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44화 (444/500)

제2의 페렐만 (3)

‘뭔가 실수한 느낌인데?’

금기어를 말한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여행객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 주민들은 분명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은근히 적대심을 보이기까지 했다.

프랑스는 인종 차별이 심한 나라 중 하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공간에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세드릭에 대해 묻기 전까진 종업원도 자신에게 친절히 대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 사람들도 세드릭이 누군지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이 식당에서 뭔가 금기어처럼 되어 버린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계속 쏟아졌다. 아무런 연고가 없어 불안할 만도 하지만, 민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럴 때일 수록 솔직하게 나가는 게 최선이다.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한 건가요?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민우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종업원이 살짝 당황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세드릭 씨라면…… 자주 오시긴 했는데 요즘은 잘 안 오시네요.」

「혹시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거처라든지.」

「그건 알려드릴 수 없죠. 알고 있지도 않지만요.」

종업원의 태도가 쌀쌀맞게 변했다. 여자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다른 테이블에서 호출이 와 그쪽으로 가 버렸다.

‘허탕인가?’

파리에서 세 시간 거리나 떨어진 콜마르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지만, 허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누구요?」

민우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주목했다. 덥수룩한 턱수염이 인상 깊은 남자였다. 나이는 민우보다 조금 더 많아 보였다.

앞치마를 두른 것으로 보아 이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보아선 주인일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한국에서 왔다고? 이젠 하다못해 한국에서도 기자를 보내는 건가? 젠장! 특종의 망령이 붙은 미친 기자들이 매번 찾아와 세드릭 씨를 찾으니 장사에 방해되잖아!」

「아…… 저는…….」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놔두지 못해서 안달이지? 고작 기사 몇 줄 쓰는 게 그렇게 돈벌이가 잘 되는 건가? 어엉? 세드릭 씨가 너희들 밥줄인 줄 알아?」

그는 민우가 이야기할 타이밍을 주지 않았다.

앞치마를 두른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깜짝 놀란 여종업원이 달려와 그를 진정시켰다.

「이거 놔. 레이첼. 이런 놈들은 궁뎅이를 확 걷어 차버려야 정신을 차린다고!」

「진정해요! 그래도 저 사람, 프랑스어를 아주 잘한다고요.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흥! 잔재주겠지. 사기를 치려면 뭔들 못하겠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민우의 프랑스어 실력이 상당함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세드릭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통역을 대동하거나 어설픈 프랑스어로 사람을 괴롭혔었다. 그간 쌓여왔던 게 한 번에 터진 것이다.

보통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동생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일단 진정하시고요. 오해입니다.」

「뭐가 오해라는 거요?」

「저는 기자가 아닙니다. 저는 한국에서 왔고, 명인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박민우라고 합니다.

민우는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민우는 프랑스어로 된 명함을 따로 만들었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강연이 있어서 프랑스에 왔는데, 우연히 친구에게 세드릭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흐음…….」

주인 남자가 뚫어져라 명함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문학을 하는 양반이 세드릭 씨는 왜 찾는 거요? 세드릭 씨는 수학을 하는 사람인데 말이지. 이거 가짜 명함 아니오?」

「아닙니다. 필요하시다면 제 신분을 증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 봅시다.」

민우는 여권까지 꺼냈다. 그리고 지갑에서 명인대학교 교직원증까지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기자가 아니라는 건 알겠군. 오해를 했다는 건 인정하겠소.」

「아닙니다. 충분히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제 잘못인 것 같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민우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익숙하지 않은 동양식 인사에 주인 남자는 표정이 애매해졌다.

그때 옆에 있던 손님이 주인 남자에게 귀띔해 주었다.

민우는 그냥 교수가 아니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학자라는 말을.

「흥, 그깟 노벨문학상이 뭐가 대단하다고!」

오히려 주인 남자는 팔짱을 끼더니 기세등등 외치는 것이었다.

「맞습니다. 게다가 제가 받은 상은 온전히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죄르지 루카치의 유고가 세상에 나오게끔 도왔을 뿐이거든요.」

「…….」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 남자의 시선이 살짝 변했다. 정확히는 루카치의 유고 부분에서. 명백했던 적대감이 사라지고 다소 흥미가 들어찬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신문에서 본 것 같군. 루카치의 유고가 출간되어 그의 묘지 앞에 놓였다고…….」

「잘 아시네요.」

「워낙 오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듣는 것은 많지.」

루카치에 대해 아는 사람인가?

민우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한국보다는 이곳이 루카치의 활동 무대와 더욱 가까웠을 테니까.

민우는 학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으스대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의 지식을 고려해야 한다.

민우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커피 맛이 훌륭하더군요. 한국에서도 이런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말이죠.」

「커피보단 와인이지. 이곳은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오. 근처에 농장도 많고 말이지. 한잔해볼 텐가? 사과의 의미로 내가 사겠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후 주인 남자가 직접 와인잔을 들고 나타났다. 간단히 안주로 할 만한 소시지도 함께 테이블에 놔주었다.

