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경쟁 (1)
그날 밤, 호텔에서 ‘소르본의 밤’이 열렸다.
정기 행사가 아니라 임시로 열리는 행사였기 때문에 예전보다는 참석 인원이 적었다. 하지만 동행한 타치카와의 눈엔 모든 게 새롭게 보였다.
「이런 모임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어요!」
타치카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각보다 모임이 대단해 보였던 모양이다.
「정기 모임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분야도 정말 다양하고요. 제가 알기로 오늘은 소르본 캠퍼스 쪽에서만 왔을 겁니다.」
소르본 캠퍼스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단과대학이다.
소르본 대학교는 총 세 개의 캠퍼스로 구성되어 있다.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소르본(Sorbonne)’, 그리고 이공계가 주축이 되는 ‘피에르 에 마리 퀴리(Pierre et Marie Curie, UPMC)’, 마지막으로 의학부인 피티에 살페트리에(Pitié Salpêtrière)가 그것이다.
정기 모임 때는 세 캠퍼스에 속한 학자들이 모두 참석하지만, 오늘은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소르본에서만 학자들이 참여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저 그런 모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민우의 생각은 달랐다.
「랑느 박사님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모임입니다. 모두 박사님이 초대한 사람들이에요.」
민우의 설명에 타치카와가 깜짝 놀랐다.
「대학본부에서 주최한 게 아니고요?」
「학자들의 자율적인 모임이라서요. 소르본에서는 특별히 터치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쪽하고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저도 처음엔 놀랐었어요.」
「그러게요. 놀랍군요.」
아무래도 국내 학회는 연구 실적을 채워야 하는 수동적인 면이 없잖아 있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하기는 힘들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민우와 동료들이 학계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고.
「확실히 프랑스는 다릅니다. 분위기 자체가 다르군요. 뭔가 오래된 유적지에 온 느낌입니다. 연회장의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에서 역사와 전통이 느껴지고 있어요.」
「그렇다고 너무 몰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종의 엑조티즘이잖아요. 좋은 것만 취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만들면 되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타치카와는 심호흡하며 기합을 넣었다. 피식 웃은 민우는 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곧 몇몇 사람들이 민우를 주목했다.
「프로페서!」
곳곳에서 민우의 별칭이 나왔다. 처음 ‘소르본의 밤’에 참석했을 때는 어리바리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민우는 와인잔을 들고 인사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때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바로 예일대의 스톤 교수가 다가온 것이다.
그는 하이데거 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처음 만난 것도 ‘소르본의 밤’, 정확히는 그가 좌장으로 있던 테이블에서였다.
당시 ‘하이데거 철학의 비판적 접근’이라는 테마로 간이 세미나를 열었던 그는, 연구 성과가 아닌 가십거리를 나누다 민우에게 비판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세계적인 학자답게 바로 사과했고, 숙소로 민우를 초대해 하이데거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실존주의를 깊게 탐구하고 있던 민우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경험 중 하나였다.
그래서 스톤 교수의 얼굴을 보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얼마 만에 인사드리는 거죠? 미국에서 뵐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정말 오랜만에 뵙는 거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습니다. 하지만 프로페서만큼은 아니겠지요. 그때 그날 이후로 당신의 이름이 간간이 들려오더니, 이제는 문학과 철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박민우라는 이름으로 현대 사상사의 전과 후를 나눈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끄러워지네요. 아직 부족합니다.」
「지나친 겸손은 독이지요.」
「겸손이 아닙니다. 절반도 채 오지 않았어요. 앞으로 더 보여드릴 게 많을 겁니다.」
한발 앞서나간 민우의 한마디에 스톤 교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그러려면 이 늙은이가 더 오래 살아야겠는데요.」
「그런데 프랑스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이번 학기는 안식년이라 별장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당신이 온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더군요.」
「제가 운이 좋았네요.」
「운이 좋은 건 바로 나지요. 자, 건배나 할까요?」
씨익 웃은 스톤 교수가 잔을 내밀었다. 민우는 가볍게 건배했고, 옆에서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타치카와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타치카와는 틈틈이 불어를 공부한 성과가 있는지 어설픈 발음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사실 민우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처음 모임에 참석하는 타치카와를 위해 오늘은 계속 통역을 해주기로 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스톤 교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에서 국제상이 제정된다던 이야기가 있던데요.」
「기사 보셨습니까?」
「센트럴 북스 쪽에 인연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처음 들었고, 얼마 전에 가디언지에서 낸 기사를 봤지요.」
조슈아와 박윤지가 거의 동시에 기사를 터트려 준 덕에 지음사는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다행히 지음사에서 빠르게 대처해준 덕분에 민우에게 연락이 오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로 공식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아무래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전부 다 문학 부문 후보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프로페서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그렇죠. 훌륭한 분들이 많이 오셨으니까요.」
「이 중에서 수상자가 나올 것 같습니까?」
스톤 교수의 시선이 랑느 박사 쪽을 향했다.
민우는 그저 웃었다.
