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41화 (441/500)

뜻밖의 경쟁 (3)

민우가 연단에 오르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모든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민우를 맞이했다.

민우는 손을 흔들며 앞에 마련된 강단에 섰다.

마이크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본은 없었다.

민우는 이번 강의를 포함해서 수백 회 이상의 강연을 소화한 프로 중의 프로였다. 대본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은 프레젠테이션도 준비해오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잘 만들어진 도표가 아니라 진실된 목소리라고 확신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민우는 원어민 수준의 능숙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대중이 더욱 환호하기 시작했다. 민우는 프랑스인들, 특히 소르본인들이 얼마나 프랑스어에 대한 애착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여기는 인문학 관련 학과가 모여 있는 소르본 캠퍼스다.

먼 동아시아에서 날아온 한국인 학자의 평범한 한마디 한마디는, 소르본 학생들의 자존심과 긍지를 살려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온 느낌이네요.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먼저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소르본대 관계자분들과 피에르 랑느 박사님께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네요.」

다시금 박수가 쏟아졌다.

굉장히 넓은 홀이었다. 박수는 마치 천둥 번개가 치는 것 같은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모인 사람들도 수백이 넘었다.

이곳은 소르본대에서 얼마 전에 공사를 끝낸 신축 대강당이었다. 수용 인원만 2천 명 이상에 달한다.

민우는 비연예인 출신으로 그곳을 가득 채운 첫 번째 인물로 기록되었다.

정확히는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무대 뒤쪽의 빈 공간에는 자리를 잡지 못한 학생들이 늘어서 있었고, 빈 계단에도 학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소르본 대학교의 재적 학생 수는 약 5만5천여 명이다. 이 중 오늘 참석한 2천 명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중엔 한정현 감독과 <프로페서> 드라마의 주연들, 그리고 정연주와 유진태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대에 선 민우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저 옆집 형 같은 느낌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완전히 스타였다. 그것도 학문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니 더 대단해 보였다.

특히 허윤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메모지와 필기도구까지 준비했다.

민우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그의 제스처나 발성 등 연기에 참고할 만한 것들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와 주셨네요. 사실 강연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는 이렇게 큰 곳에서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긴장되네요.」

2층까지 이어진 관객석을 한번 바라본 민우가 마이크를 쥐고 무대 앞으로 나왔다.

「오늘은 격식에서 벗어나 조금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최근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신 분들도 많으실 테니까요. 많은 분들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나 걱정 없이 학문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민우는 이어 한국의 실정을 전했다.

대학원생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물론, 학위 취득 후 앞길이 막막한 현실을 전했다.

「물론 이곳도 그렇고 다른 대학도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세계적으로 학력 인플레가 심해져 학부 졸업생들도 취업하기가 어려운 시대니까요. 하지만 제가 관심을 둔 것은 취업의 문제가 아닌, 학자로서 존엄성을 지켜줄 최소한의 울타리입니다. 이건 대학의 정책적 문제가 될 수도 있고, 학자들의 윤리의식적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요. 요는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어떻게 사람답게, 그리고 학자가 어떻게 학자답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턱을 괴든 팔짱을 끼든, 민우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민우는 다시금 확인했다.

지금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일이 비단 대한민국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청중들도 자신의 문제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지난 이야기를 해볼까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고 노벨상까지 받았을 때는 제 인생도 완성되어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조금 안일했었죠. 하지만 현실은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줬어요. 여전히 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이 생활고에 시달립니다. 이토록 풍족한 현대사회에서 말이죠.」

많은 청중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민우는 좀 더 확신을 담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물론 학생들과 학자들에게 무차별적인 복지를 주자는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들이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무대를 열어줄 필요는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선학의 도리가 아닐까요? 이곳의 사정엔 밝진 않지만, 적어도 제가 온 곳에서는 관습이라는 교묘한 단어로 포장된 악습이 제법 많습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민우는 그간 있었던 일을 나열했다. 돌이켜 보면 한 학기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명인대에 부임한 지 10년은 지난 것 같은데, 이제 한 학기가 지났다는 것이 실감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열심히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사회의 닫혀가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학자라면 대학이나 연구실에 틀어박혀 논문만 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서지훈 총장 덕에 그 사실을 깨달았고, 반면교사인 백성웅 전 총장을 보며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이렇게 큰 무대에서 백성웅 전 총장의 이름을 거론할 순 없었다.