소시지는 콜마르의 명물 중 하나다. 비록 뜻하는 바는 이루지 못했지만, 민우는 주인 남자가 가져다준 와인과 음식을 즐겼다.

「잘 먹었습니다. 소란 피워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오빠가 조금 다혈질이라서. 미안해요.」

「친오빠인가 보네요.」

「맞아요.」

민우는 계산을 마친 뒤 종업원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조심스레 부탁했다.

「혹시 나중에 세드릭 씨가 오신다면 이 명함을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하지만 언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어요.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민우는 가게를 나섰다.

운하를 따라 작은 배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행객들의 즐거운 표정을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만나는 덴 실패했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좀 구경하다 갈까?’

민우는 운하를 따라 길을 걸었다. 배를 탄 사람들도 많았지만, 길가를 걷거나 노천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괜찮은 곳은 사진을 찍어 이수빈에게 보냈다. 윤아에게 보여주라면서.

그러다 보니 콜마르에서의 오후도 조금씩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세드릭 씨를 만나는 건 결국 시간이 필요한 일이야.’

낚시하는 것처럼, 물고기를 낚는 게 아니라 결국은 시간을 낚아야 한다는 사실을 민우는 잘 알고 있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연락이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저 앞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돌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기에서 또 뵙는군요. 퇴근하신 겁니까?」

그 남자는 아까 들렀던 식당의 주인이었다. 약간 귀찮은 표정을 지은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퇴근하기엔 좀 이른 시간이지. 가게는 동생에게 맡기고 나왔소.」

「그러셨군요. 댁도 이 근방입니까?」

남자는 쿨하게 뒤편을 가리켰다. 언덕 위에 세워진 집이 보였다. 기다란 줄에 빨래가 널려 있는, 그런 전형적인 가정집이었다.

거기에 노을이 지고 있어서 그런지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사진을 찍는 건 실례라, 민우는 그 풍경을 눈으로 담았다.

「저녁도 먹을 겸 맥주나 한잔하지 않겠소? 이제 집에 들어가 보려는 참인데.」

「좋습니다. 배도 좀 고프고 마땅히 갈 곳도 없는데 잘됐군요.」

「따라오시오.」

민우는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 민우가 물었다.

「참, 성함도 여쭤보지 않았군요.」

「세드릭.」

「……예?」

자신을 세드릭이라 소개한 남자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우는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차마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세드릭은 흔한 이름이니까. 동명이인이겠지?’

그러기엔 콜마르에 도착한 직후부터 있었던 일들이 마음에 걸렸다. ‘세드릭’이라는 이름이 금기어가 된 식당. 그리고 사람들의 차가운 반응 같은 것들이.

‘아니면…… 이 사람이 진짜인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세드릭이 고개를 내밀고 인상을 팍 썼다.

「왜 그렇게 멍 때리고 있는 거요?」

「잠깐만요. 설마 제가 찾던 그 세드릭 씨가 당신입니까?」

「맞는지 틀리는지는 들어와 보면 알겠지.」

그렇게 투덜거린 세드릭이 안으로 들어갔다. 민우는 그가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진짜 세드릭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뒤를 따랐다.

* * *

안으로 들어온 민우는 그가 진짜 세드릭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민우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커다란 칠판이었다.

세 개가 연이어 붙어진 칠판에는 문과 출신인 민우가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수학 기호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책상에는 정리되지 않은 종이들이 널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종이에도 펜으로 쓴 수식들이 가득했다.

최근까지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짐작도 못 했어. 설마 수염 아저씨가 그 사람이었다니!’

자얀에게 들었던 외모 묘사가 선입견을 심어준 것이다. 청안의 미남이라는 말에, 민우는 샤프하게 생긴 유럽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반면 세드릭은 그런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턱엔 수염이 가득했고, 머리는 구불구불해 너저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 같았다.

유일하게 자얀의 묘사와 일치하는 것은 바로 청안. 늦게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의 눈은 지중해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드릭 씨.」

「당신이 처음이오. 우리 집에 초대된 외지인으로 한정한다면.」

「영광이네요. 그나저나 연기가 훌륭하십니다.」

「무슨 연기?」

「식당에서 말입니다. 저는 식당 주인인 줄 알았는데요.」

세드릭은 피식 웃었다.

「그건 연기가 아니오. 살도 좀 찐 데다가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너저분하게 하고 다니니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더군. 아는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소. 식당은 소일거리로 일하고 있소. 할머니 대부터 이어온 가업이기도 하지. 그리고 진짜 주인은 내가 아니라 동생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제야 민우는 식당 단골 손님들이 왜 그런 눈으로 자기를 바라봤는지 이해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소? 먹을 걸 준비하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안을 둘러봐도 됩니까?」

「마음대로.」

세드릭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민우는 그가 연구실로 쓰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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