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프랑스로 (1)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까는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연구실을 나서며 박윤지 기자가 멋쩍게 웃었다. 약속이 내일인데 하루 먼저 찾아온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래도 민우는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박윤지 기자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직업의 귀천을 떠나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건 본받을 만한 거니까.
“아닙니다. 이 정도로 노력하시는데 저도 도와드려야죠. 정말 윤지 씨 열정은 대단해요.”
“와! 교수님이 칭찬해주시니 기분 좋은데요? 학부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시간 괜찮으시면 석사 하러 대학원 오세요. 더 재미있어질 겁니다.”
“아, 그건 좀…….”
농을 건넨 박윤지 기자가 꾸벅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속보로 내보내려면 근처에서 바로 작업을 해야 해서요.”
“아아, 미리 말씀 안 드린 게 하나 있는데.”
박윤지 기자가 녹음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려고 주섬주섬하자, 민우가 손을 휘휘 저었다.
“녹음하실 필요 없어요. 윤지 씨에게 좀 안 좋은 이야기라서.”
“저한테 안 좋은 이야기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박윤지가 핸드폰을 꺼내려던 손을 뚝 멈췄다. 민우가 미안하게 웃는 모양새를 보니 왠지 불안해졌다.
“설마…….”
“아마 지금쯤 가디언 쪽에서 속보로 내보냈을 겁니다. 문학상 관련 이야기요. 오시기 전에 아는 기자하고 통화했었어요.”
“아…….”
해맑던 표정이 나라 잃은 표정으로 변했다. 민우는 미안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쩔 수 없었어요. 예전부터 약속이 되어있던 거라서요. 미안합니다.”
민우가 대뜸 사과하자 박윤지 기자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에요! 미안하다뇨! 지금까지 교수님이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요. 그래도 오프라인 첫 인터뷰는 제가 딴 거잖아요? 그걸로 만족해야죠.”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고요.”
“제가 더 감사하죠! 그럼 전 가볼게요. 국내에서만큼은 처음으로 보도하고 싶어요.”
“내일까지 시간 끌어드릴 수 있으니 천천히 하셔도 될 겁니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죠! 감사합니다. 기사 나오면 연락드릴게요!”
다시금 꾸벅 인사한 박윤지 기자가 복도를 달렸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민우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살기에 몸을 흠칫 떨었다.
“우리 박 교수님 상냥도 하셔라. 어떻게 해주셨길래 여기자님 입에서 잘해주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요? 근사한 곳에서 데이트라도 하셨나 봐요?”
팔짱을 낀 이수빈이 어느새 바로 뒤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민우가 깜짝 놀랐다.
“어, 언제 왔어?”
“언제 왔긴요. 바로 옆이 내 연구실인데 오고 말고 할 게 있어요?”
“오해야.”
“국문과에서 박사까지 한 양반이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라는 말을 모르지 않을 텐데.”
“…….”
이수빈은 평론가 출신이다. 논리를 따지는 것은 민우에게 조금도 지지 않는다. 이럴 때는 굽히고 들어가는 게 정답이다.
“잠깐 인터뷰한 게 다야. 박 기자는 당신도 잘 알잖아?”
“잘 알죠. 그런데 원래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에요. 불륜 통계를 보면 주변인과 얽히는 경우가 많은 거 몰라요?”
이수빈은 생글생글 웃으며 민우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좀 지나가면서 인사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오늘따라 한 명도 지나가질 않았다. 그 흔한 한진섭조차 보이지 않는다.
결국 민우는 두 손 들었다.
“다녀오는 길에 선물 사 올 테니까 그만하시죠.”
“오, 선물 좋아요. 기왕 사 오는 거라면 비싼 거 말고 오래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걸로 부탁해요.”
“오래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거?”
“마음이 담긴 선물을 가져오란 말씀.”
“그게 더 어렵잖아.”
“우리 박 선생님은 척척박사시니까 잘하실 수 있겠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애초부터 이게 목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이수빈은 돌아서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가 버렸다.
‘생각해 보니 출국 날이 얼마 안 남았네.’
이제 일주일 정도 남은 듯했다.
이번 일정엔 타치카와 유지 교수도 참석한다. 명인대 역사학과 정교수로 임용된 그는 벌써부터 학내 세미나를 열 정도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박민우상’을 줄 거라고 귀띔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한일관계 및 독도 연구의 일인자, 그리고 명인대라는 거대한 배경을 갖게 된 그는 국내 역사학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소르본에도 전해졌다.
타치카와 유지 교수의 합류 소식을 알게 된 소르본의 대학본부에서는 특별히 타치카와 교수가 강연할 수 있는 세션을 만들어주었다.
‘모든 일이 순항 중이야.’
태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프랑스에 가서 뭘 사야 하지? 영국에 가서도 하나 사야 할 거 같은데…….’
눈앞이 캄캄했다.
덕분에 민우는 연구실로 돌아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야 했다.
* * *
출국까지 이틀을 남겨놓고, 민우는 서지훈 총장의 호출을 받았다.
총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청문대 손님들이었다. 정연주 이사장과 유서희 총장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총장협의회에서 공격이 들어온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멤버가 멤버인 만큼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직급만 따진다면 모인 사람 중 자신이 제일 아랫사람이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총장님.”
