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38화 (438/500)

다시 프랑스로 (3)

숙소에 도착한 민우와 타치카와는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일단 푹 쉬시고 제가 시간이 되면 모시러 가겠습니다. 시장하시면 뭐라도 간단히 드세요. 아직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요.」

민우가 말했다. 타치카와는 팔을 돌리며 어깨를 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휴우, 그래도 가까운 곳에서 열려서 다행이군요.」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요.」

「아무래도 이렇게 오래 비행기를 타 본 건 처음이라서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아직 한창이신데요.」

민우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소르본의 밤’은 두 사람이 묵는 호텔에서 열리게 되어 따로 불편한 건 없었다.

보통 ‘소르본의 밤’은 전 세계에 있는 소르본 동문들이 함께하지만, 이번에는 프랑스에 머무는 학자들이 주로 모인다고 한다.

본 게임이 아니라 서브 게임 정도의 개념이다.

그래도 민우는 아쉽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행사를 열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다.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담 갖지 마시고 연락하세요.」

「예. 박 선생께서도 편히 쉬십시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각각의 방으로 헤어졌다.

객실은 깔끔하고 쾌적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코튼향이 가득했다.

민우는 캐리어를 내려놓고 객실을 둘러보았다.

침대는 세 사람이 나란히 남을 정도로 커다랗고 푹신했다. 미니바에는 각종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샤워부스와 욕조, 그리고 고급 어메니티가 놓여 있다. 상당히 비싼 호텔인 것 같았다.

민우는 커튼을 완전히 젖혔다.

커다란 창 너머로 파리의 전경이 보였다. 여름이라 해가 길었지만, 밤이 되면 야경이 제법 괜찮을 것 같았다.

‘수빈이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는 윤아도 데리고 와야겠다.’

소중한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역시 행복한 일이다.

객실을 대강 둘러본 민우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웰컴 패키지를 비롯해 다양한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쿠키와 과일 사이에 작은 쪽지가 있는 것을 확인한 민우가 손을 뻗어 쪽지를 집었다.

― 소소하지만 간단히 드실 만한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로페서> 제작진 일동.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제작진이 미리 숙소로 와서 이것저것 챙겨준 모양이었다. 민우는 휴대폰을 꺼내 한정현 감독에게 숙소에 도착했다고 톡을 보냈다.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민우가 문을 열었다.

「미스터 박!」

반가운 얼굴이었다. 민우는 랑느 박사와 가볍게 포옹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늘 잘 지내지. 그래도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내 제자들이 워낙 뛰어난 탓에 이제 슬슬 은퇴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하하하하.」

그 말에 함께 서 있던 미셸과 셀린느가 빙긋 웃었다. 이들도 소르본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며 학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쉬는 데 방해해서 미안하네.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지 못한 게 미안해서 말이지.」

「아뇨. 아닙니다. 전 괜찮아요. 이따 저녁 행사 챙기시느라 바쁘다고 미셸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그렇군.」

「들어오시죠.」

마침 할 말도 있었던 민우는 손님을 안으로 들였다. 마실 게 딱히 없어 미니바에 있던 와인을 따서 손님들에게 따라주었다.

랑느 박사가 물었다.

「오랜만에 프랑스에 온 소감은 어떤가?」

「다음에는 가족하고 같이 와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라고요. 역시 좋은 곳이에요. 프랑스는.」

「가정적이군.」

「그건 박사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랑느 박사도 해외 일정이 있으면 가족과 함께 가곤 했었다.

「다음에 가족과 함께 온다면 내 고향 집으로 초대하지. 농장도 있고 편히 쉬기 좋거든.」

「초대해 주시면야 저야 감사하지요. 딸애가 좋아하겠네요. 아, 그런데 한국에서 온 드라마 제작진은 만나 보셨습니까?」

「물론이지.」

랑느 박사는 <프로페서> 제작진이 소르본 대학교에서 촬영을 벌써 진행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바로 촬영에 들어간 걸 보니 일정이 촉박한 모양이다.

랑느 박사는 턱을 쓸어 만지며 회상에 잠겼다.

「드라마 디렉터가 아주 인상 깊었어. 예술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까. 잠깐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와인 한 병을 다 비웠지 뭐야.」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요. 그쪽으로는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이번에 제작 들어간 영화가 하나 있는데 그걸로 칸을 노린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랑느 박사가 반색했다. 칸 영화제는 프랑스에서 열리는 영화제다. 그러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우리 프랑스에서도 한국 영화에 관심이 아주 많지. <기생벌레> 이후로 더더욱 그랬고.」

「그렇죠.」

「다음엔 셋이 모여 한잔했으면 하는데. 어떤가?」

「좋습니다. 제가 따로 이야기해둘게요. 출국 전에 한번 모이죠.」

근황을 다 나눈 민우는, 아까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결심한 것을 위해 슬슬 시동을 걸었다.

「사실 미셸 씨랑 셀린느 씨에게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왕 이렇게 다 같이 오셨으니 지금 말씀드리고 싶네요.」

「갑자기요?」

두 사람은 눈을 깜빡거리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와중에 쉴 새 없이 떠들었지만,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는 명인대학교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좋은 인재를 발굴해서 명인대 교수로 초청하는 겁니다.」

「하지만 민우 씨는 한국문학 전공이잖아요?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중요한 말을 빼먹었네요. 저에겐 모든 학부의 교수 임용권이 있습니다.」

「우와!」

미셸이 감탄했다. 반면 셀린느는 차분한 표정으로 민우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민우가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공항에서 셀린느와 나눈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국어를 빠르게 습득하고 있었다. 이제 곧 논문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정도라면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셀린느가 명인대 강단에 선다면 어떨까?

