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프랑스로 (2)
그 눈빛은 예전에도 자주 보던 것이었다.
정연주와의 인연은 명인대 석사 1학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연히 루카치의 유물을 얻게 되어 신비한 능력을 펼치게 된 민우는 강철훈 교수가 진행하던 프로젝트팀에 참가했다.
‘만약…… 능력을 얻은 것에 만족해 새롭게 도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정연주를 만날 일도 없었고, 아마 그저 그런 학자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루카치의 유고를 완성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오롯이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루카치의 유물은 낡은 것이었다.
언제 부서질지도 모르고, 이런 신비한 능력이 갑자기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노력에 불을 지폈던 것도 있었다.
보통 성공한 사람들은 노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민우는 강연을 나갈 때마다 노력보다는 즐길 것을 권했다. 그리고 다소 운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기도 한다.
교수이다 보니 대학원 진학에 관한 상담도 많이 받는 편인데, 그저 노력만 할 줄 아는 학생들에겐 진학을 권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우의 진실한 면모가 더욱 두드러졌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노력만 운운하는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었다.
‘아무튼 참 신기한 인연이야.’
그래 봐야 어딘가의 교수가 되어 서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될 줄 알았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궁금한 게 떠올라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협회 사무장은 구하신 거예요? 높으신 분들이 모인 곳이라 허드렛일을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설마 선생님께서 다 하시진 않으실 거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서지훈 총장이나 정연주, 유서희도 마찬가지였다. 회원들의 직급이 높으면 이사장, 낮아도 총장이니 사무직원이 필요할 터.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서지훈 총장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지.”
“아, 이런.”
보기 좋게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정연주와 유서희는 재미있다며 웃고 있다. 미리 모의했던 게 틀림없다. 민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까 총장이라면 또 모를까라고 해서 복수하시는 거죠?”
“하하하. 마음대로 생각해라. 아무튼 네 자리는 마련해 뒀으니 해외 일정 끝나면 본격적으로 달려 보자고. 솔직히 너만 한 인재가 없어.”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다.
새로운 정책에 관한 모든 언론 브리핑은 민우가 맡았다. 현재 민우는 대한민국에서 강사 인권에 앞장서는 명사로 알려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새교육협의회’의 실무를 맡기에는 더없이 안성맞춤이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고 있을게요.”
“잘 부탁해요. 사무장님?”
“예에……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유서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민우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 * *
시간이 흐르고 출국일이 다가왔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민우는 합류 지점에서 타치카와 교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번 해외 일정은 <프로페서> 드라마 제작진 및 연기자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작진에서는 민우의 편의를 배려해 출국 일정을 따로 잡았다. 취재진들이 붙으면 괜히 피곤해지니 배려해준 것이다.
민우는 단순히 제작진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 여러 경유지에서 초청을 받아 강연하게 되었다.
타치카와 교수도 스케줄을 함께하기 때문에 논의할 일들이 제법 많았다.
그래서 비행기는 타치카와 교수와 단둘이 타게 되었다.
「박 교수님!」
커다란 캐리어를 두 개나 끌며 타치카와 교수가 나타났다. 왠지 공항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민우가 웃으며 그를 맞았다.
「짐이 너무 많으신 거 아닙니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렇게 멀리 나가는 건 처음이라서요. 후우, 집사람이 이것저것 넣어주다 보니 꽉 찼네요.」
「일행들이 현장에서 보급해 주는 것들도 있으니 아마 괜찮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음, 일단 가실까요? 사람들이 많네요.」
「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출국대로 들어섰다.
민우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사진을 같이 찍어달라는 사람들도 있어서, 민우는 반갑게 웃으며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저, 사인도 해주시면 안 돼요?”
“주세요.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혹시 연락처도 알려주시면 안 돼요? 톡 아이디라도…….”
“오, 그러면 와이프한테 혼나요.”
시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민우의 모습을 보고 있던 타치카와 교수가 감탄했다.
그도 한국어 일상 회화 정도는 가능한 수준이라 민우가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박 선생은 마치 연예인 같군요.」
「제가요? 전 얼굴이 안 돼서 안 됩니다.」
「인기가 있잖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 주고 말이죠.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일일이 이야기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거 같은데…… 연예인들도 비슷한 고충이 있는 거 같더군요.」
「오히려 감사한 일이죠. 예전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거든요. 힘들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와요. 가끔은 이게 꿈인가 싶기도 하고.」
「그렇군요.」
「뭐, 인기를 위해 공부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람이라 생각하고 즐겨도 되는 거잖아요?」
타치카와 교수는 깊이 탄복했다. 일본에서 처음 만났을 때 민우가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모든 수속을 마친 두 사람은 비즈니스석에 자리했다.
이코노미만 이용했던 민우는, 제작진의 배려로 좀 더 편하게 여정에 오를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타치카와 교수가 물었다.