스톤 교수는 자기가 상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첫 상의 영예가 랑느 박사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민우를 국제무대로 인도한 것은 바로 랑느 박사였으니까. 연구 업적이나 다른 학술적인 공로를 따져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민우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아직 말씀드리긴 어려운 부분들이 많지만요.」
「그거 기대되는군요. 실은 친우들과 내기를 했습니다.」
「어느 쪽에 거셨습니까?」
「오늘 모인 사람 중에 수상자가 나온다에 걸었습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스톤 교수는 소르본 출신 중 한 명이 받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타치카와가 받게 되더라도, 오늘 모인 사람 중에 수상자가 나온다는 말은 성립된다.
「행운을 빕니다.」
「이기게 되면 한턱 사지요.」
아무래도 프랑스에 와야 할 이유가 또 생긴 것 같다.
* * *
그 시각, 파리에 도착한 의외의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나.
“고향에 온 것 같아.”
아름답기로 소문난 파리의 야경에 심취한 듯, 정연주가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를 수행하던 사람은 비서실장 유진태였다.
유진태는 주로 국내에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해외 스케줄에 동행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연주가 그를 지목했다.
다소 놀랐지만, 유진태는 기쁨을 감추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써야 했다.
그래서 그는 파리의 야경보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정연주가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배가 고프냐는 이야기가 나와?”
“음, 야경이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니까요. 기내식도 거의 안 드시지 않았습니까?”
“다이어트 중이라니까.”
“업무가 과도한데 다이어트까지 하시면 곤란합니다. 회장님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퍼스트 클래스의 멋진 식사도 그녀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평소에는 식사를 잘하다가 요즘에는 외모에 부쩍 신경을 쓰는 듯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던 유진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정연주가 갑작스레 파리행을 고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쯤 한창이겠지?”
“무엇이요?”
“소르본의 밤.”
유진태는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8시가 넘어 있었다.
“궁금하면 한번 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가씨가 오셨다는 소식을 알리면 랑느 박사께서도 분명 초대해 줄 겁니다.”
“아니, 됐어. 그러려고 온 건 아니니까.”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완전히 접었던 민우에 대한 마음이 다시 살아난 게 아닌가 걱정됐다.
분위기가 좀 어색해지자 정연주가 웃으며 말했다.
“슬슬 갈까?”
“가시죠.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그새 차를 준비했다고?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뭐하러 그래?”
“대한그룹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아가씨.”
“나는 대한그룹 사람이 아니라 청문대 사람이야.”
“그 청문대가 대한그룹 소유입니다.”
논리에서 밀린 정연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만 보면 유 실장은 우리 엄마를 닮았어.”
“원래 좋은 약이 입에 쓰듯 좋은 말도 귀에 쓴 법이죠.”
곧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크고 편안한 차였다. 운전기사는 따로 있었는데 프랑스 사람이라 한국어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능한 비서인 유진태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프랑스어가 유창하진 않아도 이미 기본 회화는 머릿속에 입력해 둔 상태였다.
기사에게 지시하기 전 유진태가 물었다.
“바로 숙소로 모실까요?”
“UPMC로 가긴 늦었겠지?”
정연주가 말한 ‘UPMC’는 약칭으로 소르본 대학교의 이공학부를 뜻한다. 그녀가 파리에 나타난 이유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당연히 늦었지요. 지금 저녁 8시입니다. 가 봐야 아무도 만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까지 단호할 필욘 없잖아.”
“저를 오래 부리고 싶으시다면 식사부터 먼저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유념해 주십시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식사부터 하러 갈까.”
“연회장으로 모실까요?”
“무슨 연회장?”
“소르본의 밤 말입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정연주는 살짝 웃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갑자기 소르본의 밤이 나와?”
유진태는 잠시 주저했지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곳에 박 교수님께서 계시니까요.”
“그러니까 유 실장 말은…… 내가 오빠 보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아닙니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린 정연주가 입을 가리며 계속 웃었다. 그러다 보니 유진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큰일 날 소리 하는 거야. 수빈이 언니가 들으면 기절하겠네. 그런 취향이었어? 평화로운 가정 박살 내는 취향. 아침드라마 좋아하지?”
“예? 아뇨.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진짜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하하하하.”
정연주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덕분에 유진태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이불처럼 푹신한 안도감이 몰려왔다.
곧 정연주의 입에서 유창한 프랑스어가 흘러나왔다.
유진태가 아니라 운전기사를 향해서.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유진태가 당황하며 물었다. 비서에게 있어 돌발상황은 가장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내가 가끔 가던 식당. 그렇게 맛집은 아닌데 늦게까지 하는 식당은 거기뿐이라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적어도 파리는 내가 유 실장보다 더 잘 아니까.”
“예…….”
유진태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뜻하지 않게 민우를 끌어들였다. 부끄러운 일이다. 정연주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말이다.
그때 창밖을 바라보던 정연주가 말했다.
“내가 왜 한 팀장 대신 유 실장 데려온 줄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묘한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진태가 웃었다.
“부리기 편하다는 말씀이군요.”
“마음대로 생각해.”
유진태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넘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뻔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