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45화 (445/500)

제2의 페렐만 (4)

민우는 거실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연구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책이 가장 많이 모인 방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었으니까.

‘책을 엄청 좋아하나 보네.’

수학자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 있었다.

수학 관련 서적만이 아니라 교양이나 문학작품, 심지어는 대중적인 책들도 널려 있었다.

거기다가 언어도 다양했다.

‘적어도 3개 국어 이상은 하는 모양이야. 거기에 독서 범위도 상당히 넓어.’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나 교양 수준을 대충 알 수 있다.

세드릭은 수학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일반문학, 거기에 상업소설 등 엄청난 스펙트럼을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두 번 읽은 게 아닌 모양인지, 대부분의 책들이 낡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표지가 깨끗한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민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건…….”

민우는 신기하면서도 반가운 표정으로 책장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그 책의 제목은 <존재와 영혼의 형식>, 죄르지 루카치의 유고였다.

바로 민우가 이어서 완성한 책이기도 했다.

그래서 표지에는 죄르지 루카치는 물론 민우의 영문 이름도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었구나!’

이제야 세드릭의 반응이 좀 이해가 갔다.

워낙 완고한 사람이라 집으로 초대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이 책장에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자얀이 직접 이곳으로 가라고 한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되었다.

‘직접 만나서 설득하면 결과가 훨씬 좋을 테니까.’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세드릭은 아까 식당에서 루카치의 유고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때는 신문에서 본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책을 직접 읽은 모양이다.

<존재와 영혼의 형식> 말머리에는 유고의 확보 과정과 추가 집필 과정, 그리고 소감이 상세히 적혀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민우가 유고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밖에 없다.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민우는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 넣고 다른 곳을 살폈다.

사실 이 방은 연구실이라기보다는 낡은 집기들이 모여 있는 생활 공간에 가까웠다.

프티베니스에 있는 건물은 대부분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많아서 도시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마찬가지였다.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건축물 같은 느낌이 났다.

‘어? 이건…….’

민우는 책상 위에서 익숙한 느낌의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사진은 낡은 액자에 껴 있었다.

어디선가 본 사진이라서 익숙한 느낌이 든 것이 아니라,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남자 두 명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페렐만이었고, 오른쪽은 세드릭인 것 같았다.

‘분명 페렐만이야. 꽤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네.’

뒤로는 숲으로 둘러싸인 연구소의 전경이 보였다. 아마 같은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찍었던 사진인 것 같다.

슬슬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구경을 마친 민우는 세드릭의 연구실에서 나와 다시 거실로 향했다. 빈 테이블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하나둘 놓이고 있었다.

「그새 이걸 다 만든 건가요?」

「그럴 필요 있나. 미리 만들어 둔 거요. 전자레인지는 참 편리한 물건이라니까.」

세드릭은 농을 섞어 말했다.

식당에서 직접 요리도 하는 사람이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민우는 얌전히 앉아 음식을 기다렸다.

주방용 장갑을 낀 세드릭은 잘 익은 돼지고기를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게 상당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오늘의 메인 요리였다.

「원래 겉이 좀 바삭한 요리인데 데워서 식감은 별로일 거요. 그래도 우리 집에 온 손님치고는 성대한 대접을 받는 거니 서운해하진 말고.」

「이 정도면 훌륭합니다. 정말 맛있겠네요.」

「음료는 맥주 어떻소? 와인은 슬슬 지겨울 것 같은데 말이지.」

「좋습니다.」

마치 세드릭은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필요한 것을 알아서 내왔다.

세드릭은 한쪽에 놓인 기계에서 생맥주를 뽑았다.

「콜마르의 절반은 독일이나 마찬가지요. 접경에 있다 보니 역사적으로 나라가 바뀌는 일이 몇 번 있었거든. 그래서 질 좋은 맥주가 많소.」

「안 그래도 다음 목적지가 원래는 베를린이었거든요. 그런데 바로 영국으로 가게 돼서 맥주 못 마시나 싶었는데 다행입니다.」

커다란 컵에 맥주를 따라온 세드릭이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식사를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식당에서 잠깐 만났다고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되오. 다 큰 어른이 주의해야지?」

「하하하. 알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시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아까 식당에서 봤던 여자 종업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라?」

레이첼은 민우를 보곤 깜짝 놀랐다. 민우가 있어서가 아니라 손님이 집에 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찍 들어왔구나.」

「응. 좀 피곤해서 일찍 문 닫았어. 그런데 웬일이야?」

「와서 저녁이나 먹어라.」

세드릭은 퉁명스럽게 대답할 뿐이다.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 신난 레이첼은 손을 깨끗이 씻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민우를 보며 생긋 웃었다.

