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43화 (443/500)

제2의 페렐만 (2)

「세드릭…….」

귀에 익은 이름은 아니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프랑스에 있다니 기막힌 우연이네.」

「지금 네가 컨택하기엔 적당하지.」

다른 나라도 아니고 프랑스라면 국경을 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 물론 프랑스가 좁은 나라가 아니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하지만 세상일이 쉽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만나려면 시간을 좀 더 투자해야 할 거야. 그 친구 지금은 알자스 지방에 은둔하고 있거든. 여기에서 한 세 시간 정도 걸리겠군.」

세 시간이라면 충분히 부담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민우가 집중한 것은 지역이나 거리 따위가 아니었다.

왜 그는 은둔하고 있을까?

자얀의 한마디는 민우의 호기심을 확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왜 은둔하고 있어? 천재 수학자라면서.」

「그게 미스테리란 말이야. 명문대 교수직을 모조리 거절하고 있어. 연구소 오퍼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언론이나 매체의 인터뷰까지 거절하고 있지.」

민우는 자얀의 이야기가 점점 진지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호기심에 읽었던 그레고리 페렐만의 일화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국적밖에 없는 것 같았다.

민우가 말했다.

「그래서 페렐만 씨 이야기를 한 거구나.」

「가만 보면 두 사람의 행적이 아주 비슷하단 말이지. 세드릭이라는 이름이 페렐만이 쓰는 필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필명이라고?」

민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갈수록 의구심이 쌓여만 갔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적신 자얀이 씨익 웃었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페렐만이 쓰는 필명이라는 건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야.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다른 인물이야. 세드릭은 프랑스인으로 알고 있거든. 나도 한 다리 건너서 아는 거지만.」

「어떻게 알게 됐는데?」

「아버지가 하셨던 사업과 좀 연관이 있어.」

그가 말하는 아버지라면 알 카흐파 의장이다. 민우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세드릭은 10년 전쯤 아버지가 설립한 수학 연구소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어. 그때 자료가 폐기되어 남아 있진 않은데, 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청안의 미남이었다더군.」

알 카흐파 의장의 말이라면 사실과 다름이 없다. 그는 그런 걸로 허세를 부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자얀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세드릭은 필즈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천재적인 수학자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주류 학계에서 완전히 잠적해 버렸어. 지금은 가끔 ‘이카루스’에 논문을 올리는 정도로 활동하고 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나도 몰라. 추측만 있을 뿐이지. 그중 가장 그럴듯한 게 페렐만의 존재야.」

「페렐만?」

「그 사람도 어머니와 같이 은거하고 있잖아. 그 이유가 수학계의 도덕적 기준에 실망해서였거든. 예전에 모 잡지에서 그런 말을 한 적 있었지.」

「도덕적 기준이라면…….」

「그건 설명을 듣는 것보다 이력을 찾아보는 게 더 빠를 거다.」

자얀이 핸드폰을 가리켰다.

민우는 바로 핸드폰을 켜서 그레고리 페렐만의 행적을 검색했다.

어떤 중국인 수학자와의 얽힌 악연이 소개됐다.

필즈상 수상자 출신인 그 수학자는 ‘푸앵카레 추측’ 난제를 해결한 페렐만의 업적을 깎아내리고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언론 플레이를 반복해 공로를 가로채려는 듯한 행동을 했다.

그것 때문에 페렐만이 주류 학계에서 떠났다는 추측이 많았다.

‘뭔가 페렐만 씨와 자신을 동일시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건가?’

그러지 않고서는 그와 비슷한 행적을 보일 리가 만무했다. 그것도 부와 명예를 거절하면서까지 말이다.

모든 맥락을 파악한 민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세드릭 씨가 이런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면 내가 데려오기도 힘든 거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민우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능력을 떠나서 나도 주류 학계의 사람이잖아. 게다가 전공이 수학도 아닌데 말이 통할까 싶기도 하고.」

자얀은 거만하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 그걸 잘 이용한다면 그 친구의 마음을 열지도 모르지.」

「애초에 만날 기회가 없다면 그런 매력도 소용없는 거잖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내가 아는 프로페서의 방식이 아닌데?」

얼마 전 정연주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또 나왔다. 민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자얀은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다. 민우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힘이 마음을 끌리게 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어쩌면 그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 그래서.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데?」

「약속을 주선해 줄 순 없지만 어디에 사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어. 만나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자얀은 메모지를 꺼내 펜으로 뭔가를 슥슥 적었다. 민우는 그가 건네는 메모지를 받아들었다.

메모 내용은 간단했다.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 그곳에 있는 어떤 작은 마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 그가 쓰는 이메일 주소도 적혀 있었다.