「아마 그쪽 시간으로 오후에 도착하게 될 거 같은데, 그날 밤에 ‘소르본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이 열릴 겁니다. 첫 일정은 그게 되겠네요.」
「‘소르본의 밤’이요?」
「일종의 친목 모임인데요. 약간의 학술 프로그램도 겸하는 곳이에요. 만찬을 즐기면서 세미나가 열리는 식이죠. 각자 테마를 정해서 테이블 잡고 발표도 합니다.」
「신기하군요.」
「사실 석사과정 때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워낙 인상적이어서 제가 몸담고 있는 학회에 도입 중입니다. 반응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민우는 이재환, 최민식, 강예진 세 사람이 창립한 ‘현대서사학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아,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전에 휴머니티에 특강을 나갔을 때 어떤 학생이 이야기해주더군요.」
「아직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학회를 좀 젊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경직되어 있으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동감합니다. 그렇다면 ‘소르본의 밤’도 대강 비슷한 분위기가 되겠군요.」
「크게 다르진 않아요. 사람만 다를 뿐이죠. 유쾌한 분들이 많습니다.」
동아시아권 학회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유럽의 학풍은 한국이나 일본처럼 타이트하지 않다. 여유와 낭만이라는 게 있다.
타치카와에게 아쉬운 것은 오로지 언어에 대한 장벽뿐이었다.
세계적인 학자들과 교류할 기회가 생겼는데,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었다.
민우는 핸드폰을 켜 일정표를 띄웠다.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소르본에서 강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틀 정도 머물렀다가 바로 영국으로 넘어갑니다. 중간에 베를린에 잠시 들를 수도 있는데 아직 확정된 건 아니라고 하네요.」
「영국은 꼭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보게 되는군요.」
「해외에 잘 나가지 않으시는 모양이죠?」
「부끄럽지만 나가봐야 한국이나 중국을 다녀오는 게 다였지요. 이렇게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도 처음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죠. 누구에게나 다 처음이라는 게 있는데.」
곧 비행기가 힘차게 이륙했고, 두 사람은 간단히 마실 것을 시킨 뒤 의자에 편히 앉았다.
타치카와 교수는 손바닥만 한 프랑스어 회화집을 꺼냈다.
그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무사히 파리에 안착한 민우와 타치카와 교수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입국수속을 마쳤다.
게이트로 나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소르본에서 마중 나오기로 한 미셸과 셀린느였다.
「민우 씨!」
언제나 쾌활한 미셸이 손을 흔들었다. 개구쟁이 같았던 그도 이제 곧 아빠가 된다고 하니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민우는 타치카와 교수를 데리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와우! 오랜만이에요! 파리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매번 한국에 가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하하. 저 그렇게 매정한 사람 아닙니다.」
「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바쁜 사람은 맞잖아요. 이제 좀 한가한가 봐요?」
「그건 아닌데,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요.」
민우와 미셸은 가볍게 포옹했고, 셀린느와도 포옹했다. 민우는 바로 타치카와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이번에 명인대 역사학과에 부임한 타치카와 유지 교수님입니다. 한국에서 매우 유명한 분이시죠.」
「저도 알아요. 이번에 오신다고 해서 좀 공부했거든요. 반갑습니다.」
「안녕…… 하세요?」
타치카와 교수는 어색한 프랑스어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민우는 그를 위해 기꺼이 통역했다.
마중을 나온 두 사람은 프랑스식으로 타치카와와 인사했다.
갑자기 포옹하자 타치카와 교수가 당황했다. 하지만 미셸의 등을 두드릴 정도로 빠른 적응력을 보였다.
민우는 재밌다며 웃었다.
보수적으로 유명한 일본 학계에서 온 학자에게는 하나같이 신기한 경험일 것이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소르본 학생들이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영토분쟁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국제적인 문제죠.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영토분쟁이 빈번했고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죠. 교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한 학생들을 위해 그 분야에 정통하신 분이라는 설명을 해두었어요.」
미셸이 말했고, 민우가 그것을 그대로 일본어로 옮겨 주었다.
여기에서 민우의 진가가 다시 한번 발휘되었다.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통역해 주는 것도 아니고 바로 일본어로 통역해 주니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민우는 이미 전 세계의 주요 언어를 모두 마스터한 상황.
루카치의 유물에 깃들어 있던 힘을 흡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밤을 새우는 그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냈어요?」
셀린느가 물었다. 민우를 향한 질문이었다.
「그냥 바쁘게 지냈어요. 대학에서 하는 일도 좀 있고, 연구도 해야 하고요.」
「소식은 들었어요. 신문에서 민우 씨 이름이 자주 나오던데요.」
「한국어 많이 늘었나 봐요? 신문을 볼 정도면.」
「이제 작문도 할 수 있어요. 조금만 더 하면 논문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논문은 쉽지 않죠. 나중에 한번 보내줘요. 봐 드릴 테니까.」
그 순간 민우는 구상만 해 오던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그럼 슬슬 출발해 볼까요? 배고프실 것 같아서 차에 간단히 먹을 걸 사 놨어요.」
「그거 반가운 소식이네요.」
곧 네 사람이 차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미셸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묵을 숙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