 완성한 민우는 그것을 세상에 공개하기 위해 대규모 기자회견을 열었으니까.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끝난 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을 초청해 <존재와 영혼의 형식>을 기반으로 한 특강을 열었다.

결국 강연은 민우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단초를 제공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감탄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궁금증이 들더군. 유고를 처음 손에 넣었을 때 욕심이 나지 않았나 하는…….」

「욕심이라 하시면, 그 유고를 제 것처럼 속여 발표한다는 그런 말씀입니까?」

「맞소.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 오히려 편저로 이름을 올려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했었지.」

편저는 말 그대로 원저자가 따로 있는, 일종의 편집만 한 원고를 말한다.

민우는 유고를 완성했을 때 이 책을 편저로 내보낼지 공저로 내보낼지 고민했었다.

일례로 민우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기여한 바가 크지 않다고 겸손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출판사의 강권으로 공저로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민우가 혼자 이어서 썼고 그 원고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세드릭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책이 출간된 직후 당신이 한 인터뷰가 생각나. 보통의 학자들이라면 자신의 업적이나 저서의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할 텐데,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 그저 루카치의 무덤에 이 책을 바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했어.」

「그랬었죠. 하하하. 벌써 오래전 일이네요. 그땐 정말 기분 좋았었죠.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라고 할까요.」

민우는 회상에 잠기듯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자리를 잡은 레이첼은 그런 민우에게 반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흐흠!」

세드릭이 헛기침하자 깜짝 놀란 레이첼이 찻잔을 들었다.

세드릭이 말했다.

「처음엔 지나친 겸손이라고 생각했어. 문학을 하는 사람이니 언변에 뛰어난 거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오늘 당신을 보니 그 생각이 조금 잘못된 것 같아.」

「겸손이 지나치다는 말은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좀 거만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멋있어요!」

참다못한 레이첼이 끼어들었고, 세드릭은 또다시 동생에게 눈치를 줘야 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민우는 그때 그 감정을 다시 살려내는 데 집중했다.

「처음 그 유고를 봤을 때 욕심이 났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원고를 잘 이용하면 나도 학계에서 좀 이름을 날릴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아예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너무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이기에…….」

「그 원고를 읽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말이오?」

「아뇨. 그보다 더 아래 차원의 문제입니다. 독일어를 할 줄 몰랐거든요.」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세드릭이 두 눈을 껌뻑이기만 했다. 그러다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핫! 정말 그랬단 말이오? 믿을 수가 없군!」

「유고에 있던 쪽지를 발견했을 때도 사전을 찾아가며 겨우 번역했습니다. 그런 제가 그 원고로 뭘 할 수는 없었죠.」

「확실히 그렇긴 하지.」

「그래서 일단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고를 이어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적혀진 내용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었거든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이어서 쓸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책을 완성하게 된 겁니다.」

세드릭은 탄성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그 과정을 축약해 말했지만,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민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부터 해야 할 이야기가 본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유고를 발견한 것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더라고요.」

「어떤 의미로?」

「이 유고는 제 스승이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그 유고를 제가 완성시켰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죠. 저를 완성시킨 것은 바로 그 유고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그 원고를 사적으로 유용하겠습니까?」

「음…….」

팔짱을 낀 세드릭이 생각에 빠졌다.

이 대화 과정에서 민우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세드릭은 루카치의 유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연구 윤리와 도덕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가 과거에 학계를 떠나게 된 이유는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추측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민우는 그에 대해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커피를 홀짝이며 이어질 세드릭의 말을 기다릴 뿐이다.

「……이제야 알겠군. 알 카흐파 의장님의 아들이 왜 당신을 보냈는지를.」

「혹시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하하하! 그럴 리가. 당신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소. 하지만, 당신이 꿈꾸는 캠퍼스가 어떤 곳인지는 한번 구경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세드릭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의미였다. 얼떨결에 일어난 민우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다음에 명인대에 한번 초청해 주시오. 물론 비공개로. 매스컴에서 냄새를 맡으면 곤란하니까.」

「아, 감사합니다! 돌아가는 대로 초청장을 보내겠습니다.」

「됐소. 괜히 일 크게 벌이지 말고, 전에 메일 보냈던 주소로 메일이나 보내주시오.」

「알겠습니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이 권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자고 가시오.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은 것 같으니.」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안주 좀 더 만들어 올게요!」

신난 것은 레이첼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가게 되면 영국 일정은 하루 더 밀리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였다.

민우의 선택은 세드릭이었다.

* * *

다음 날 밤, 뒤늦게 공항에 나타난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리 접선해야 할 장소에 자얀이 나와 있었다.

원래는 민간 여객기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자얀이 전용기로 함께 가자고 해서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왜 영국으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비행기를 띄우는 건 자신에게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동네 마실을 나가는 것과 비슷할 테니까.