이메일이 적혀 있는 게 좀 의외이긴 했지만 민우는 일단 메모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냐?」

「얼마든지.」

「왜 하필 ‘미스터 X’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건 가서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를 거 같은데?」

자얀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세드릭은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의 난제를 연구하고 있어. 만약 그가 이 난제를 해결한다면 인류의 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겠지. 물론 무수히 많은 천재들이 실패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 마지막 한마디가 민우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 * *

다음 날, 민우는 조식을 먹기 위해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그 와중에 타치카와 교수와 만났다.

하지만 민우는 다른 생각에 팔려있었다.

‘그 넓은 마을에서 어떻게 세드릭 씨를 찾으라는 거야?’

알자스 지방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콜마르까지 범위를 좁힌 것, 그리고 그곳의 인구가 7만 명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파리에서 그를 찾는 것보단 낫겠지.

콜마르(Colmar)는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겠지만, 유명한 사람이라면 단서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민우는 조식을 마치고 바로 콜마르에 가서 세드릭을 찾을 계획을 세웠다.

그 와중에 자얀은 세드릭의 단골 식당 위치까지 집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다 보니 민우는 자연스레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얀은 세드릭과 잘 모른다고 했지만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있는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걸 알 수 있을까?’

민우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 확신이 어렴풋하게 시작된 것은 어제 자얀이 메모를 건넬 때였다. 메모에는 세드릭의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었다.

평소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상대의 이메일 주소를 외울 수 있을까.

물론 자얀이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긴 해도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메일을 포함해 세드릭이 자주 가는 식당의 정보, 그리고 소소한 힌트들은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얀은 왜 그와 만남을 주선해주지 않고 이렇게 힌트만 던지고 있는 걸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

자얀은 호탕하기도 하지만 사려가 깊은 사람이기도 했다. 분명 자신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나중에 물어보면 되는 거고. 그나저나 콜마르 사람들이 알려주긴 할까? 어디에 사냐고 물으면 안 알려줄 거 같은데.’

그런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걱정해 봐야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민우는 이미 어제 세드릭의 이메일로 정중히 인사말을 남겼다.

갑작스레 찾아가는 것보다 메일이라도 보내고 찾아가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박 선생.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민우의 표정을 살피던 타치카와가 조심스레 물었다.

「예? 아뇨.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근심이 있으신 것 같아서 말이죠.」

민우는 웃었다. 그만큼 타치카와 교수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고맙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조식을 먹기 위해 내려올 동안 타치카와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좀 해야 할 일이 생겼네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영국으로 넘어가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따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한정현 감독님께는 미리 이야기해두었으니 여행하시는 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먼저 영국에서 쉬고 계시면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타치카와 교수는 무슨 일일까 궁금한 표정이었다.

민우는 세드릭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만남이 성사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설레발을 치고 싶진 않았다.

설레발은 필패라는 명언도 있으니.

타치카와 교수와 조식을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민우는 영국에서 주의할 일들, 그리고 알아두면 좋은 것들을 공유해 주었다.

* * *

콜마르역에서 내린 민우는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미리 찾아둔 식당 위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연사박물관 근처에 있는 프티베니스(Petit Venice). 일단 그쪽으로 가자.’

콜마르는 독일과 맞닿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라인강의 지류가 흐른다. 그것을 이용해 운하를 만들어 베니스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바로 ‘프티베니스’였다.

자얀이 지목한 식당은 운하 근처에 있는 노천 상점 중 하나였다.

예전이었다면 사람들에게 물어서 찾아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지도 앱을 쓴다면 걸리는 시간은 물론 동선까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민우는 고즈넉한 마을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플로라’라는 이름의 식당 간판이 눈에 보였다.

민우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여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건넸다. 민우는 언어의 장벽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능숙하게 커피를 주문했다.

워낙 원어민 같은 발음에 종업원이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인이었어요?」

「아뇨. 한국에서 왔습니다.」

「오, 그렇군요. 발음이 멋져서 물어봤어요. 실례했네요.」

「아닙니다.」

종업원이 돌아갔고, 잠시 후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풍경과 잘 어울리는 좋은 향을 내는 커피였다.

「잠깐만요.」

「더 필요한 게 있으실까요?」

「이곳에 자주 오시는 분들이 많죠?」

「그럼요. 우리 식당은 프티베니스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거든요.」

여자의 미소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냥 종업원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을 좀 찾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일행이 있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이름은 세드릭. 수학자입니다. 여기에 자주 오신다고 들어서요.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은데…….」

그때 식당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일제히 민우를 바라보았다.

깜짝 놀란 민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뭔가 하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