그것은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나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저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여당에서 정책 자문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당의 자문위원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계에 입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만큼 정치와 가까운 사람들도 없으니까.

국회의원이나 장차관급 인사를 보면 대학교수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객석에 앉은 몇몇 사람들은 옆 사람과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

학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자랑했던 민우가 여당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본받으며 달려왔던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선사하기엔 충분했다.

민우도 그 기류를 읽을 수 있었다.

「여러분들께서 걱정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예전에 목표하던 대로 순수한 학자로 남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제가 외면해야 하는 진실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민우의 진솔한 한마디에 수군거리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민우를 향한 사람들의 존경심엔 조금의 변화도 없이 굳건했다.

그래서 민우의 호소는 좀 더 마음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저는 학자이기 이전에 인간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그런 문제들을 묵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파도를 타는 것처럼 삽시간에 관객석을 장악해 버렸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2층까지 가득 채운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민우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또다시 기립박수가 터져 나온 것이다.

민우는 박수 소리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제가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세웠던 목표는 이것이었습니다. 르네 웰렉과 오스틴 워렌이 공저한 <문학의 이론>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죠. 왜 한국의 이론은 세계에 소개할 수 없는 걸까? 그리고 자연스레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거장이 돼서 한국인도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아,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유치한 결심이긴 했네요.」

민우가 멋쩍게 웃자 관객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없이 진지해지려던 분위기에 약간의 여유가 더해졌다.

민우가 말을 이었다.

「우연히 접하게 된 루카치의 유고를 완성하고, 그 결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인생의 제2막이 올랐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아직 제 인생은 1막이었습니다. 2막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의문이 샘솟았다.

하지만 애정 어린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고 있던 정연주와 허윤은 왜 그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민우가 직접 들려주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누구나 걱정 없이 학문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열리기 전까진 제 인생은 여전히 1막입니다. 과정은 험난할 겁니다. 제가 하려는 일들이 실패할 수도 있지요.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클 겁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사회라는 거대한 틀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인생의 1막을 헤매다 눈을 감아야겠죠.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저기 보일 듯 말 듯 펼쳐진 학문적 유토피아를 위해서 말이죠.」

다시금 기립박수가 시작됐다. 민우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북받쳐 오르는 감동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동포도 아닌 생면부지의 외국인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해준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다.

「언젠가 제가 다시 이곳에 찾아왔을 때…… 여러분들에게 제가 드디어 인생의 2막을 시작하게 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민우는 무대 앞으로 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 이후 질의응답 순서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바로 시작하지 못했다.

드넓은 대강당을 울리는 박수 소리가 쉬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모든 행사가 끝나고 민우는 타치카와 교수와 합류했다. 이미 어제 ‘소르본의 밤’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따로 뒤풀이는 없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민우가 인사를 건네자 타치카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군요. 큰일입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주 인상 깊은 강연이었어요. 적어도 오늘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국과 일본의 영토분쟁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갖게 됐을 거예요. 누가 떼를 쓰고 있는지 말이죠.」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좀 놓입니다.」

타치카와 교수 정도의 내공이라면 이런 무대에서도 크게 긴장하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언어적 장벽이 컸다. 거기에 동시 통역되는 상황이라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이 될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걱정을 불식시킬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그래도 공부가 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공부가 부족하다뇨? 선생께서 부족하시다면 저는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겁니다.」

「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외국어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랑스어로 연설하는 박 선생의 모습을 보니 감탄밖에 안 나오더군요.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타치카와 교수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세상 부러운 것 없이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상황이 되자 민우가 해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외국어 공부가 필요하시면 제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다른 건 몰라도 외국어는 자신 있습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타치카와 교수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민우에게 갚아야 할 빚이 하나 더 늘었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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