민우가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유서희 총장이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호칭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런 편한 자리에서는 선배라고 해도 됩니다. 누나라고 해도 좋고.”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제가 명인대 총장이라면 또 모를까.”
그 한마디에 서지훈 총장이 피식 웃었다.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냐?”
“하하하하. 농담입니다.”
유서희가 명인대 출신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청문대에서 온 손님을 비롯해 민우와 서지훈 총장도 모두 명인대에서 공부했다. 즉, 소속은 달라도 동문이라는 교집합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 민우는 고위직 사람들 대부분이 명인대 출신이라는 것에 약간의 피로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다들 친해지고 싶었는지 선배나 형, 누나라고 부르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서희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나이라도 어리면 연주처럼 좀 편하게 하겠는데 연상이었다.
“민우 후배 활약은 잘 듣고 있어요. 아주 대단하던데? 신문에 언급이 안 되는 날이 없더군요. 곧 소르본으로 간다면서요?”
“그렇게 됐습니다. 드라마 촬영하고 좀 겹쳤거든요. 전에 랑느 박사님께 신세 진 것도 있고요.”
프랑스 이야기가 나오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타치카와 교수를 뺏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올 게 분명했으니까. 그와 함께 출국한다는 것은 이미 기사화되어 널리 퍼졌다.
아니나 다를까, 유서희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타치카와 교수의 일은 유감이에요. 일 년 농사를 망친 기분이 들더군요. 우리도 정말 공을 많이 들였는데 말이죠.”
“그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타치카와 선생님의 선택은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래야지요. 앞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애써주실 분인데. 운 좋은 줄 알아요. 우리 이사장님만 안 계셨더라도 한소리 했을 거예요.”
“하하하…….”
저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다.
문득 정연주와 유서희가 상당히 좋은 케미를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연주가 부드럽고 유연한 성격이라면, 유서희는 강직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니까.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잘 채워줄 수 있을 거다.
“뭘 그렇게 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잘 지내셨나 궁금해서요.”
“어떤 잘나신 총장님 덕분에 피곤한 거 빼고는 별일 없지요. 아휴, 총장협의회 총회 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니까요.”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서지훈 총장에게 이미 들은 뒤였다.
총장협의회에 출석한 서지훈 총장은 말 그대로 회의실을 뒤집고 나왔다. 혼자 나온 것도 아니라 뜻을 함께할 총장들을 모아서.
지금은 20명이 넘는 총장들이 ‘새교육협의회’에 가입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기존 협회에서는 회원들이 줄줄이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총장협의회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불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웠다.
주축들이 모두 나가버리면 껍데기만 남을 게 분명하니까.
명인대와 청문대가 제시한 제안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대학원생과 강사들이 향후 대학의 경쟁력이 될 거라는 민우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하지만 범영민 협회장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명인대와 청문대는 너무나 큰 방파제였다. 예상과는 달리 그 누구도 이 두 대학을 대체하지 못했다.
“제가 여기에 불려왔다는 건 뭔가 일이 있다는 소리겠죠?”
민우가 물었다. 대답은 유서희의 입에서 나왔다.
“정확하네요. 일이 좀 있어요.”
“나쁜 일은 아니죠?”
“좀 애매하긴 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좋은 일에 가깝겠죠.”
이번엔 유서희가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는 민우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연주가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민우를 청문대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 부분에서만큼은 정연주는 민우와의 친분을 이용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연주는 민우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래서 청문대를 떠날 때에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고 그를 응원해 주었다.
“일단 앉아라.”
“네.”
민우는 서지훈 총장의 옆에 앉았다. 곧 비서가 커피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서지훈 총장이 말했다.
“새 협회도 출범했고, 곧 총회를 해야 하는데 상의할 일이 있어서 불렀다. 다음 주면 네가 한국에 없을 테니까.”
“말씀하시죠.”
“총장협의회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대로 놔둘지, 아니면 공격해서 와해시킬지 고민이라서.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민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새 협회 수뇌부에서 고민할 만한 일이다. 독하게 마음먹는다면 날려버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지만, 부담이 클 테니까.
그리고 새 협회가 너무 빨리 성장하는 것도 악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곧 민우가 답을 내놨다.
“저는 총장협의회가 이대로 존속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새교육협의회가 좋은 취지로 설립되긴 했지만 아직 내부 결속력이 약하잖아요. 내부 결속을 다지려면 역시 외부에 적을 만들어야죠. 지금 보면 총장협의회를 대신할 적은 없습니다.”
“음, 그렇지.”
서지훈 총장을 비롯해 청문대에서 온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리고 새교육협의회는 입회 조건이 따로 없잖아요. 국립대든 사립대든 모두 포용할 수 있으니 총장협의회 세력을 자연스레 흡수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겁니다.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요.”
“역시, 같은 의견이군.”
“이미 그렇게 의논하셨나 보네요?”
“맞아요. 그래도 우리 이사장님이 민우 후배님 생각을 꼭 들어봐야 한다고 하셔서 말이죠.”
유서희가 대답했다.
때마침 민우와 눈을 마주친 정연주는 싱긋 웃었다. 맑고 커다란 두 눈에서 민우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느껴졌다.