관련 절차는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세드릭의 집에서 하루 묵는 바람에 스케줄이 완전히 꼬였지만, 자얀 덕분에 약속했던 시간에 일행들과 합류할 수 있을 듯했다.

「어땠어?」

「뭐, 결과만 놓고 말하면 설득엔 실패했지만 그래도 유익한 시간이었어. 세드릭 씨, 조만간 한국으로 초청할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너라면 해낼 줄 알았지.」

자얀은 마치 이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은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게이트로 이동했다.

「이번 일로 좀 깨달은 게 있어.」

「뭔데?」

「내가 대수롭지 않게 한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

민우는 세드릭과 한 이야기를 요약해 자얀에게 들려주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이 정도 특혜는 누려도 된다.

「내 사소한 선택이 어떤 사람에게는 도덕적 기준으로 평가된 거지. 그러다 보니까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되어버렸네.」

「적어도 화를 내게 하는 사람보단 낫지 않나?」

「그건 그렇지.」

민우는 웃었다. 곧 두 사람은 게이트를 지나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단정한 복장을 한 승무원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초심을 잃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할까?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사람은 한결같다.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더라고.」

「한국에 이런 속담이 있었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

「알아. 욕심이 나긴 하지만 지금은 천천히 기다려야지.」

「내가 보기에 세드릭 씨도 얼마 안 남았어.」

「뭐가?」

「결국 명인대든 휴머니티든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되겠지. 내가 전에 말했잖아? 너한텐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고.」

예전에 정연주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이수빈도 그렇고 한진섭도 그렇고. 민우와 인연을 맺은 측근들은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그나저나 연주는 성공했으려나?’

정연주는 랑느 박사에게 청문대 교수직을 제안한다고 했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민우는 승무원에게 짐을 맡기고 자리에 앉았다. 곧 비행기가 출발한다는 기장의 멘트를 귀에 넣으며 핸드폰을 켰다.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발신인을 보니 미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고민이 빨리 끝났나 보네?’

설렘이 느껴졌다. 마치 복권을 긁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민우는 즉시 메일을 열었다.

장문의 메일이었다. 하지만 민우가 그 메일의 요점을 짚어내는 것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힐끗 보던 자얀이 물었다.

「뭐가 그리 좋아서 실실 웃어? 콜마르에서 근사한 아가씨 번호라도 땄냐?」

「근사한 아가씨 번호보다 더욱 근사한 걸 얻었지.」

「그런 게 세상에 있다고? 뭔데?」

「미셸 씨, 우리 대학으로 오기로 했어.」

「오, 드디어!」

자얀도 함께 기뻐해 주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가 진짜 명인대를 인수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민우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표면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반대로 구름에 가까워진다. 그곳에 비친 민우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행운을 타고 난 사람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민우는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그때 타치카와 교수가 찾아왔다.

이번 숙소는 호텔식이 아니라 별장식으로 된 곳이다. 런던 교외에 있는 굉장히 큰 곳이었는데, 1층은 스태프들이 사용하고 2층은 민우와 타치카와 교수, 그리고 배우들이 사용한다.

통나무로 인테리어되어 있는 데다 벽난로도 있어 제법 운치가 있었다.

게다가 주변은 온통 숲이었다. 새가 우는 소리는 물론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편히 쉬기 좋은 곳이었다.

「박 선생. 이제 오셨습니까?」

「제가 좀 늦었죠?」

민우가 웃으며 잠시 손을 멈췄다. 타치카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볼일은 잘 끝나신 겁니까?」

「예. 잘 끝났습니다. 생각보다 성과가 좋았네요.」

「다행입니다.」

타치카와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민우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타치카와도 자신의 가치관을 이해해준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다르다. 사공이 많은 게 아니라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큰 힘이 된다.

타치카와 교수와 한결 더 가까워진 것은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수확이기도 했다.

콜마르에서 목표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나름 일이 잘 풀렸으니 타치카와 교수에게 말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를 좀 만나고 왔습니다. 명인대로 모셔오려고 했는데, 목표를 이루진 못했지만 한번 방문해 주신다고 하네요.」

「아아, 역시 그랬군요. 참, 박 선생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부지런하십니다.」

「바쁜 거야 모두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냥 겉으로 티가 많이 나는 일을 해서 그렇죠.」

「그럴 리가요. 보직 교수인 데다 해외 강연까지 하는데, 거기에 대학 교원 스카웃까지 하는 교수는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타치카와가 단호하게 말했다. 민우는 겸손히 웃을 뿐이다.

「선생님께서도 좋은 인재가 있다면 언제든 추천해 주세요. 분야는 상관없습니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아직 박 선생 같은 안목은 없어서 말입니다.」

「하하하. 너무 겸손하신데.」

「겸손이라. 그건 선생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막내 스태프가 와서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말했다. 민우와 타치카와는 1층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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