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42화 (442/500)

제2의 페렐만 (1)

프랑스에서의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틈틈이 찾아온 손님들을 상대하고, 또 드라마 촬영 현장을 오가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 떠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지체돼서 독일 스케줄은 뺐습니다. 우린 바로 영국으로 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됐군요.”

독일에 들르지 못한 게 좀 아쉽긴 했지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로 돌아온 한정현 감독이 직접 방까지 찾아와 향후 일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스케줄상 몇몇 일정을 건너뛴다고 말했다.

“영국 일정이 끝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죠?”

“네. 그렇게 될 겁니다. 굳이 다른 지역으로 로케를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제작비도 아끼고 체력 소모도 막고 좋죠. 아무래도 피로도가 쌓이면 좋은 씬이 나오지 않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국에서 좀 일찍 귀국해야 할 것 같네요.”

“엇,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한정현 감독이 걱정스레 물었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생긴 건 아니고 중간에 좀 들를 데가 있어서요.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는 건 아니고 좀 경유해서 갈 곳이 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굳이 어디로 간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한정현 감독도 깊게 캐묻지 않았다.

민우가 경유하려는 곳은 아랍에미리트였다.

우연히 정연주를 만났던 그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민우는 바로 자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좀 볼 수 있냐고 물었는데 자얀은 흔쾌히 승낙했다.

오일 머니를 끌어오기 위해서가 아니다. 민우는 자얀에게 인재를 추천받을 계획이었다.

지금 자얀의 국부펀드에서 명인대 공과대학에 투자가 들어간 상태이니 교환교수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장기적으로는 아예 교수자원을 데려오는 방안도 세우고 있다.

교환교수 프로그램은, 결국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수자원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능성이 있는 인재를 데려다가 키우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자얀에게 면담을 청한 것이다.

민우는 이공계에 인맥이 없다. 그렇다고 이공학적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인재를 데려오는 것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자얀은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인맥을 쌓은 세계적인 부호다. 그가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게 민우의 생각이었다.

“혹시 제가 일정이 끝날 때까지 제작진과 함께해야 합니까? 귀국할 때 기자회견이라든지…….”

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는데, 한정현 감독은 두 손을 홰홰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중요한 일정은 여기에서 모두 끝났으니 편히 움직이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다행이네요. 여기까지 와서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하하하! 마음 같아서는 교수님을 계속 촬영장에 붙잡아두고 싶습니다. 배우들이 교수님을 더욱 존경하게 된 것 같아서 말이죠.”

“갑자기요?”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간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는 말이 묘하게 들렸다.

“소르본에서 강연하신 거 말입니다. 그 모습에 압도당한 건지, 주연 배우들이 더욱 기를 쓰고 연기에 매진하고 있어요.”

“그래요? 크게 달라진 건 못 느꼈는데…….”

“제가 영화판에서 하루 이틀 구른 게 아니잖습니까. 눈빛만 봐도 알지요. 특히 허윤 배우가 그래요. 욕심이 많은 친구라서 그런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듭니다. 컷을 제가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한다니까요?”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대단한 게 아니라니요?”

그 말에 한정현 감독이 정색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의 정색이었다.

“그때 강당에서 기립박수가 터져 나오는 그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말은 못 할 겁니다. 전율이 느껴지더군요. 한국 사람이 그런 대단한 무대에 서서 찬사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오히려 한정현 감독이 허윤보다 더 크게 감화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빛도 깨달음을 얻은 배우들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감독님도 곧 칸에 초청받아 기립박수를 받으실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아! 그건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요. 아무튼 덕분에 좋은 구경 했습니다. 런던에 가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쉬십시오.”

정중히 인사한 한정현 감독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민우는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타치카와 선생인가?’

요 며칠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사이가 썩 가까워졌다. 원칙주의자에 가까운 타치카와 교수가 농담을 걸어올 정도로 말이다.

타치카와 교수는 민우가 외국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한 말에 감동했다.

일본에서는 그렇게 선뜻 도움을 주겠다고 하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우가 문을 열었다.

「마침 방에 있었군.」

「헉!」

민우는 깜짝 놀랐다. 근사한 정장을 걸친 자얀이 자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기 때문이다.

「……뭐야. 프랑스에 있었던 거야?」

「아니. 네가 전화할 때는 집에 있었어. 전화 받고 바로 날아왔지. 대체 우리 프로페서가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연락은 좀 하고 오지 그랬어? 무슨 옆 동네 산책하듯 나오냐.」

「뭐 어려운 일이라고. 전용기 띄우면 그만인데.」

민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확실히 사는 세계가 다르긴 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비행기 티켓부터 고민할 텐데.

「돈 많아서 부럽다 야.」

「하하하하!」

멋대로 들어온 자얀이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뭐 마실 거 좀 없나?」

「와인 있어.」

「그거라도 좀 마시자. 목이 타네.」

민우는 글라스를 두 개 챙겨 테이블에 놓고 와인을 따랐다. 다리를 꼬고 앉은 자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와인을 음미했다.

