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경쟁 (2)
다음 날, 민우는 소르본 캠퍼스로 향했다.
오늘은 타치카와 교수와 따로 움직였다. 강연하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민우는 홀로 캠퍼스로 이동했다.
미리 전달받은 장소로 가니 카메라와 조명을 들고 있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부터 다들 고생하네. 날도 더운데.’
선선한 봄날이었으면 촬영하기 좋았을 텐데, 오늘은 아침부터 찜통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민우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소르본 캠퍼스 학생들인 것 같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었고,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소르본 대학교는 7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그런 곳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교수님! 잘 쉬셨어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예. 덕분에 잘 쉬었어요. 촬영 분위기는 어때요?”
허윤의 매니저에게 슬쩍 물었다. 허윤과 평소 친하게 지내는 만큼 그의 매니저도 민우를 형처럼 잘 따랐다.
“괜찮습니다. 컷도 많이 안 나오고 순조로워요. 아직 촬영이 많이 남긴 했지만요.”
“다행이네요.”
“대학본부에서도 협조를 잘 해줘서 그런지 감독님도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요. 원래는 허가를 내줘도 협조는 잘 안 해준다던데.”
“그래요?”
“네. 아까 감독님께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협조를 잘해주고 있다고 하네요.”
아마 촬영팀과 대학본부 사이에 자신이 끼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우는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고, 오후에 있을 강연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촬영 잠깐 멈춘 거죠?”
“아,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민우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허윤이 대본 연습에 몰입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냐?”
“형!”
허윤이 활짝 웃었다.
또래 스타들은 차나 대기실에 편히 앉아 대본을 읽곤 하는데, 그는 현장의 느낌을 중요시하는 배우였다. 조금 힘들더라도 무대에 나와 대본 연습을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연기는 풍부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중후함이 느껴진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평가였다.
한마디로 그는 노력하는 배우였다.
민우는 그가 <프로페서>의 주연을 맡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여기까지 오셨는데 빈손으로 오신 겁니까? 귀여운 동생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고 있는데 말이죠!”
민우의 손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곤 한소리 했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한국에 가면 촬영장에 간식차 보내줄 테니 좀 참아. 너만 챙길 수 없어서 일부러 안 사 왔어. 손이 두 개뿐이라서.”
“이럴 때 좀 편애도 해보고 하셔야지. 그렇게 세상 공평하게 살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그냥 평생 재미없게 살란다. 그런데 보영 씨는?”
허윤은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파트너 역인 김보영은 그늘에서 휴대용 선풍기를 돌리며 쉬고 있었다. 녹초가 된 것 같다.
민우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인사하자 깜짝 놀란 김보영이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누가 보면 대선배라도 온 줄 알겠다.
“그런데 촬영장엔 무슨 일이에요? 형 강연은 오후라고 들었는데요.”
“그래도 한 식구인데 얼굴은 비춰야 하지 않겠냐.”
“에이. 형 바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시간 쪼개서 힘들게 온 프랑스인데 파리 시내 좀 둘러보면서 머리라도 식히시지.”
“약속했잖아. 드라마에 신경 쓴다고. 뭐 내가 연기자도 아니고 여기 와서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말 상대라도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하하하. 그럼 잠깐 커피나 한잔하러 가실까요? 보영 씨 데리고요.”
“곧 촬영 들어가는 거 아냐?”
“씬 수정 볼 게 있어서 좀 길어질 거 같아요. 한 시간 정도 쉬어도 된다고 했으니 가시죠!”
허윤은 민우와 김보영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라기보다는 소르본 캠퍼스 학생들이나 방문객들이 가볍게 쉬었다 갈 수 있는 휴식 공간이었다. 커피는 민우가 샀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보영은 대한민국의 톱스타다.
프랑스의 젊은 남자들이 그녀의 청순한 미모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 만남을 청했지만, 김보영은 정중히 거절했다.
물론, 그녀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민우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에서만 인기가 있는 게 아니었네요. 대단합니다. 보영 씨.”
민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 참. 부끄러워요. 방송이라도 켰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무슨 방송이요?”
“개인 방송이요.”
“아아, 무투브 크리에이터로도 활동하고 계시죠?”
김보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100만이 넘는 구독자수를 보유하고 있는 인기 크리에이터이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무투브 동영상에 유료 광고를 넣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영상을 보는 중간에 광고가 들어가면 흐름이 깨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팬들은 더욱 열광했다.
“맞아요. 실은 오늘쯤 브이로그 찍으려고 했는데 카페에서는 좀 어려울 거 같네요.”
“오히려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실시간 헌팅 실황! 다들 누나의 매력에 푹 빠질 거라고.”
“안 돼! 부끄러워.”
혼자 있다면 별문제 없겠지만, 아무래도 통역을 민우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니 배는 부담스러울 거다.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니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연인이라기보다는 친남매 같은 느낌이었지만 관계가 좀 더 깊어진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프로페서> 시즌 1이 방영될 때도 열애설이 많이 나곤 했었다.