민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학생들은 프랑스 인문학에 대한 저변을 넓힐 수 있고, 반대로 셀린느는 한국어를 더욱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혹시 우리들을 명인대로 초청하려는 거예요?」

「맞아요. 미셸 씨와 셀린느 씨를 교환교수로 모셔오고 싶습니다. 1년 정도 강의해 보시다가 괜찮으시면 계속 남으셔도 되고요.」

사실 교환교수 프로그램은 이미 여러 대학에서 시행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영어권 대학으로는 교수자원이 많이 움직이지만, 아직 유럽 쪽은 수요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럼에도 민우가 프랑스에서 먼저 움직이게 된 것은 정연주의 영향이 크다.

그녀도 랑느 박사와 연결되어 있었고, 주전공이 프랑스문학이다. 만약 이번 일을 뒤로 미루게 되면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계속 남으셔도 된다는 말은 정교수 자리를 보장해 드린다는 말입니다. 원하신다면 정년을 채울 때까지 한국에 계셔도 됩니다.」

「어, 엄청난 제안이네요!」

미셸이 흥분했다. 교수가 되기 어려운 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 공통의 문제였다.

민우가 말했다.

「미셸 씨는 좀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해요. 곧 아빠가 된다고 했으니까요. 그 상황에서 한국으로 오기는 어렵겠죠. 그래도 제안은 드리고 싶어요.」

「으음…… 확실히 그렇긴 해요. 하지만 한국도 무척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해요. 저번에 갔을 때 정말 좋았거든요.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여행해 봤지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한국이 처음이었어요.」

미셸이 솔직히 말했고, 셀린느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도 랑느 박사와 함께 ‘휴머니티’에서 강연한 적이 있었다.

「좀 시간을 줄 수 있어요? 돌아가서 와이프와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얼마든지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요.」

이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셀린느를 향했다. 그녀는 고민할 것 없이 바로 대답했다.

「저는 할게요.」

의외로 너무 쉽게 승낙이 나와 민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아요?」

「예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에요. 그래서 한국어를 공부하던 것도 있고…… 교환교수 이후에 정교수 임용 기회가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이야기잖아요?」

「이렇게 쉽게 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고마워요.」

「그럼 프랑스문학과에서 강의하게 되는 걸까요?」

「그래도 되는데, 저는 좀 다른 옵션을 드리고 싶네요.」

셀린느가 눈을 반짝였다. 흥미를 보인다는 증거였다. 민우가 준비한 것들을 차분히 꺼내 놓았다.

「인문대 안에 비교문학 협동과정이 설치되어 있어요. 한국문학은 물론 프랑스문학, 영문학, 중문학 같은 여러 분야를 공부하는 곳이죠. 아시다시피 한국문학은 세계 곳곳의 예술사조 영향을 받았거든요. 그 관계를 살피는 분야예요.」

「알고 있어요. 민우 씨도 그 분야 논문을 많이 썼죠?」

「맞아요.」

사실 얼마 전 비교문학의 거장인 강철훈 교수가 정년 퇴임했다. 그래서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셀린느와 미셸을 넣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명인대 입장에서는 크게 부담이 되는 스카웃은 아니었다.

「어때요? 한번 해볼 생각 있어요?」

「비교문학 과정이 좋을 것 같네요. 한국문학을 같이 접할 기회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바로 진행해 볼게요.」

셀린느는 마냥 기뻐하지 않았다.

기회가 아니라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비교문학 협동과정은 한국문학에 대한 지식도 많아야 한다. 그래야 해외의 예술사조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밝힐 수 있으니까.

그녀는 돌아가는 대로 한국의 주요 문학작품과 연구물을 닥치는 대로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무엇을 읽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눈앞에 아주 훌륭한 조력자가 있었으니까.

그때 옆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랑느 박사였다.

「하아. 미스터 박이 우리 소르본의 인재들을 모조리 빼갈 생각이군.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빼가면 어쩌나?」

「저 아직 결정 안 했는데요.」

뭔가 존재감이 옅어졌다고 느꼈는지 미셸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랑느 박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너도 결국은 가게 되겠지. 시기가 다를 뿐이지.」

「이야. 역시 날카로우셔!」

반응을 보니 미셸도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셀린느가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싱글이기 때문이었다. 미셸도 싱글이었다면 바로 결정을 내렸을 거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하지만 두 분께도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제가 박사님과 함께 IAHS에서 견문을 쌓은 것처럼요.」

「그건 그래. 그래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게 아니겠나?」

「그럼 박사님께서도 찬성하시는 겁니까?」

「찬성은 무슨. 나는 결정할 자격이 없네. 이제 두 사람도 학문으로 일가를 이룰 때가 되었어. 나는 그저 뒷짐 지고 물러나 구경만 할 뿐이지.」

관록이 넘치는 한마디였다.

민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이 지나고, 랑느 박사의 나이 정도 된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해줄 수 있을까?

민우는 지금 이 마음을 잊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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