「또 만나서 반가워요! 박민우 씨였죠?」

「아, 예.」

「아까는 미안했어요. 도와주고 싶었는데 우리 오빠가 워낙 고집이 세서 말이죠.」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실례했어요.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귀찮게 했을 테니까요. 친구가 한번 찾아가 보라고 무턱대고 알려주지만 않았더라면 그럴 일은 없었을 겁니다.」

「누구 소개로 온 거요?」

세드릭이 물었고, 민우가 자얀 이야기를 했다. 잠시 음식을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알 카흐파 의장님의 아들이라면…….」

「잘 아는 사이십니까?」

세드릭은 어깨를 으쓱하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던 사람이지. 개인적으로 알 카흐파 의장님께는 진 빚도 있고 해서.」

「그러셨군요.」

그 빚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세드릭은 은둔하고 있는 사람이다. 주류 사회에서 자의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은 어떤 사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묻는 게 아니라, 상대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예의다.

적어도 민우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나를 찾아온 거요? 당신은 수학자도 아니고 인문학을 하는 사람인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명인대로 세계의 명사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얀에게 추천을 받았는데 세드릭 씨의 이름이 나온 거고요.」

「명인대라. 내 기억으로는 나쁘지 않은 곳이었던 것 같은데.」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돼지고기를 입에 넣었다. 민우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그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옆에서 보다 못한 레이첼이 답답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우리 오빠를 스카웃하려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워낙 고집불통에 자기만 아는 사람이라서.」

「레이첼.」

「왜요. 내가 틀린 말 했어요? 연구할 거면 대학이나 연구소에 가서 하지 왜 집에 틀어박혀서 혼자 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옛날 일은 옛날 일일 뿐이지.」

그렇게 말을 자른 세드릭이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민우가 말을 받았다.

「처음 자얀에게 소개받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당신의 행적이 페렐만 씨와 굉장히 닮아 보여서요. 논문도 이카루스 쪽에만 올리신다고 들었고요. 그런 분을 모실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찾아왔소?」

「친구가 그러더군요.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제 방식이 아니라고.」

피식 웃은 세드릭이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들이댈 만한 사람도 아닌 것 같소만.」

「세드릭 씨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궁금하더라고요. 과연 어떤 분일까. 페렐만 씨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거든요.」

「어디까지 조사해봤소?」

「당신의 필명이 ‘미스터 X’라는 것 정도만 압니다. 해결했던 몇몇 난제들도 알고요. 최근엔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의 난제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니까.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것만큼 짜릿한 건 없거든.」

그때 민우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한 말에서 어떤 힌트를 얻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래서 필명이 ‘미스터 X’인 겁니까?」

「맞소. 조금은 유치한 발상이지만.」

그런 말을 하며 세드릭은 동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탓하는 눈빛으로. 레이첼은 얼굴을 붉히고 있다. 민우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실은 그 별명을 지어준 게 저거든요. 요즘도 그 별명을 쓰고 있는지 몰랐는데.」

이건 또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민우는 웃었다.

유치하다고 하면서도 동생이 지어준 별명을 쓴다는 건 그만큼 우애가 좋다는 의미였으니까.

민우는 두 남매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내온 음식도 거의 바닥이 났고, 레이첼이 즉석에서 간단히 먹을 만한 것들을 만들어주었다.

세드릭이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당신이 궁금한 것은 어느 정도 해결해줄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을 따라 한국으로 가지는 않을 거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신 것만으로도 멋진 추억이 됐어요. 덕분에 콜마르 구경도 잘했고요.」

「……진심이오? 당신은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오?」

그 한마디에 민우는 그가 교수들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는 교수입니다. 교수 중에는 대학을 위해 일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저는 후자 쪽입니다. 세드릭 씨를 모셔가려는 것도 대학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대학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죠.」

「그게 순위를 올린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지?」

「다르죠.」

민우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느 입장에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다르거든요. 경영진 입장에서 대학을 좋게 만든다는 것은 말씀하신 대로 순위가 걸린 일일 겁니다. 혹은 돈이 되겠죠. 하지만 저는 학생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라서요. 뭐, 가끔 사람들은 왜 그리 피곤하게 사냐고 하지만 저는 그게 좋은데 어떡합니까. 사람이라면 결국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잖아요.」

세드릭이 말없이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분위기가 진지해지자 레이첼은 차를 준비하러 나가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래서 당신도 식당에서 일하면서도 계속 연구를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가 은거한 것은 학계는 물론 국가적 손실이다. 당신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는 게 있다면, 대학에 입학해서 수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당신의 강의를 한 번이라도 듣게 해주고 싶은 거예요.」

만약 민우가 저명한 수학 교수였다면 세드릭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하지만 민우는 인문학도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세드릭은 민우가 공저한 <존재와 영혼의 형식>에 씌어있던 짧은 정의를 떠올렸다.

― 인문학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구절이 떠오르자 방금 민우가 했던 한마디에 무게가 실렸다.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핀 의구심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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