“참, 교수님. 하나 부탁드릴 게 있는데…… 나중에 시간 괜찮으시면 제 방송에 한번 오실 수 있으세요?”
“방송이요?”
김보영이 기대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맥락에서 방송이라고 한다는 건 공중파가 아니라 그녀의 무투브 채널일 것이다.
“음, 저보다는 윤이가 나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럼 구독자수도 더 늘어날 거 같은데.”
“형. 제가 누나 방송에 나가면 난리 날걸요?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안 그래도 소속사에서 조심하라고 했어요.”
“그래?”
“형이랑 같이 나가는 거라면 몰라도 말이죠.”
왠지 처음부터 설계된 함정에 빠져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씨익 웃는 허윤의 표정을 보니 말이다. 김보영은 옆에서 좋다며 웃고 있다.
역시 죽이 잘 맞는 남매다.
이렇게까지 청하는데 거절하기가 좀 그랬다.
“나중에 초대해 주시면 한번 가볼게요. 그런데 제가 막상 가서 할 만한 이야기가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이번에 같이 해외 촬영 왔잖아요. 비하인드 스토리 풀면 될 거 같은데요? 그리고 교수님은 강연도 하시니까 그런 썰도 풀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괜찮은 생각이네요. 윤이 넌 시간 괜찮아?”
“없더라도 만들어 봐야죠. 두 분의 명령이라면!”
그때 뜻밖의 인물이 민우의 시야에 잡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라 깜짝 놀란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왜 그래요?”
“잠깐 이야기들 하고 있어 봐.”
정연주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메뉴를 주문했다. 혹시 그녀를 닮은 사람은 아닐까 싶었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민우가 옆에서 어깨를 툭툭 쳤다.
“어? 오빠.”
깜짝 놀란 건 정연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여기에 민우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어쩐 일이야?”
“일이 좀 있어서 어제 입국했어요.”
“그럼 연락하지.”
보통이라면 정연주가 먼저 연락해서 식사라도 하자고 할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조금 갑작스럽게 결정돼서요. 그리고 오빠 학회에 강연도 잡혀 있어서 바쁜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요.”
“얼굴에 다 써 있어 인마. 솔직하지 못하긴. 나에게 알리지 않고 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어…….”
정연주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역시 오빠는 못 속이겠네요. 맞아요. 오늘 여기에서 만나기로 한 분이 계셔서 왔어요. 오후에는 겸사겸사 오빠 강연도 들을 거고요.”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네.”
소르본 캠퍼스에서 잘 안다고 할 만한 사람은 딱 세 명이다. 랑느 박사와 그의 제자인 미셸과 셀린느 정도.
그렇다면 정연주가 만나려는 사람도 그들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청문대 이사장으로서 스카웃 제안을 하려는 거겠지.
하지만 이번에도 민우가 한발 앞섰다. 이미 어제 셀린느의 허락을 받은 상황이고, 미셸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미셸 씨하고 셀린느 씨하곤 어제 이야기 다 끝났어.”
“한국으로 오시기로 결정된 거예요?”
“셀린느 씨는 결정됐고, 미셸 씨는 고민 중이야.”
“그렇구나. 잘됐네요!”
“응?”
뭔가 반응이 이상했다.
정연주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면 보통 저런 표정은 지을 수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민우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너도 미셸 씨하고 셀린느 씨 스카웃하려고 온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정연주의 표정엔 여유가 가득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처 고려하지 않은 변수 하나가 생각났던 것이다.
“너 설마…….”
“맞아요. 저는 랑느 박사님께 제안 드리려 왔어요.”
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랑느 박사는 소르본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가 소르본을 떠나 다른 대학으로 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와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던 정연주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랑느 박사가 솔깃해할 제안을 들고 입국했다.
“어제는 UPMC에도 들렀다 왔어요. 두 분 정도 청문대로 모셔가려고요.”
“UPMC?”
“소르본 이공학부요.”
정연주의 첫 일정이 UPMC였다면 소르본은 서브 퀘스트 정도일 것이다. 그 점을 고려해본다면 오히려 한발 늦은 것은 민우 자신이었다.
민우는 아직 소르본 캠퍼스에서만 인재를 탐색하고 있었고, UPMC 쪽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반면 연주는 과학고 재학 시절 세계 명문대의 입학 허가를 받은 사람이다. 지금까지도 학계 인맥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공계 인재를 섭외하는 것은 훨씬 유리했다.
“하, 보기 좋게 한 방 먹었네.”
“아직은 아니에요. 랑느 박사님이 설득에 응해줄지가 걱정되어서요.”
“어려운 일이긴 해.”
아무리 좋은 조건을 건다고 해도 랑느 박사는 흔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부와 명예, 지위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연주는 활짝 웃었다.
“그래도 한번 해보려고요.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잖아요?”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설마요.”
민우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서지훈 총장에게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한 상황.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좀 서둘러야겠다. 자얀에게 전화 좀 해야겠어.’
그사이 연주가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그녀는 이따 보자는 말을 남기곤 카페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