민우가 물었다.

「요즘 분위기는 어때? 공대 쪽 투자한 거.」

「환상적이야. 내가 왜 이제야 투자를 했나 싶을 정도였어. 특히 팹리스(fabless) 분야 벤처 설립 건이 아주 흥미로웠지. 빨리 자리를 잡아서 미국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

자얀은 미국에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산유국 지도자라면 대부분 그렇다.

미국에서 촉발된 ‘셰일 혁명’ 이후로 중동 석유산업이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산유국에서는 빠르게 산업 구조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중 가장 두각을 보이는 것이 자얀의 아랍에미리트였다. 그는 앞으로 세계의 기술경제를 선도할 아이템인 인공지능과 초고속 통신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명인대 공대와 손잡고 팹리스 벤처를 만든 것도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팹리스는 반도체를 설계하는 회사를 말한다.

클라우드 시대가 무르익고, 차세대 산업인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며 반도체 산업도 비메모리 반도체가 각광 받고 있다.

그래서 자얀은 미국 중심의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침투해 지각 변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수십 년간 노하우를 축적한 미국의 팹리스들은 그 기술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얀은 벤처 설립 이후 공격적인 투자를 전개하고 있다. 0에서 1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1에서 10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인수합병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자얀은 매물로 나온 업계 중상위권 팹리스를 인수하며 기술력을 키워갈 계획이었다. 여기에 명인대가 힘을 보태고 있다.

「그래도 잘되고 있다니 다행이네.」

「뭐야. 보고 못 받고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실제 분위기는 보고서로 알 수가 없잖아.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확실하지.」

고개를 끄덕인 자얀이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민우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용건은?」

「뭐가 그리 급해? 숨 좀 돌리지.」

「급해 보이는 건 오히려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일침을 맞은 민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인재 추천을 부탁했다. 그 배경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모두 설명했다.

신중히 듣던 자얀이 턱을 쓸어 만졌다.

「으음…… 정연주 이사장이 그렇게 세게 나온단 말이지?」

「나도 웬만해선 이런 부탁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쪽 인맥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부탁하는 거야.」

「인문학이 모든 학문의 기본이긴 해도 요즘 응용과학 쪽은 세분화가 심하니까. 같은 공학을 전공했다고 해도, 분야가 조금이라도 갈리면 서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지.」

「데려올 만한 사람이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자얀이 씨익 웃었다.

민우는 그 표정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밀레니엄 문제에 대해 들어봤어? 한국은 수학 강국이니 한 번이라도 들어봤겠지.」

「세계 7대 수학 난제 아닌가?」

「맞아. 그중 푸앵카레 추측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정상적인 교과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이야기였다. 민우는 오래전 기억을 되짚어야 했다.

「위상수학 분야라는 것 정도? 우주의 형태를 추측하는 문제였던 걸로 기억해. 어떤 천재 수학자가 해결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자얀이 손가락을 튕기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민우는 그제야 자얀이 왜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밀레니엄 문제 중 ‘푸앵카레 추측’의 경우 비교적 최근에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아직 생존해 있다.

「2000년대 초, 홀연히 세 편의 논문을 발표해 그 문제를 해결한 천재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

「설마 그 사람을 명인대로 데려가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민우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레고리 페렐만은 각종 제안과 수상, 그리고 상금까지 그 모든 것을 거절하기로 유명한 수학자였다. 심지어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기회도 고사하고 말았다. 우스갯소리로 ‘거절왕’이라고 불린다.

자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페렐만을 데려오는 건 무리겠지. 애초에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지금 나 놀리는 거냐?」

「하하하. 진정하라고 친구. 대신 그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어. 연구소에서 페렐만과 같이 일했던 수학자인데, 각종 난제를 독특하게 해결하기로 유명하지.」

「수학자라…….」

「혹시 ‘미스터 X’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마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름이다. 이름이라기보다는 별명 같은데, 어느 쪽이든 들어본 적은 없었다.

「역시 모르는군. 그래도 너도 세계적인 연구자니까 ‘이카루스’는 들어서 알고 있겠지?」

「알아. 예전에 한번 써본 적은 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이카루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연구자들의 아이디어 뱅크다. 논문이나 연구물을 자유롭게 업로드해서 공유할 수 있는 일종의 사전 출판 시스템이다.

정확히는 코넬대학교에서 만든 ‘아카이브(arXiv)’의 단점을 개선한 시스템이다.

‘이카루스’에서는 실로 다양한 논의들이 오간다.

물론 자유도가 높은 만큼 비과학적인 내용이 올라오는 경우도 많지만, 보증인이 필요한 ‘아카이브’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미스터 X’는 그곳에서 활동하는 천재 수학자야. 음지를 활보하는 히어로 느낌이라고 할까? 본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나는 그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지. 본명은 세드릭. 이곳 프랑스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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